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령왕 (문단 편집) === 대외 정복 활동 === 503년 9월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으며,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 현재 [[북한]] [[황해북도]] [[신계군]] 일대.]을 공격했다. 507년 5월에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으며, 10월에 고구려의 장수 고로(高老)가 위말갈과 함께 쳐들어와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자 다시 격퇴시켰다.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크게 무너뜨렸고[* 520년대에 제작된 [[양직공도]] 원본에서는 [[백제]]의 부용국들 중 하나로 [[침미다례]]로 추정되는 지미(止迷)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무령왕 대까지는 구 [[마한]] 세력이 아직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12년 12월에는 대가야 [[반파국]]의 세력 하에 있었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의 지역을 병합함으로써 [[임실군|임실]], [[남원시|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고, [[섬진강]] 일대를 확보한 뒤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서기]]》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반파국]]의 세력권이었던 네 곳을 빼앗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에서는 [[고령군|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더 나아가 513년 11월 5일에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주리즉이(州利卽爾)를 보내 역시 [[반파국]]의 세력권이었던 [[기문]](己汶)과 대사(帶沙)까지 병합하였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반파국]]은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기에,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반파국]]이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의 무령왕 대 기록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당시 백제의 영역과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의 [[안장왕|흥안태자]]가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에서 등장하는 것[*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이 설화에서는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개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으로 보아 백제가 [[동성왕]] - 무령왕 - [[성왕(백제)|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일시적으로 수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수복한 시기는 백제 [[성왕(백제)|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며, 이후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동성왕]]~무령왕 대 기록에서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여군|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관찰되는 것 또한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이나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결과로 추정된다. 즉 백제가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옛 [[위례성]]까지 치고 올라갔던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곡성이 [[신계군]]의 옛 이름이라는 것을 근거로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시|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갔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백제 도읍 [[웅진성]]에서 신계까지 올라가려면 [[고양시]] - [[파주시]] - [[개성시]] - [[평산군]] 일대까지 모조리 다 백제의 세력권이었어야 한다는 해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