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만조선 (문단 편집) === [[진국(국가)|진국]]과의 관계 === 그 당시 [[진국(국가)|진국]]은 [[전한]]과 직접 교류하려 했으나 당시 위만조선은 진국이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교역할 때는 반드시 [[위만조선|조선]]을 통해서 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때의 진국과 전한 사이 중계무역으로 당시 위만조선은 큰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나라는 BCE 109년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조선을 설득하려 했으나 당시 위만조선의 왕이었던 [[우거왕]]을 결국 설득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전한과 위만조선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전한과 위만조선 사이에 '''[[왕검성 전투|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진국과 위만조선, 전한의 삼각관계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셈. 전투가 끝나고 (전쟁 전에 내려간 조선상 [[역계경]]과 더불어)[* 조선상 역계경은 전쟁 이전 우거왕의 대한(對漢) 정책에 반대했으나 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본인 휘하의 민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망명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의 유이민 파동과는 다른 인물이다.] 수많은 고조선 유민이 훗날 삼한이 될 한반도 남부로 망명해 삼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위만조선 유민들이 가장 많이 유입된 곳은 다름아닌 [[침미다례]] 일대였다. 침미다례는 그 전에도 유리한 입지와 좋은 기후 덕택에 잠재성은 컸지만, 선진 기술과 앞선 정치 문화를 경험한 위만조선 유민들이 대거 침미다례로 흘러들어 기존 침미다례 선주민이었던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에게서 주도권을 가져오면서 더욱 큰 번영을 이루게 된다.[* 물론 이후 침미다례에는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와 묘제 및 문화가 같은 토돈분구묘인들도 들어오게 되지만, 위만조선인들에게서 침미다례의 주도권을 가져오진 못했다. 옹관묘 전통은 주로 위만조선계 조선인들이 주축이 되어 확립한 묘제 전통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그보다 약 백 년 전 조선인들, 즉 준왕계 조선인들이 먼저 이주했던 전북 일대에는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한 이해못할 고고학적 현상이 발생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한편 침미다례 다음으로 위만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은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에 사로국을 구성한 6부촌이 조선 유민이었다고 서술한 오늘날의 서라벌 일대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요약하면 위만조선인들의 남하는 [[침미다례]]와 [[신라]]를 구성하게 되는 인적 자원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단, 사로국을 건국하여 초기 지배층이 된 주체는 기원후 2세기 초중반 경 옛 진번 일대에서 남하하여, 서라벌 선주민 집단인 전국연의 요서-요동 정벌 당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위만 집권기에 남하한 조선인 집단, 위만조선 멸망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이 세 집단을 아울러 하나로 묶은 낙랑인 집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사로국의 위만조선계는 신라 초기 6부의 일부는 이뤘지만 박석김에는 들지 못했으니 침미다례에서와는 달리 주요 지배층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진국의 실체는 불분명하나, 소국 이전 단계 또는 소국 내지 소국연맹 단계로 추정되며 크게 두 차례의 유이민 파동[* 위만의 역성혁명, 위만조선 멸망 및 한사군 설치]을 거치며 당대 한반도 최고의 선진지역이었던 위만조선 지역의 세형 동검-초기 철기 문화를 수용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진국은 《후한서》 및 《정사 삼국지》 <위지>에서 진한 또는 삼한의 전신으로 이야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