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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엡호아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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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대남)의 6대 황제. 소치제의 29남으로 육덕제가 폐위되자 응우옌반뜨엉과 뚠텃투옛의 옹립으로 즉위했다. 이후 두 권신의 만행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의 보호정책을 받아들였으나 두 권신의 정변으로 4개월 만에 폐위되어 사사되었다. 사후 묘호는 없고 단지 시호는 문랑장공군왕(文郞莊恭郡王)인 황제의 예가 아닌 왕으로써의 시호가 정해졌다.
2. 생애[편집]
뜨득 18년(1865년), 문랑군공(
뜨득 31년(1878년), 낭국공(
뜨득 35년(1882년), 섭존인부우존인(攝尊人府右尊人)을 겸하였다.
뜨득 36년(1883년), 뜨득 황제가 사망한 뒤 죽득 황제가 뒤를 이었다. 7월 23일에 보정대신인 응우옌반뜨엉, 똔텃투옛이 죽득을 폐위하고 당시 37세였던 히엡호아를 옹립하였다.
히엡호아의 재위 기간 동안 청프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프랑스군이 베트남 전장에서 우세를 점하였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 쩐띠엔타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히엡호아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응우옌반뜨엉과 똔텃투옛은 전횡과 발호를 일삼아 히엡호아는 이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히엡호아는 프랑스인이 제시한 보호 정책을 받아들여 강대한 보정대신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응우옌반뜨엉은 이를 알고 자유태후(慈裕太后)에게 주청을 올렸고, 11월 29일에 정변을 일으켜 쩐띠엔타인을 죽인 뒤 히엡호아를 폐위하고 끼엔푹 황제를 옹립하였다. 히엡호아는 육덕학당(育德學堂)에 감금되었다가 핍박을 받아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니, 재위기간은 4개월이었다.
3. 사후 시호와 추봉[편집]
동카인 2년(1887년), 조정에서 논의하여 그를 폐제(廢帝)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타인타이 5년(1893년), 논의하여 즉위 전의 작위인 낭국공(朗國公)으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타인타이 11년(1899년), 다시 폐제로 칭하였다.[1]
주이떤 3년(1909년), 히엡호아를 문랑군왕(
히엡호아는 죽은 뒤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양춘하사(楊春下社)에 장사지냈다. 능묘 앞에 당대에 제작한 묘비가 있는데, 정면에 봉위대남협화황제시장공지침(奉為大南協和皇帝謚莊恭之寢)이라 쓰여 있으며, 측면에는 뜨득 황제의 말인 禦製 吾弟十四人好學者甚少除卻建瑞公今尙存文朗이 쓰여 있다.
4. 가족[편집]
4.1. 아내[편집]
- 정실(正室) 레티후언주옌(
黎氏勳緣 )[2]
4.2. 자녀[편집]
아들 11명과 딸 6명을 두었다. 후예들은 십(十) 자부(字部)를 하사받고 그에 따라 이름의 두번째 글자를 지었다. 카이딘 4년(1919년), 우(牛) 자부로 고쳤다.[3]
4.2.1. 아들[편집]
- 둘째 응우옌푹응히엡(
阮福膺協 ) - 풍록군공(豐祿郡公) 응우옌푹홍캉의 양자로 입양되어 응우옌푹응혹(阮福膺學 )으로 개명하였다. - 응우옌푹응박(
阮福膺博 ) - 응우옌푹응쭈언(
阮福膺準 )
4.2.2. 손자[편집]
- 응우옌푹브우짝(
阮福寶卓 ) - 문랑향공(文朗鄕公)을 습봉하였다. 카이딘 10년(1925년), 일로 인하여 폐위되었고, 모친의 성 도안(段)을 따라 도안짝(段卓)으로 성명을 고쳤다. 바오다이 8년(1933년), 향공으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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