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책봉관계 (문단 편집) === 일반화에 대하여 === 가령 제임스 밀워드(James Millward)는 [[카자흐 칸국|카자흐]]와 청 사이의 말 무역을 청 측이 공마(貢馬)로 간주했다는 점을 들어,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를 모두 조공관계로 설명하는 중화적 시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James Millward(1998), 《Beyond the Pass:Economy, Ethnicity, and Empire in Qing Central Asia, 1759~1864》 pp. 48~49.] 한지선은 인도양 제국과 명과의 관계에서 조공이 없어도 호시는 있었다는 지적과 함께 조공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편차는 매우 커서 인도양 주변 지역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공책봉관계에서 보이는 엄숙한 의례나 의례의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나타나지 않음을 꼬집었다.[* 한지선(2019), "印度洋 貿易 네트워크 상에서의 朝貢과 互市", 《明淸史硏究》 52.] 정동훈은 11세기 초 [[귀주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둔 후 고려가 거란에 제공한 물자와, 17세기 중반 병자호란에서 탐패한 조선이 청에 바쳐야 했던 물자는 비교할 수 없는 등, 양자 모두 '조공'이라는 영속적 관행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실체를 주체별로 달랐음을 지적하였다.[* 정동훈(2020), "고종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 《한국중세사연구》 61, p. 250.] [[후마 스스무]]는 베트남이 명청조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서도, 대월황제(大越皇帝)라 칭하고 중국이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월황제를 안남국왕이라 적고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온 점을 거론하며, 조선의 경우 그 통치자가 스스로를 '황제'라고 하고 연호를 사용했다면 중국이 눈을 감고 계속해서 그들을 책봉해주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점과 명청의 대조선 정책에서는 찬탈자에게 책봉을 해야하는지 여부를 두고 중국에서 열띤 논쟁이 있던 반면, 대베트남 정책의 경우 그런 열띤 논쟁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공과 책봉 제도가 이론에 기초한 추상화와 형식화가 진행될수록 동아시아의 개별 국가에 대한 명청의 정책 현실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Fuma susumu(2007), "Ming-Qing China's Policy towards Vietnam as a Mirror of Its Policy towards Korea: With Focus on the Question of Investiture and 'Punitive Expeditions.'" 《Memoirs the Research Department of the Toyo Bunko 65》.] 구범진은, 명과 티무르, 영국과 청 관계 같이 칭신을 전제하지 않은 조공은 그 시점에서 이미 '조공'이라고 볼 수 없고, 책봉에 있어서도 1회성이나 이벤트성 영봉을 제외하면 결국 청의 조공국은 잘쳐줘도 조선, 베트남, 류큐, 타이의 네 나라만을 인정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엽 청과 정상적인 책봉-조공관계를 맺은 곳은 조선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는 '책봉-조공 패러다임'이 이제 더 이상 역사상의 분석 틀로서 그 효용성을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로 일반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구범진(2010),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pp. 293~316.] 정동훈은 명의 '조공시스템'이란 애시당초 기획된 적도 없으며, 개별적 상황에서 각각 창출된 몇가지 제도, 관례를 후대의 사가들이 임의로 창출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홍무제]]나 식자층이 미구로 자신들이 고안해낸 관례들을 《주례》와 같은 고전을 재현해낸 척 하였으나, 실제로는 고려와 안남이 주체적으로 봉표칭신한 우발적 사건을 계기로 등장하여 진일보했다고 주장했다.[* 정동훈(2019),"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역사와 현실》 113; "明과 주변국의 外交關係 수립 절차의 재구성 – 이른바 ‘明秩序’ 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여-", 《명청사연구》 52.] 시슈렌(习書仁)은 삼국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관계의 성격을 '종번관계'로 규정하고 종번관계가 시시각각 변하고 변화하는 현실, 즉 종번관계의 확립과 지속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한중관계를 요약한다. 그는 3~4세기 [[신라]]와 [[백제]]가 주동적으로 중국에 '칭신납공(稱臣納貢)'의 관계를 수립하였고,[* 그는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제후국,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제후국인데다가,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군현]]을 설치하였으므로 중국의 강역이며 그 안에서 흥기한 고구려는 신라 및 백제와 달리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이해한다. 习書仁(2021), 《古代中朝宗藩關係與中朝疆界歷史研究》, pp. 27~39.] [[원 간섭기|원대]]에 종번관계가 강제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짧은 기간 비정상으로 본다. 뒤이은 명조와 청조가 그 초기에 각종 간섭과 조공 부담을 가중하였지만 그것은 주로 조선이 주동적으로 참여한 종번관계의 유구함에 있어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종번관계는 중국이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과 특정한 조건하에 형성된 독특한 국가관계로, 이 체제하에서 종주국과 번속국 사이에는 수많은 불평등한 요소가 있었으나, 종주국의 대다수 통치자는 한국의 내정과 경제에 간섭하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종주국은 '천하공주(天下公主)'로 주변국을 우대했고, 주변국은 그 지위와 명분을 중시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근대 식민제도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习書仁(2021), 《古代中朝宗藩闘係與中朝疆界歷史研究》.]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