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ay ( [0] => style="margin: -5px -10px" [1] => [[파일:indochina-map-1640.gif|width=100%]]}}}|| ||<-6><:><bgcolor=#fff,#212121> {{{#000,#ddd {{{-1 1640년 후 레 왕조의 영토}}}}}}[* 갈색은 [[찐씨 정권]], 노란색은 [[응우옌씨 정권]].] || ||<-3><bgcolor=#FFFF00> {{{#FF6347 '''1427~1527, 1533~1789'''}}} || ||<width=50%><-2><#FFFF00> {{{#FF6347 '''성립 이전'''}}} ||<#FFFF00> '''{{{#FF6347 멸망 이후}}}''' || ||<-2><#F0C420> [[교지(명)|'''{{{#800000 명나라의 지배}}}''']] ||<|2><#B22222> [[떠이선 왕조|'''{{{#fff 떠이선 왕조}}}''']] || ||<-2><#6B8E23> [[후 쩐 왕조|'''{{{#fff 후 쩐 왕조}}}''']] || ||<width=25%><bgcolor=#FFFF00> {{{#FF6347 '''위치'''}}} ||<-2>[[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 ||<bgcolor=#FFFF00> '''[[수도(행정구역)|{{{#FF6347 수도}}}]]''' ||<-2>[[하노이|통킹]][* 후 레 왕조의 공식적인 수도.]→토쑤언(타이킹)[* 증흥 레 왕조의 임시수도.]→ 통킹[* [[막 왕조]]를 멸망시킨 후에 환도.] || ||<bgcolor=#FFFF00> {{{#FF6347 '''정치 체제'''}}} ||<-2>[[전제군주제]] || ||<bgcolor=#FFFF00> {{{#FF6347 '''국성'''}}} ||<-2>여(黎)[* 현지 발음으론 '레'.] || ||<bgcolor=#FFFF00> {{{#FF6347 '''국가 원수'''}}} ||<-2>[[황제]][* 사실상의 [[외왕내제]] 체제. [[중국]]에 조공할 때에는 스스로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 || ||<bgcolor=#FFFF00> {{{#FF6347 '''주요 황제'''}}} ||<-2>'''[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left: 0px; margin-top: -22px" 770031fcde4ec5f2cce994905863c956}}} || ||<bgcolor=#FFFF00> '''[[언어|{{{#FF6347 언어}}}]]''' ||<-2>중세 [[베트남어]] || ||<bgcolor=#FFFF00> {{{#FF6347 '''민족'''}}} ||<-2>[[베트남인]] || ||<bgcolor=#FFFF00> {{{#FF6347 '''인구'''}}} ||<-2>2,000,000명 (1500년) || ||<bgcolor=#FFFF00> '''[[종교|{{{#FF6347 종교}}}]]''' ||<-2>[[유교]][* 국가이념. [[성리학]]을 나라의 국시로 삼은 [[조선]]과 유사한 점이 있다.], [[불교]], 베트남 민속신앙 || ||<bgcolor=#FFFF00> {{{#FF6347 '''주요 사건'''}}} ||<-2>'''[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left: 0px; margin-top: -22px" 47da00bdd38a0f2a32f08eeb620070c3}}} || ||<bgcolor=#FFFF00> {{{#FF6347 '''통화'''}}} ||<-2>문(文) || [목차] [clearfix] == 개요 == [[베트남]] [[대월]]의 세 번째 장기 집권 [[왕조]]. 중국([[명나라]])의 제4차 복속 시기를 종결시킨 민족 영웅 [[레러이]](여리, 태조)가 건국한 왕조였다. 대외적으론 '대월'이지만 [[국성]](國性)을 따로 구분하여 '후여조'(後黎朝)라 불린다. 1522년 [[막당중]]의 제위 찬탈로 인한 멸망과, 1789년 [[레민제|민제]](愍帝)의 청나라로의 도주로 인한 멸망 두 개로 나뉘어 시기를 구분한다. == 역사 == === 건국 이전 === [[파일:external/pic.pimg.tw/1342254628-118626469_m.jpg]] 초대 황제인 [[레러이|태조]](太祖)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는 1428년이나 왕조의 역사는 14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418년은 대우 호왕조의 황제인 호계리-호한창 부자가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침공에 맞서다 패배하여 참수당해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명나라에게 복속당한 시기였다.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 여리는 자신을 '평정왕'(平定王)이라 칭왕하고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불리며 항명전쟁을 펼쳤다. 명나라의 베트남 정책도 변화가 있었다. 성조 영락제의 뒤를 이은 인종 [[홍희제]]는 베트남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선정을 통한 교화를 추진하였지만 얼마 뒤 죽고, 1425년 즉위한 선종 [[선덕제]]는 교지, 즉 베트남의 정세가 악화되는 것을 보고 철수를 생각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여리의 독립군(軍)은 베트남 지리의 특징(습하고 길이 험한)을 이용해 자신들보다 숫자가 몇배나 많은 명군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1426년 10월 ~ 11월 사이([[똣동-쭉동 전투|진줄동 - 축동 전투, 陣崒洞 – 祝洞]])에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던 명군 세력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혀 당시 명 황제인 [[선덕제]]는 대월 복속을 포기했다. 이후 여리는 명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안남 국왕에 책봉되어 통치권을 얻고, 자신이 세웠던 쩐(진) 황실의 후예로 추정되는 진고(陳暠)를 시해한 후, 재건 대월의 '''남제'''(南帝)로 즉위했다. === 초기 후 레 왕조(1428 ~ 1527) === 1428년 ~ 1527년. 막당중에 의해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 역사 ==== 초대 남제 태조는 유교화를 꾀했고, 중국의 제도를 본따 수도 통킹을 중국식으로 개발하며 과거제를 시행했다. 또한 형법과 행정법 즉, 율령을 제정했고 토지제도인 균전법, 대월 국군의 구성 방식을 새로 맞추었다.[*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전 군을 다섯 번으로 나누고 한 번이 근무하며, 네 개의 번은 귀농하는 등의 교대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중국 따라하기 정책은 오히려 지배층이 중국어를 쓰며 머릿속이 친명화되는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백성들은 반명 정서를 점차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훗날 남북 베트남의 민족정서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태조 사후에는 무신 세력의 득세와 권신 여찰의 만행으로 잠시 혼란기가 찾아왔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레)|태종]]의 의문사가 이와 관련이 있는데, 태종은 청화 지방 호족들의 영향권을 제한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태종은 은퇴한 개국공신 [[응우옌짜이|완채]]의 사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급사했는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태종의 정책으로 권한이 약해진 청화 호족들이 앙심을 품고 태종을 암살했을 거라 추측하는 경향이 많다. 건강하던 황제가 급사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자 생후 2세도 되지 않은 태자 [[인종(레)|여방기]](黎邦基, 인종)가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선자태후가 섭정하는 방식으로 조정이 구성되었다. 선자태후는 과거 제도를 수정하고 법률 14개조를 제정하였으며, 참족의 [[참파]]를 쳐 참파 국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는 치적을 보였다. 그러나 공신 여가(黎可)를 숙청하는 등 신하들과 거리감을 두는 정치적 행위를 벌였다. 이런 국정에서 [[여의민]](黎宜民, 전폐제)[* 급사한 태종의 장자로 본래 태자였으나 어머니 양씨가 태종의 총애를 잃어 폐태자되었다. 그 일에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의 쿠데타라는 변수가 일어나자 어린 인종과 선자태후는 여의민의 쿠데타군에게 시해당했고 그들을 죽인 여의민이 황제로 등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등극한 여의민은 1년만에 폐위, 시해당했고 공석이 된 옥좌는 태종의 4남 여사성(黎思誠, 성종)이 신하들에 의해 추대받아 즉위했다. ==== 전성기 - [[성종(레)|성종]](聖宗) ==== 앞의 정치적 혼란이 일어난 시기, 대월은 어지럽혀져 있는 조정을 확고히 할 명분을 요구했다. 성종은 즉위 후 부황 태종의 행적을 따라 청화 호족 세력을 배제하고 태조때 행해진 유교화 정책을 다시 확대해 유교 이념을 확고히 했다. 내정에선 6부를 만들었으며, 전국의 교통을 증진시키기 위해 13도로 나누고, 중앙집권의 중요성을 인지해 토지 및 호적 대장을 만들었다. 또한 이민족 문제도 해결해 그들을 여씨 대월 세력권 안에 포함시켰다. 성종 역시 중국의 법률을 본따 만든 《흥덕형률》(洪德刑律)을 만들어 반포했고 이외에도 성리학 보급에 힘을 기울여 현대 베트남의 제1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가 편찬된 시기도 성종 때였다. 그리고 남쪽의 참파와 서쪽의 라오스를 쳐서 메콩 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전성기도 여기까지였다. 성종의 붕어 이후 헌종과 숙종의 요절과 폭군들의 잇따른 즉위로 인해 다시 후여조 대월은 성종의 즉위 이전처럼 혼란기에 빠지게 되었다. ==== 무능한 황제들의 즉위와 멸망 ==== 뒤를 이어 즉위한 헌종과 숙종이 요절하고, 숙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숙종의 형 여준(黎濬, 위목제)이 즉위했다. 여준은 천성이 포악하고 무분별한 숙청을 실행하여 결국 [[양익제|여형]](양익제)에게 폐위당했다. 그러나 양익제 역시 얼마 못가 폭정을 저질러 신하인 정유산에게 시해당했다. 그리고 찐주이산(정유산)은 다시 목의왕[* 목의왕은 명군 성종의 손자로 추존 황제인 덕종(德宗)의 아들이었으며, 이름은 여영이었다.]의 아들인 여광치(黎光治, 중폐제)를 옹립했으나 재위 3일만에 정유산의 형 정유대가 여광치를 납치해 시해하는 등 약 20년의 기간 동안 세 명의 황제가 폐위되는 혼란이 벌어졌다. 자신이 세운 두 명의 황제들이 폐위되자 정유산은 성종의 증손자 여의(黎椅, 소종)을 세웠다. 이 시기의 후 레 왕조 대월 제국은 진고(陳暠)[* 태조 여리가 폐위시킨 진고와는 동명이인.]의 황제 참칭, 신하들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기에 중흥의 명군을 요구했다. 하지만 소종은 무능하진 않았으나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어 황제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후술하지만 소종은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후 레 왕조의 멸망을 재촉했고 제위와 목숨마저 [[막당중]]에게 빼앗겼다. 황제를 참칭한 진고의 반란은 진진(陳眞)과 완홍유(阮弘裕) 등이 진압했다. 그런데 이번엔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인 진진과 완홍유가 서로 권력 싸움을 벌이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진진이 권신이 되어 버렸다. 소종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진진을 암살하여 찬탈의 가능성을 막았다. 그러나 진진의 잔당들이 여방과 여유를 옹립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피난했고, 막당중과 완홍유에게 반란 진압을 명해 이 반란 역시 막당중이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공신이 된 막당중이 권신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득세한 막당중은 진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만함[* 황제의 수레와 의상을 입고 다녔다.]을 보였고 이는 소종에게 시기와 찬탈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소종은 권신 막당중을 죽이기 위해 정수[* 鄭綏, 정유산과 정유대의 조카다.]와 연합해 그의 거처로 이동했지만 그곳에서도 정수와 대립하여 막당중 토벌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다. 결국 정수는 막당중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고, 소종 역시 탕롱으로 압송되어 1527년 시해당했다. 최소한 허수아비도 아니었고 여(레)씨 황실을 살리기 위해 권신들을 견제하는 등 유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인간성으로 인해 패망했고 후 레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꼴이 되었다. 소종의 시해 이후 그의 동생인 여춘(공제)이 즉위했으나 막당중의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고, 마침내 1527년 막당중의 강요와 압박으로 인한 양위로 초기 후 레 왕조는 멸망했다. 동시에 공제는 이왕삼각에 따라 공왕(恭王)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찬탈자 막당중에 의해 자결했다. ==== 역대 황제 ==== [include(틀:역대 후여조 황제)] ||<tablealign=center>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 - || - || 평정왕[br](平定王) ||<|2> [[태조(레)|여리[br](黎利)]] || - || 1418 ~ 1428 || || 1 || [[레 태조|태조[br](太祖)]] || 통천계운성덕신공예문영[br]무관명용지홍의지명대효고황제[br](統天啓運聖德神功睿文英[br]武寬明勇智弘義至明大孝高皇帝) || 순천(順天, 1428 ~ 1433) || 1428 ~ 1433 || || 2 || [[레 태종|태종[br](太宗)]] || 계천체도현덕성공흠명문[br]사영예인철소헌건중문황제[br](繼天體道顯德聖功欽明文[br]思英睿仁哲昭憲建中文皇帝) || 여원룡[br](黎元龍) || 소평(紹平, 1433 ~ 1439) [br] 대보(大寶, 1440 ~ 1442) || 1433 ~ 1442 || || 3 || [[레 인종|인종[br](仁宗)]] || 흠문인효선면충예선황제[br](欽文仁孝宣明聰睿宣皇帝) || 여방기[br](黎邦基) || 대화(大和, 1443 ~ 1453)[br]연녕(延寧, 1454 ~ 1459) || 1442 ~ 1459 || || 4 || - || [[레 전폐제|여덕후]](厲德侯)[br],,,<전폐제(前廢帝)>,,, || 여의민[br](黎宜民) || 천흥(天興, 1459 ~ 1460) || 1459 ~ 1460 || || 5 || [[레 성종|성종[br](聖宗)]] || 숭천광운고명광정지덕대공성문신무달효순황제[br](崇天廣運高明光正至德大功聖文神武達孝淳皇帝) || 여사성[br](黎思誠) || 광순(光順) 1460년 ~ 1469년[br]홍덕(洪德) 1470년 ~ 1497년 || 1460 ~ 1497 || || 6 || [[레헌종|헌종[br](憲宗)]] || 체천응도무덕지인소문소무선철흠성창효예황제[br](體天凝道懋德至仁昭文紹武宣哲欽聖彰孝睿皇帝) || 여쟁[br](黎鏳) || 경통(景統) 1498년 ~ 1504년 || 1497 ~ 1504 || || 7 || [[레 숙종|숙종[br](肅宗)]] || 소의현인온공연묵돈효운공흠황제[br](昭義顯仁溫恭淵默惇孝允恭欽皇帝) || 여순[br](黎㵮) || 태정(泰貞) 1504 || 1504 || || 8 || - || [[레위목제|위목황제(威穆皇帝)]] || 여준[br](黎濬) || 단경(端慶, 1505 ~ 1509) || 1504 ~ 1509 || || 9 || - || [[레양익제|양익황제(襄翼皇帝)]] || 여형[br](黎瀠) || 홍순(洪順) 1509년 ~ 1516년 || 1509 ~ 1516 || || 10 || - || - [br],,,<[[여광치|중폐제]](中廢帝)>,,,[* 베트남어로는 레꽝찌. 폭군 양익제 사후 정유산에 의해 즉위하였으나 3일만에 정유대에게 시해당함.] || 여광치[br](黎光治) || 홍순(洪順) 1516년 || 1516 || || 11 || [[레소종|소종[br](昭宗)]] || 신황제(神皇帝) || 여의[br](黎椅) || 광소(光紹, 1516 ~ 1522) || 1516 ~ 1522 || || 12 || - || [[레공황|공황제(恭皇帝)]] || 여춘[br](黎椿) || 통원(統元, 1522 ~ 1527) || 1522 ~ 1527 || ||<-6><bgcolor=#dcdcdc,#000> 이후 공제가 양위하여 후 레 왕조는 멸망[br]이하는 [[막조]]로, 초기 후 레 왕조는 중흥 후 레 왕조로. || === 중흥 후 레 왕조(1527 ~ 1789) === 1527 ~ 1789. 찬탈자 막당중에 의해 일시적으로 계통이 끊어졌지만 곧 부흥군과 완감, 정검의 힘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1789년 떠이선군에게 패배한 마지막 황제 민제가 청나라로 도주하여 멸망했다. ==== 여의(黎意)의 부흥군 - 남조(南朝) ==== ||<-9999><tablealign=center> {{{+3 1530}}} || ||<|4> [[파일:베트남 남북조시대.png|width=250]] ||<|2><#008000> || 大越 |||| '''대월 ([[막 왕조|막]])''' || || [[막당조아인|[[파일:막태종2.jpg|width=50]]]] ||<#008000> {{{#FFFFFF 황제}}} || [[막당조아인|막태종]] || ||<|2><#0000FF> || 黎氏 ||<-2> '''여씨 부흥군''' || || 黎意 ||<#0000ff> {{{#FFFFFF 수장}}} || 여의 || [[막당중]]이 즉위 이후 3년이 지나 양위한 1530년, 청화 지역에선 자칭 여(레)씨의 후예인 여의(黎意)가 거병하고 시해당한 소종의 연호로 개원하여 후 레 왕조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여의에게 후여조의 유신들이 붙었고 더이상 여의군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막당중은 거병 소식에 친정하여 여씨군과 대치했으나 패배하고 서도성 지점까지 세력권을 빼앗겼으며, 태종 역시 탕롱으로 피난했다. 대승을 거두고 재건을 코앞에 둔 여씨 세력이었지만 수장 여의는 이때의 승리로 방심하여 막국정(莫國楨)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수장이 사로잡히고 부흥군의 일부가 전사하자 살아남은 완홍유의 양자 [[완감]](阮淦)이 청화에서 시해당한 소종의 아들 여녕(黎寧, 장종)을 황제로 옹립해 지도자 부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방지했고, 곧이어 완감의 사위 [[정검]](鄭檢)도 장인을 도와 막씨 대월의 제3대 황제인 막복해(莫福海)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중 장인이 위장항복한 양집일(楊執一)에게 독살당하자 정검이 장인의 자리를 계승하고 장종을 중심으로 뭉쳐 1592년 막씨 대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왕조의 황제인 [[막무흡]](莫茂洽)을 사로잡아 참수시켜 후 레 왕조의 재건을 선포했다. 그러나 대월의 통일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고, 여씨 황제들은 군벌 정씨들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으며 제국은 정(찐)•완(응우옌) 양 가문의 북•남 왕국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 나라가 두 개로 갈라지다 ==== 앞서 정검이 장인 완감의 세력을 계승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방해거리가 되는 처남(완감의 차남) [[완황]](阮潢)을 남쪽으로 보냈다. 완황 역시 군사력의 열세로 매형 정검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남부에서 부춘을 수도로 정한 후 세력을 키웠다. 북쪽에는 여씨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한 정검이 조정을 장악하고, 주도했다. 정씨 일족은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했고 여씨 황제가 암살을 꾀해 권력을 복고하려는 낌새를 보일 때는 황제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강제 폐위 또는 옹립까지 하는 등 여씨 황실을 지배했다. 약 250년동안 정씨 일족이 황실의 권신으로 군림했기에 이후 여씨 황제들은 왕조 말기를 제외하곤 별 치적이나 행적이 없었다. 정검이 장인 완감으로부터 권력을 승계받아 여씨 황족을 꼭두각시로 만든 후 레 왕조를 '''정주'''(鄭主), 처남 완황이 남하하여 세력을 키운 제후국을 '''완주'''(阮主)라고 한다. 이들은 명목상으론 여씨 황제의 신하(제후왕)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국호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묘호와 시호는 사용했다. 또한 두 왕실은 여씨 황제로부터 시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서열상으론 남부의 완주가 북부의 정주 아래에 있었다. 처음에는 공통의 적인 찬탈자 막씨가 잔존하고 있어 남북간의 대립이 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막 왕조가 1677년 완전히 멸망하고, 정주 국왕 정장(鄭梉)이 완주 국왕 완복원(阮福源)에게 조세를 바칠 것을 요구하며 신하 취급을 하는 등 모욕을 가한 계기로 인해 남북 관계가 험악해졌다. 남북 대립 관계는 정주 제5대 왕 정작(鄭柞)의 통치 시기에 전쟁이 잦았다가 그 뒤를 이은 정근(鄭根)의 치세때 끝이 났다. 후 레 왕조 대월 제국 후반의 역사는 남북국이 주도했다. 완주는 참족의 [[참파]]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며, 크메르족의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만들었다. 또한 북방의 정주도 1694년 서쪽의 란쌍(현재의 라오스)을 공격해 란쌍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 여씨 황제의 바로 아래 계급이었던 정씨들이 권력만큼은 압도적이었지만 황제를 칭하진 못했다. 바로 아래 광남국(완주)이 있었으며, 백성들은 여씨를 군주로 여겼고 [[청나라]]의 제후왕 책봉도 여씨에게 행해졌기 때문에 감히 민심과 중화제국을 거역하진 못했다. 정주 국왕 정삼(鄭森)은 여씨 일족을 비방하고 청나라 황제에게 안남왕[* 대월 황제.]로의 책봉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 허수아비가 된 여씨 일족 ==== 두 제후국이 역사에 족적을 남긴 만큼 여씨 황제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당연하지만 후 레 부흥운동의 주축은 여씨가 아닌 정씨였기 때문에 황권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여씨 황제들이 정씨들의 횡포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영종(英宗)과 경종(敬宗)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정왕 정송(鄭松)을 암살하려고 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정송에게 시해당했다. 이후 정왕들은 황제들의 강제 폐위 및 옹립, 장자의 계승 취소 등을 대담하게 행하며, 권력 유지에 적합한 자신들의 핏줄(모후가 찐씨)을 세웠다. 그들에게 여씨 황제는 그저 민심 안정 및 청나라의 반발 무마와 안정적인 책봉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 [[서산당의 난]] ==== 1771년 완주의 폭정에 반발한 [[완악]], [[완여]], [[광중제|완혜]]가 서산당의 대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농민들을 구제하며, 소수민족과 손을 잡아 그 규모가 금세 거대해졌다. 정주 역시 완주를 멸망시키고 남북을 통일할 기회라 판단하고 서산군과 연합해 그들을 여씨 황제에게 항복시키는 형식으로 완주와 전쟁을 벌였고 결국 완주의 마지막 왕 완복양(阮福暘)이 항복하여 완주는 멸망했다. 완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한 서산 삼형제는 각자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했고 맏이 완악은 한 명밖에 없어야 할 황제를 칭하였다. 이후 1786년 정주에서 일어난 삼부군의 반란과 기아,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로 봉기가 발발하자 그 틈을 타 서산조도 탕롱으로 진격해 정주멸망전을 벌였고 정주의 마지막 왕 정종(鄭棕)이 도주했다가 완장(阮莊)에게 붙잡혀 서산조에 압송되자 굴욕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여 후 레 황실을 주도하던 정주도 멸망했다. 그 후 서산의 간부 완혜는 현종(顯宗)의 황명으로 제후가 황제를 맞이할 때 앉는, 즉 옛 정주의 왕이 앉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는 정씨의 자리를 서산조의 완씨가 차지했다는걸 의미했다. ==== 완전한 멸망 - [[민제(레)|민제]]의 도주 ==== 이후 현종의 뒤를 이은 [[민제(레)|민제]](愍帝) 역시 완혜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민제는 서산조가 여씨 황실을 위협할 존재라 판단하고 정주의 잔당들을 모아 복벽을 시도했으나 완유정(阮有整)이 정주의 잔당을 몰아내 실패했고, 완유정이 권신 노릇을 하자 완혜가 무문임(武文任)을 보내 완유정을 죽였다. 그 전에 완유정 세력과 도망간 민제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의 대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서산군들은 놀라 분분히 흩어졌다. 하지만 청군의 수장 손사의(孫士毅)는 음주와 향락만을 즐기고 정세에 신경쓰지 않았기에 분노한 완혜와 서산군은 손사의의 거처로 쳐들어가 무방비 상태의 청군을 격파해버리고 대패한 손사의는 청나라로 도망갔다. 민제는 1788년 청군의 개입을 허락해 청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대월을 공격했으나 완혜의 서산당에게 패배했고 민제가 도망감으로써 360년 명맥을 이어가던 후 레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 역대 황제 ==== ||<-7><tablealign=center><bgcolor=#dcdcdc,#000> 공제가 양위하여 초기 후 레 왕조는 멸망했으나 재건[br]이후 1592년까지 [[막조]]와 대치(남북조시대) || ||<-2><bgcolor=#ffffff,#000> 대수 ||<|2> 묘호 ||<|2> 시호 ||<|2> 휘 ||<|2> 연호 ||<|2> 재위기간 || ||<bgcolor=#ffffff,#000> 전체 ||<bgcolor=#ffffff,#000> 중흥 || || - || - || - || - || [[레이(대월)|여의]][br](黎意)[* 부흥운동 초기 지도자. 황제를 칭하진 않고 시해당한 소종의 연호를 빌려씀.] || 광소(光紹, 1530) || 1530 || || 13 || 1 || - || - || 여령[br](黎寧) || 응우옌호아(元和) 1533년 || 1533 || ||<-2> 임시 || - || [[레히엔|대왕]](代王)[* 장종의 동생으로 장종이 [[막등용]]의 공격을 피해 도망갔을 때 잠시 옹립되어 재위. 이후 장종이 돌아오자 퇴위.] || 여헌[br](黎憲) || 광조(光照) 1533년 ~ 1536년 || 1533 ~ 1536 || ||<-2> 복위 || [[레장종|장종[br](莊宗)]] || 유황제(裕皇帝) || 여령[br](黎寧) || [[원화(연호)|응우옌호아]](元和) 1536년 ~ 1548년 || 1536 ~ 1548 || || 14 || 2 || [[레중종|중종[br](中宗)]] || 무황제(武皇帝) || 여휜[br](黎暄) || 투언빈(順平) 1549년 ~ 1556년 || 1548 ~ 1556 || || 15 || 3 || [[레영종|영종[br](英宗)]] || 준황제(埈皇帝) || 여유방[br](黎維邦) || 티엔흐우(天佑) 1557년[br]찐찌(正治) 1558년 ~ 1571년 || 1556 ~ 1571 || || 16 || 4 || [[레세종|세종[br](世宗)]] || 적순강정용과의황제[br](積純剛正勇果毅皇帝) || 여유담[br](黎維潭) || 홍푹(洪福) 1572년[br]자타이(嘉泰) 1573년 ~ 1577년[br]꽝흥(光興) 1578년 ~ 1599년 || 1571 ~ 1599 || ||<|2> 17 ||<|2> 5 || - || 간휘제[br](簡輝帝) ||<|2> 여유신[br](黎維新) ||<|2> 탄득(愼德) 1600년[br]호앙딘(弘定) 1600년 ~ 1619년 ||<|2> 1599 ~ 1619 || || [[레경종|경종[br](敬宗)]] || 현인유경수복혜황제[br](顯仁裕慶綏福惠皇帝) || || 18 || 6 || - || - || 여유기[br](黎維祺) || 빈또(永祚) 1619년 ~ 1629년[br]득롱(德隆) 1629년 ~ 1635년[br]즈엉호아(陽和) 1635년 ~ 1643년 || 1619 ~ 1643 || || 19 || 7 || [[레진종|진종[br](眞宗)]] || 순황제(順皇帝) || 여유우[br](黎維祐) || 푹타이(福泰) 1643년 ~ 1649년 || 1643 ~ 1649 || ||<-2> 복위 || [[레신종|신종[br](神宗)]] || 연황제(淵皇帝) || 여유기[br](黎維祺) || 칸득(慶德) 1649년 ~ 1653년[br]틴득(盛德) 1653년 ~ 1658년[br]빈토(永壽) 1658년 ~ 1662년[br]반칸(萬慶) 1662년 || 1649 ~ 1662 || || 20 || 8 || [[레현종(20대)|현종[br](玄宗)]] || 활달예총강의중정온유화락[br]흠명문사윤공각양목황제[br](闊達睿聰剛毅中正溫儒和[br]樂欽明文思允恭恪讓穆皇帝) || 여유우[br](黎維禑) || 깐찌(景治) 1663년 ~ 1672년 || 1663 ~ 1672 || || 21 || 9 || [[레가종|가종[br](嘉宗)]] || 관명민달인과휘유극인독의미황제[br](寬明敏達因果徽柔克仁篤義美皇帝) || 여유회[br](黎維禬) || 즈엉득(陽德) 1672년 ~ 1674년[br]득응우옌(德元) 1674년 ~ 1675년 || 1672 ~ 1675 || || 22 || 10 || [[레희종|희종[br](熙宗)]] || 총민영과돈활관유위도휘공장황제[br](聰敏英果敦闊寬裕偉度徽恭章皇帝) || 여유협[br](黎維祫) || 빈찌(永治) 1676년 ~ 1680년[br]찐호아(正和) 1680년 ~ 1705년 || 1675 ~ 1705 || || 23 || 11 || [[레유종|유종[br](裕宗)]] || 순정휘유온간자상관혜존묘화황제[br](純正輝柔溫簡慈祥寬惠尊卯和皇帝) || 여유당[br](黎維禟) || 빈틴(永盛) 1705년 ~ 1720년[br]바오타이(保泰) 1720년 ~ 1729년 || 1705 ~ 1729 || || 24 || 12 || - || 영경제(永慶帝)[* [[응우옌씨 정권]] 추증.] [br] ,,,<[[레 후폐제|후폐제(後廢帝)]]>,,, || 여유팽[br](黎維祊) || 빈칸(永慶) 1729 ~ 1732 || 1729 ~ 1732 || || 25 || 13 || [[레순종|순종[br](純宗)]] || 관호돈민유손근각진점간황제[br](寬豪惇敏柔巽謹恪陳漸簡皇帝) || 여유상[br](黎維祥) || 롱득(龍德) 1732 ~ 1735 || 1732 ~ 1735 || || 26 || 14 || [[레의종|의종[br](懿宗)]] || 온가장숙계서명민관홍연예휘황제[br](溫嘉莊肅啓瑞明愍寬洪淵睿徽皇帝) || 여유신[br](黎維祳) || 빈흐우(永佑) 1735년 ~ 1740년 || 1735 ~ 1740 || || 27 || 15 || [[레현종(27대)|현종[br](顯宗)]] || 영황제(永皇帝) || 여유조[br](黎維祧) || 깐흥(景興) 1740년 ~ 1786년 || 1740 ~ 1786 || || 28 || 16 || - || - || [[레민제|여유기]][br](黎維祁) || 찌에우통(昭統) 1786 ~ 1787 || 1786 ~ 1787 || ||<-2> 감국 || - || -[br],,,<숭양공(崇讓公)>,,, || [[레주이껀|여유근]][br](黎維[[파일:礻堇.png|width=15]]) || - || 1787 ~ 1789 || |||| 복위 || - || [[레민제|민황제]][br](愍皇帝) || 여유기[br](黎維祁) || 찌에우통(昭統) 1789 ~ 1790 || 1789 ~ 1790 || == 추존 황제 == ||<tablealign=center> 묘호 || 시호 || 휘 || 능호 || 비고 || || [[레 고상조|고상조[br](高上祖)]] || 명황제(明皇帝) || 여회[br](黎誨) || - || [[레러이|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 || [[레딘(대월)|현조]][br](顯祖) || 소덕지인택황제(昭德至仁澤皇帝) || 여정[br](黎丁) || 내문릉(來聞陵)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 || [[레 선조|선조[br](宣祖)]] || 헌문예철복황제(憲文睿哲福皇帝) || 여광[br](黎曠) || 불황릉(佛皇陵) ||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 || [[레 덕종|덕종[br](德宗)]] || 배천후성온양광명문철관홍창신수휴목효건황제[br](配天詡聖溫良光明文哲寬弘彰信綏休穆孝建皇帝) || 여빈[br](黎鑌) || 수절릉(受節陵) || [[레양익제|양익제]] 추숭. 양익제의 부친 || || [[레숭|명종]][br](明宗) || 철황제(哲皇帝) || 여충[br](黎漴) || 강릉(康陵) || [[레소종|소종]] 추숭. 소종의 부친 || || - || [[레쯔|홍유왕]](弘裕王) || 여제[br](黎除) || 미림릉(美林陵) || [[레영종|영종]] 추숭. 영종의 5대조 || || - || [[레캉|현공왕]](顯功王) || 여강[br](黎康) || 봉촌릉(俸村陵) || 영종 추숭. 영종의 고조부 || || - || [[레토|광업왕]](光業王) || 여수[br](黎壽) || - || 영종 추숭. 영종의 증조부 || || - || [[레주이티에우|장간왕]](莊簡王) || 여유소[br](黎維紹) || - || 영종 추숭. 영종의 조부 || || [[레주이코앙|효종[br](孝宗)]] || 인황제(仁皇帝) || 여유광[br](黎維纊) || 화악릉(華岳陵) || 영종 추숭. 영종의 부친 || || [[레 우종|우종[br](佑宗)]] || 연황제(衍皇帝) || 여유의[br](黎維禕) || 동릉(同陵) || [[레민제|민제]] 추숭. 민제의 부친 || == 비정통 황제 == ||<tablealign=center> 지지파 || 대수 || 시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2> 찐뚜이 세력 || 1 || - || [[레방|여방]][br](黎榜) || 대덕(大德, 1518 ~ 1519) || 1518 ~ 1519 || || 2 || - || [[레조(베트남)|여유]][br](黎槱) || 천헌(天憲, 1519) || 1519 || || 자립 || - || -[br],,,<천남제자(天南帝子)>,,,[* 자칭 [[제호]](帝號).] || [[레주이멋|여유밀]][br](黎維樒) || - || 1767 ~ 1769 || == 계보 == || [[레호이|고상조]] || || [[레딘|현조]] || ||<-2> [[레코앙|선조]] || || [[레쯔|홍유왕]] ||<-3> '''1. [[레러이|태조]]''' || || [[레캉|현공왕]] ||<-11> '''2. [[태종(레)|태종]]''' || || [[레토(레)|광업왕]] || 3. [[인종(레)|인종]] || 4. [[레응이전]] ||<-7> '''5. [[성종(레)|성종]]''' ||<-2> [[레칵쓰엉]] || || [[레주이티에우|장간왕]] ||<-2> ||<-2> 6. [[레 헌종|헌종]] ||<-5> [[레떤|덕종]] ||<-2> [[레찬]] || || [[레주이코앙|효종]] ||<-2> || 7. [[레 숙종|숙종]] || 8. [[레 위목제|위목제]] || 9. [[레 양익제|양익제]] ||<-3> [[레숭|명종]] || [[레조아인]] ||<-2> [[레록]] || || '''15. [[영종(레)|영종]]''' ||<-5> ||<-2> 11. [[레 소종|소종]] || 12. [[레 공제|공황]] || 10. [[레꽝찌]] || [[레방]] || [[레조(베트남)|레조]] || || 16. [[레 세종|세종]] ||<-5> || 13. [[장종(레)|장종]] || [[레히엔|대왕]](代王) || || 17. [[레 경종|경종]] ||<-5> || 14. [[레 중종|중종]] || ||<-4> 18. [[레 신종|신종]] || || 19. [[레 진종|진종]] || 20. [[현종(레 20대)|현종(玄宗)]] || 21. [[레 가종|가종]] || 22. [[레 희종|희종]] || ||<-3> ||<-5> 23. [[레 유종|유종]] || ||<-3> || 24. [[레주이프엉|영경제]] ||<-2> 25. [[순종(레)|순종]] || 26. [[의종(레)|의종]] || [[레주이멋]] || ||<-4> ||<-2> 27. [[현종(레 27대)|현종(顯宗)]] || ||<-4> || [[레주이비|우종]] || [[레주이껀]] || ||<-4> || 28. [[민제(레)|민제]] || == 경제 == 1527년 이전 후여조는 자국민의 대외교역을 제한했다. 1527년 제위를 찬탈한 막당중은 이전의 난리들로 발생한 난민들을 수공업과 대외교역에 종사케 하여 경제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수도 동경(東京/Đông Kinh: 동낀)은 [[비단]]과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로 육성되었고, 회안(會安/Hội An, 호이안)도 이른바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국제 교역망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일본인 마을도 따로 생겼다. 막씨의 상공업 진흥책을 바탕으로 대월 상인과 선원들은 [[남중국해]] 일대의 교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157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 치하 이집트와 그리스까지 이동하여 물건을 팔기도 했다.[[https://books.google.com/books?id=dFFfRz8tBrMC|#]] 대월의 교역은 대개 [[일본]]과 [[말라카]]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상인들은 자국산 [[비단]]과 [[도자기]]를 판매했다.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도 동경으로 와서 고급 비단과 명주실을 팔았고, 17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상인들도 종종 대월에서 비단을 사갔다. 1592년 막씨를 멸망시키고 재건된 중흥 후여조도 대외교역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공업과 대외교역 육성 추진을 이어받았다. 1594년 서양 상인들의 동경 체재를 허가한 것이 그 예이다. 상공업이 점점 발전한 것과는 별개로 대월은 여전히 농업 중심 국가였다. 그런데 기존 대월의 중심지인 북부 홍강 삼각주는 인구과밀 문제를 앓고 있었다. 이런 인구압은 토지는 널널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개발된 중부와 남부로 대규모 이민하는 방식으로 해소되었다. 1471년 [[참파]]를 사실상 멸망시킨 성종은 죄수들을 현지로 대거 이주시켜 현지를 개발하게 했고, 북부의 농민들도 대대적으로 이주하여 현지를 베트남화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원주민인 [[참족]]은 대부분 동화되었고, 산악지대의 종족들은 불편한 교통사정 때문에 동화를 피했지만 이때부터 대월인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18세기 말 후여조의 경제는 전쟁과 기근, 전염병, 자연재해로 초토화되었고 농업과 상공업도 쇠퇴하게 된다. == 참고 문헌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05775&cid=62092&categoryId=62092|레 조(1428-1788)의 여러 면모 - 동남아시아사]] * [[https://ko.wikipedia.org/wiki/%ED%9B%84_%EB%A0%88_%EC%99%95%EC%A1%B0|후 레 왕조 - 위키백과]]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17권: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94~95.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사)]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베트남/역사|베트남의 역사]]''' || ||<-5> 대월 || ||<width=30%> [[호 왕조]] || {{{+1 ←}}} ||<bgcolor=#fbc4c4,#000><width=30%> '''후 레 왕조(전기)''' || {{{+1 →}}} ||<width=30%> [[막조|막 왕조]] || ||<-5><bgcolor=#ffffff> || ||<width=30%> (후여가 재건) ||<|2> {{{+1 ←}}} ||<bgcolor=#fbc4c4,#000><width=30%> '''후 레 왕조(후기)''' ||<|2> {{{+1 →}}} ||<|2><width=30%> [[서산조]] || || (내분) || [[찐씨 정권]] / [[응우옌씨 정권]]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베트남의 역사''' || ||<-5> '''대월(大越)''' || ||<width=30%> [[호 왕조]][br]중국의 4차 지배([[명나라|명]]) || {{{+1 ←}}} ||<bgcolor=#fbc4c4,#000><width=30%> '''초 여가''' || {{{+1 →}}} ||<width=30%> [[막조|막 왕조]]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베트남의 역사''' || ||<-5> '''대월(大越)''' || ||<width=30%> [[막 왕조]] || {{{+1 ←}}} ||<bgcolor=#fbc4c4,#000><width=30%> '''중흥 여조'''[br][[찐씨 정권]] / [[응우옌씨 정권]] || {{{+1 →}}} ||<width=30%> 서산당의 난[br][[서산조]] || [include(틀:역대 후여조 황제)]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대월, version=630, paragraph=3)] [include(틀:포크됨2, title=후 레 왕조, d=2023-12-27 04:22:53)]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