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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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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에 대한 내용은 마리아 아말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 루이필리프 1세의 왕비.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왕비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782년 4월 26일 페르디난도 1세와 마리아 카롤리나의 6남 9녀 중 5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루이 조제프 왕세자와 약혼했지만 그가 1789년에 요절하면서 결혼은 무산됐다. 1793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당하여 혼란한 시기를 겪었고, 마리아 아말리아는 나폴리를 떠나 외가인 오스트리아에서 2년을 보냈다. 1802년에 다시 나폴리로 돌아왔지만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다시 시칠리아로 피신했다. 그곳에서는 영국군의 보호 아래 팔레르모에 정착했다.
2.2. 오를레앙 공작부인[편집]
망명 중이던 1806년, 마리아 아말리아는 미래의 남편이 될 루이필리프를 만났다. 그러나 루이필리프의 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일조했다는 사실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였던 마리아 카롤리나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1809년 11월 25일 팔레르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마리 아말리아는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 아멜리로 불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신혼 초반을 팔레르모에서 보냈다.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이후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 루아얄을 복원하는 데 수백만 프랑을 들였고, 그곳을 귀족 사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2.3. 왕비[편집]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남편이 루이필리프 1세로 즉위했다. 마리 아멜리는 자신이 왕비가 된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남편이 왕위를 수락하자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왕위는 그저 평화로운 가정을 파괴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비록 왕비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지만, 마리 아멜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정치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자선활동에 힘썼다. 루이필리프 1세는 화려한 궁중생활보다는 서민적인 인상을 주길 원했기에, 마리 아멜리도 비교적 소박한 생활을 추구했다. 튈르리 궁의 예절 역시 대폭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삶에 마리 아멜리는 나름 만족했다고 한다.
2.4. 말년[편집]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편 루이필리프 1세가 퇴위하였다. 루이필리프 1세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1]
영국에서 루이필리프 1세와 마리 아멜리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리주의 클레어몬트 하우스에 머물렀다. 1850년에 루이필리프 1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리 아멜리는 자신의 가족 및 영국 왕족들과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
1866년 3월 24일, 마리 아멜리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주들 중 마지막으로 생존한 왕족이었다. 유해는 오를레앙 가문의 왕족들이 묻혀있는 드뢰 왕실 예배당에 안장됐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1] 며느리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렌과 맏손자 파리 백작 필리프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프랑스에 남았다.[2] 레오폴드 2세, 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 등[3] 페르디난트 1세 등[4] 스페인의 왕비 메르세데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