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대통령 서독 공식 방문 (문서 편집) [include(틀:박정희)] [include(틀:한독관계)] ---- [목차] || [youtube(xPs0BQStkWE)]|| == 개요 ==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독일]](당시 [[서독]])에 국빈자격으로 방문한 외교 행사였다. == 계기 == 1950~1960년대에 [[한국]]은 경제개발을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물론 [[8.15 광복]] 직후부터 [[미국]]으로부터 계속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체적으로 뭘 하고 싶어도 돈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늘 외국에 의존하며 그나마 있던 외화를 계속 낭비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6.25 전쟁|전쟁]] 직후부터 [[경공업]]을 중심으로 외국에 상품을 수출하여 경제를 살려 보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않았고 국민들 중에도 [[문맹|이름 석 자 말고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당시 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이 현재의 초등교육까지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도시를 제외하면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시골에서는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과 여성들은 더욱이... 그러나 1945년 해방 직후 78%에 달하던 문맹율은 1948년 정부 수립 시 41.3%로, 1958년에는 4.1%로 개선되었다. 현재와는 분류법이 달라 자세한 내용은 [[문맹]] 항목을 참조하자.] 돈이 없어 기본적인 것도 못하는 정부 입장에선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미국의 원조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던 와중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정권은 [[박정희]] 정부로 넘어갔지만 군사정변으로 태동한 정권에 신뢰를 갖고 투자, 차관, 그리고 국가에서 돈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 만든 채권을 사 줄 나라가 상식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에서는 큰 결단을 내렸다. 바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한일수교]]를 통해 일본에게 6억 달러를 받아냈고 그 돈으로 [[경제계획/대한민국|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면서 수많은 공사들을 시작해 순조롭게 경제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밑바닥에서 처음 시작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고 점차 자금조달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줄어들었던 실업률도 올라가 정부 입장에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각종 이해관계와 과거사의 문제로 차관이나 원조를 내 줬지만 그 외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가난한 작은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차관]](돈)을 빌리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964년]] [[12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방문하게 되었다. == 일정 == * 1일차 (12월 6일) * [[김포공항]]에서 독일 전세기([[루프트한자]])를 이용, 첫번째 경유지인 [[영국령 홍콩]]에 도착. 데이비드 트렌치(Sir David Trench) 홍콩 총독과 잠시 접견했다. * 두번째 경유지인 [[태국]] [[방콕]]에 오후 늦게 도착하여 '''타놈 끼띠카쫀(Thanom Kittikachorn) 태국 수상'''과 접견했다. * 2일차 (12월 7일) * [[서독]]의 수도인 [[본(독일)|본]]의 [[쾰른-본 국제공항]]에 도착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외 서독측 인사들에게 영접을 받았다. * 무명용사묘지 참배. 이후 [[본(독일)|본]]과 [[쾰른]]을 시찰하였다. * 3일차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과 공식예방하고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았다. *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과 최초의 한독정상회담을 가졌다.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접견하면서 환담하였다. * [[아우토반]]과 각종 산업시설들을 시찰하였다. * 4일차 (12월 9일) * 전날 환영 만찬회가 이루어졌던 베토벤 음악당에서 [[파독 근로자]]외 170여명의 교포와 접견하며 노고했다. * [[서독]]의회에 방문하여 하원을 접견했다.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한독정상회담을 가졌다.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오찬회를 가졌다. * 5일차 (12월 10일) * 서독 공식 방문을 마친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이용해 파독 광부들이 많이 일하는 뒤스부르크 루르 지방(Ruhrgebiet)의 함보른 탄광회사(Lohberg Mine)에 방문해 한인 광부 300여명과 간호원 50여명과 강당에서 한인 노동자들을 접견하며 그들을 노고했다. 여기서 나온 연설이 바로 그 유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연설이 되었다. *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의 철강, 제철 공업단지를 시찰하였다. * 뒤셀도르프(Düsseldorf)의 로하우젠 비행장에서 [[팬암]]여객기를 이용 (서)[[베를린]]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도착했다. *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후 서독 총리)을 접견하고, 베른린 시청을 방문하였다. * 6일차 (12월 11일) * 베를린 자유 대학교(Freie Universität Berlin)에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연설하였다. * 독일 기업인들과 조찬을 가진 뒤 [[베를린 장벽]]를 시찰하고 전망대에서 [[동독]]을 지켜보았다. * 베를린의 [[지멘스]] 공장, AEG 전기공장, 독일개발협회를 방문·시찰했으며 철강 공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그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영 부총리와 박충훈 장관에게 [[포항제철|제철공장]] 건설 계획을 지시했다. * 7일차 (12월 12일) * 최종 기착지 [[뮌헨]]으로 가기 위해 베를린을 출발했고 저녁에 뮌헨 라임 공항(Munich-Riem Airport)에 도착해 주정부 인사들의 영접을 받았다. * 뮌헨의 비어야레스자이텐 호텔에서 유럽-아프리카 공관장 회의에 참석했다. * 8일차 (12월 13일) * 80여 명의 교포 유학생들을 초청한 조찬회를 가졌다. * 뮌헨 근교의 님펜부르크 성과 슐라이스하이머 성을 관광했다. * 바이에른 주지사 고펠 부부를 접견했다. * 쿠빌리에 극장에서 정부 인사들과 모차르트의 가극‘피가로의 결혼’을 감상했다. * 9일차 (12월 14일) * [[독일 공군]]이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뮌헨의 리임 공항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 다양한 인사들로부터 환송을 받으면서 독일 전세기([[루프트한자]])를 이용해 귀국길에 올랐다. * 10일차 (12월 15일) * 저녁 7시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 독일 공식 방문을 마무리 했다. == 성과 == || [youtube(ogBuI8Q3nFs)]|| 서독과의 관계 강화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성과로 총액 1억 5천 9백만 [[독일 마르크|마르크]](약 4천만 달러)의 상업·재정 [[차관]]을 지원받았다. 한국은 이런 경제협력을 통해 기존의 경공업 중심에서 금속, 기계, 화학, 합성 고무, 비료, 시멘트와 같은 [[중공업]] 산업에 대한 기술을 전수받았다. 특히 이 방문을 통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의 초기 계획이 만들어졌다. === 박정희 대통령 연설 ===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뒤스부르크 루르 지방(Ruhrgebiet)의 함보른 탄광회사(Lohberg Mine)에 방문하여 한인 광부 300여명과 간호원 50여명이 모인 강당에서 한 유명한 연설이다. 근래에는 눈물바다가 된 걸로 회자되곤 하는데 정작 당시 언론 보도나 박정희 본인의 '방독소감'을 포함한 정부 자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박정희의 방독이 재부각된 것은 50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을 전후해서였다. 2010년대에 유포된 정보 중 팩트체크로 사실임이 부정되는 것은 *박정희 본인이 오열하고 광부를 껴안았다 (실제 박정희는 대한뉴스 영상에서 약간 눈시울을 붉힌 것으로 보도된다) *서독 뤼프케 대통령이 함께 울었다, 혹은 광부들을 위안했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4572|오마이뉴스 기사]] ][[https://www.youtube.com/watch?v=5-8XbDV-h-g|당시 KTV 방송]] >(국민의례 후)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 >[[광부|광원]] 여러분, [[간호조무사|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 > 출처: 1964.12.11 <조선일보> 이자헌 기자 == 기타 == * 당시 한국에는 대통령 전용기는 물론이고 장거리 항공기가 없어[* 한국에 장거리 항공기가 도입된 것은 [[대한항공]]이 [[보잉 707]]을 들여온 1971년의 일이다.] 대통령과 관계자들은 독일 [[루프트한자]]의 전세기를 빌려서 타고 갔다. 그것도 루프트한자가 한국에 취항(1984년)하기 전이어서 [[도쿄]]에 운항하던 항공기를 도중에 기항시켰다. *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변비로 고생했다. 수행원들도 불평했는데 '독일인들이 비용을 아끼려고 이렇게 했다'고 하면서 '지독한 사람들' 이라고 불평했다. == 외부 링크 == *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16&nNewsNumb=20140314468&nidx=14469|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부자 나라 독일 방문記]] - 조선뉴스프레스 [[분류:박정희]][[분류:한독관계]][[분류:1964년/사건사고]][[분류:제3공화국/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