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언론통폐합 (문단 편집) == 이어지는 언론인 해직과 세뇌교육 == >80년 5월,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국 정부가 전두환 집권에 호의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한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신군부 측이 사주의 개인 비리를 들먹이며 회사를 언론통폐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으니 미국 내 친한파 인사와 긴급 인터뷰해 기사를 보내달라고 서울 본사에서 요청했다."며 "고민 끝에 인터뷰 기사를 전송했다."고 이 기자는 말했다. "이는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 >'''- [[http://www.peoplepower21.org/Magazine/709708|<신문, 재벌/족벌의 독점소유부터 깨야(김일 기자 글)>]] - 참여사회 1998년 10월호 p21~22''' 신군부의 입장에서 언론통폐합은 여러 효과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잠시 '[[서울의 봄]]'을 맞아 자유화의 기대에 부풀었던 언론의 기를 꺾어 놓음으로써 언론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케끔 만드는 것이었다. 정통성이 전혀 없는 신군부로서는 언론이 단지 굴종하는 것만으론 모자랐다. 언론통폐합 자체를 떠나 이전부터 나돌던 언론통폐합에 대한 소문 역시 언론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언론인 강제해직은 언론통폐합에 의해 또 이루어졌다. 1980년 방송 통폐합 당시 민간 방송사에서 KBS로 간 인원은 TBC 681명, DBS 139명, CBS 106명 등 모두 1,105명에 이르렀고 이들 중 2백여 명이 [[땡전뉴스|새로운 방송 목적]]에 적응하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김해식 박사는 1980년 1월 당시 언론 종사자 수는 18,730명인 반면 탄압 뒤인 1981년에는 16,786명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1,900여 명이 한꺼번에 해직되었을 것으로 봤다.[* <한국언론과 사회학>. 김해식 글. 나남. 1994. p156.] 해직 광풍에서 살아남은 언론인들은 '합격자'가 아닌 '세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세뇌]] 수법이 얼마나 치졸했는지 신군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일보 전 회장 [[방우영]]조차도 그 수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통폐합을 단행한 전 정권은 기자들을 세뇌 교육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내걸어 전국 1,900며 명의 언론인들을 새마을연수원에 입소시켰다. 우리 사도 나를 비롯하여 120명이 11회에 걸쳐 수원에 있는 연수원에 들어가 2박 3일 동안 곤욕을 치뤘다. 악명 높은 '삼청교육'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인 집단교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생각과 인식이 얼마나 전근대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 >'''- <조선일보와 45년 : 권력과 언론 사이에서>. 방우영 저. 조선일보사. p19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