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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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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위치한 1~4세기경 청동기시대, 금관가야 유적이다.
1963년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편집]
원래 사적 제2호는 김해 회현리 패총이었다. 바로 옆에 봉황대 유적(과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이 있었는데, 이 두 유적이 서로 관련이 크다는 지적이 있어왔고 2003년에 둘을 합쳐서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재지정했다. 패총(조개무덤)과 봉황대는 김해 봉황동 유적의 일부분이 되었다.
2.1. 회현리 패총[편집]
패총, 즉 초기 가야 사람들이 조개를 까 먹고 조개껍데기 등 각종 쓰레기를 버린 구덩이로 수많은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어 주목받았다. 수많은 김해식 토기(주로 취사용), 각종 철기, 잡아먹은 동물뼈, 일본계 수입품 등. 중국 신나라 때 동전이 나와 당시 시대의 국제교역 상황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 농사 기원 연구에도 도움이 됐다. 패총 전시관이 있다.
또한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고고학 조사를 실시한 곳이기도 하다.
2.2. 봉황대[편집]
본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였는데, 사적 제2호로 통합되었다.
금관가야권 최대의 생활 유적지. 가야시대 주거지가 발굴됐고 2005년 망루, 가옥 등을 복원해 가야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옛날부터 가라대, 망해대, 여의현, 독현, 회현 등으로 불려왔다. 조선 고종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봉황대란 이름을 지은 뒤로 봉황대로 불린다.
경주시의 신라왕릉급 거대무덤 봉황대와는 이름만 같고 관련은 없다.
2.2.1. 황세와 여의 이야기[편집]
봉황대에는 황세와 출여의의 못 이룬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위의 이유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5년 여의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여의각을 설치하였다. 봉황동 황세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3. 외부 링크[편집]
- 한국어 위키백과: 김해 봉황동 유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해 봉황동 유적
- 고고학사전: 봉황동 유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
- 대한민국 구석구석: 김해 봉황동 유적
- 두산백과: 김해 봉황동 유적
4. 사적 제2호[편집]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져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