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현실에 구현된 [[막장 드라마]] ==== 천하 통일 뒤 정확히 10년 만에 사마염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사마충]]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충은 지금으로 보면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진단될 정도의 백치'''였다. 사마염도 살아 생전 이를 걱정했지만 그래도 사마충의 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장남인 사마충으로 밀고 나갔고, 그 대신 작은 아버지인 사마량, 장인 어른인 [[양준(서진)|양준]](楊駿), 개국 공신인 [[위관]](衛瓘)에게 사마충의 보좌를 부탁했다. 하지만 양준은 황족으로 군권을 잡던 사마량을 경계해서 쓰러진 사마염이 애타게 찾는데도 사마량을 예주로 발령내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렸고, 이에 남은 위관은 알아서 [[버로우]]를 타버렸다. 이로써 외척인 양준 일파가 조정의 권세를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이들이 쥔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 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인망이 좋아서 죽자마자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가남풍의 자작극으로 일부러 사마량과 위관을 총애해 사마위의 어그로를 끈 뒤 사마위에게 몰래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고 한 것이다.]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이렇게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쥔 가남풍은 그래도 [[장화(삼국지)|장화]]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십여 년 동안이나 정사를 그럭저럭 꾸려나갔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는 모양.[*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자치통감]]》 ] 어쨌든 [[삼국시대(중국)|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호족들의 사치와 삽질에도 고생은 적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의 인구는 세 나라를 더해도 777만 명 정도인데, 서진 대에 이르러 갑자기 인구가 1,600만 명으로 불어나는 것은 난세 동안 호적에 안 잡히던 백성들이 통일 뒤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의 호구(戶口)라는 것은 戶의 경우 '집'을 의미하며, 口는 개별적인 인구를 말한다. 사료에 따라 戶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호구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보통 이들 口를 신분별로 나누는 것은 시대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전한 시대에는 일단 대남(大男), 소남(小男), 대녀(大女), 소녀(小女)등으로 구분한 것이 보인다.[* [[후베이성]] [[징저우시]] 출토 <이년 서향 호구부> 등.] 이처럼 진한 시기에 이미 이들에 대해 성별, 연령에 따른 상세한 인구 파악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간간히 목간 자료로 출토되고 있다. 물론 완벽한 파악은 한없이 멀었다. 즉 이 시대에 인구 폭증은 이러한 조사가 훨씬 원활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고 사마염과 사마충의 통치는 분명히 성세라고 할만했기에 이 시기 서진이 무조건 난맥상 만을 보였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소빙하기]]에 들어선 기후인지라 [[황하]]와 [[장강]]이 말라붙을 만큼 극심한 가뭄과 매서운 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소민(劉昭民), 『기후의 반역』,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이런 마당에 [[왕융]] 같은 귀족들은 [[금전교|제 잇속부터 챙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담사상|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고, 실권자인 황후는 밤마다 애들과 놀아나면서 [[섹스|검열삭제]]를 벌이는 데다, 황제라는 작자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라는 [[지적장애]]에 걸맞은 개소리나 해대고 있으니 끝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팔왕의 난]]이라는 실로 핵폭탄급의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본래 사마충의 태자 [[사마휼]]은 가남풍이 아니라 후궁 사구(謝玖)의 소생이었는데, 가남풍은 의붓 아들이 황제를 하면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마휼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그 방법이란 사마휼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아서스 메네실|폐하께선 이제 물러나십시오. 안 가시겠다면 제가 보내드리지요.]]'라는 글을 베껴쓰게 했다. 이 일로 사마휼이 유폐되자 태의령 정거[* 사마염에게 치두구를 바쳤다가 혼쭐난 그 인물 맞다.]를 보내 독살하려고 했는데, 사마휼이 약을 거부하자 약방망이로 때려 죽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01년, 마침 때를 노리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이때다 하고 사촌인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함께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가남풍 일파를 싸그리 쓸어버린 뒤 정권을 차지했다.[* 태자를 제거한 이상 명분으로는 아주 충실하다. 특히 가남풍에게 다른 자식이 없었으니.] 하지만 사실 사마륜도 부하 손수(孫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니 또 모순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태자는 이미 죽었고 분수를 모르는 사마륜은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밀어낸 뒤 기어코 자신이 황제로 올랐다가, 사마경을 필두로 한 나머지 황족들에게 몰려서 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뒤로는 황족들 가운데 '''한 놈이 나대면 나머지가 족치는 [[무한루프]]''' 상태로 돌입해서 자기네들끼리 사이좋게 치고 박고 싸우다가, 사마충 사후[* 동해왕 사마월이 떡을 줬는데 그걸 먹고 앓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독살이 확실하나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옹립하면서 팔왕의 난은 가까스로 끝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