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뉴스 (문서 편집) [include(틀:리투아니아의 압스크리티드스)] [include(틀:역대 이그노벨평화상 수상자)] [include(틀:리투아니아의 세계유산)] [Include(틀:유럽의 수도)] ||<-6>|| ||<-6>|| ||<-6>|| ||<-6><:>{{{#ffffff {{{+4 '''Vilnius'''}}}[br]빌뉴스 }}}|| ||<-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ilnius_river.jpg|width=100%]] || ||<-2> || [[파일:빌뉴스 시 문장.jpg|width=55%]] || ||<-2> || 시장 || ||<-1><:>{{{#FFFFFF '''국가'''}}}||<-5>[[리투아니아]]|| ||<-1><:>{{{#FFFFFF '''주'''}}}||<-5>[[빌뉴스 주]]|| ||<-1><:>{{{#FFFFFF '''면적'''}}}||<-5>401km²|| ||<-1><:>{{{#FFFFFF '''인구'''}}}||<-5>592,389명[* 통계인구, 2022년 기준.]|| ||<-1><:>{{{#FFFFFF '''인구밀도'''}}}||<-5>1,477명/km²[* 통계인구, 2022년 기준.]|| ||<-1><:>{{{#FFFFFF '''시간대'''}}}||<-4>UTC+02:00([[서머타임]] 적용)|| ||<-6><:>[[https://www.vilnius.lt/|빌뉴스 행정 사이트]]|| ||<-6>{{{#!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Vilnius,너비=100%,높이=300px)]}}}||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3> 이름 || 한국어 || 빌뉴스 역사 지구 || || 영어 || Vilnius Historic Centre || || 프랑스어 || Centre historique de Vilnius || |||| 국가·위치 || [include(틀:국기, 국명=리투아니아)] 빌뉴스 || ||<-3> [include(틀:지도,장소=Aušros vartai),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4년]][* 2012년 수정] || |||| 등재기준 ||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541|541]]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hjNlIQtMk78)] [[리투아니아]]의 [[수도(행정구역)|수도]]인 동시에 빌뉴스주의 [[주도]]이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북동쪽 380 km,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는 북서쪽 180 km 지점에 있다. 네무나강의 지류 빌리야강 양안에 위치하는데 '빌뉴스'란 도시명 역시 빌리야강에서 유래했다. [[발트 3국]]의 수도 중 유일하게 [[바다]]와 면하지 않았고 [[트램]](電車)이 없는 수도.[* 지하철은 발트 3국 어디에도 없다. 빌뉴스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어떤 도시에도 전차가 다니지 않는다. [[21세기]] 들어 빌뉴스 지하철 건설 제안이 간간이 나오지만 착공은 언제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소련 시절에 계획되었다 무산된 [[라트비아]] [[리가]]와 달리 여긴 트램이 없어졌으니 지하철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느끼겠지--] 옛 이름은 빌나(Vilna)로 [[도시]]의 [[면적]]은 401 km², 인구수는 [[2021년]]을 기준으로 55만 6490명이다. [[별명]]으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던 시절 붙여진 북쪽의 [[예루살렘]]과 리투아니아의 [[아테네]]가 있다.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수도였음에도 [[전간기|양차대전 사이]]에는 [[폴란드인]]이 55-65%(최대 12만 명) 가까이 치달은 적도 있었고 이때문에 폴란드에서 국제연맹의 중재를 쌩까고 폴란드에서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2차세계 대전 후 소련이 점령한 영토를 폴란드에 반환을 거부하며 소련 치하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2001년]] 기준으로 [[리투아니아인]]이 60%인 반면 폴란드계는 20%로 10만 명 전후이다. 30~40%를 차지하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거의 사라졌고 러시아계가 14%다. 빌뉴스 교외지역에는 지금도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폴란드계]]가 꽤 많이 산다. [[소련 붕괴]] 직전에는 한 때 [[http://en.wikipedia.org/wiki/Polish_National-Territorial_Region|폴란드인 자치지역]]을 선포하기도 했다. 빌뉴스 시가지를 포위한 형국이었기에 소련은 리투아니아 독립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했지만, [[레흐 바웬사]] 정부에서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하지 않고 리투아니아 정부를 인정했고, [[8월 쿠데타]] 이후로 소련의 통치력이 와해되면서 자치구역 선포 자체가 무위로 돌아갔다. 다만 이후의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폴란드계]]에 대한 권리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갈등]]이 많다. ~~[[불법주차]]하면 시장님이 와서 장갑차로 차를 깔아뭉개는 도시이다.~~ == 언어별 표기 == || [[리투아니아어]] || Vilnius || || [[벨라루스어]] || Вільня(빌냐) || || [[폴란드어]] || Wilno(빌노) || || [[러시아어]] || Вильнюс(빌뉴스)[* 예전에는 독일어에서 음차한 Вильна(빌나)로 불렀다.] || || [[독일어]] || Wilna(빌나) || || [[에스페란토]] || Vilno(빌노) || == 역사 == === 중세 ===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가 빌뉴스 성채를 세웠으며, [[교황]] [[요한 2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처음 등장한다. 게디미나스 치세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는데, 실질적인 수도는 [[루테니아인]]들의 도시 [[나바흐루다크]]와 [[폴라츠크|폴로츠크]]였지만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인 군사 귀족들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1387년]] 폴란드 국왕을 겸한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빌뉴스에 도시자치법에 따른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발트 [[다신교]] 성소들을 제거하고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본격적인 첫 걸음을 내딛었다.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초창기에는 가톨릭 개종에 반발하였으나, [[폴란드 왕국]]에서 온 가톨릭 [[사제]]들이 [[성당]]을 근거지로 가톨릭뿐만 아니라 세련된 [[폴란드어]]와 [[폴란드/문화|폴란드 문화]]를 전파하여 빌뉴스 시민들은 결국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인에게 폴란드의 귀족 문화는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인]] 외에도 [[루테니아]]인[*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의 전신], [[폴란드인]], [[독일인]], [[아슈케나짐]] 유대인과 [[카라임 유대인]]들이 모여살던 [[국제도시]]로서 [[문화]]의 [[용광로]] 같던 곳이었다. 빌뉴스에는 [[정교회]]와 [[가톨릭]]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유대교]]와 물론 비타우타스 치세에 [[토크타미쉬]]의 [[타타르]]족이 유입된 영향으로 [[이슬람]] [[모스크]]까지 들어섰다. 별로 크지도 않은 도시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시설물은 거의 다 모인. 말하자면 [[종교]]의 종합전시장이었던 셈. === [[르네상스]] 시대 === || [[파일:Bronze_door_of_Vilnius_University_library.Lithuania.jpg|width=30%]] [[파일:VU_bibliotekos_Smuglevičiaus_salė.jpg|width=67%]] || || [[빌뉴스 대학교]]를 대표하는 황금문과 도서관 || [[1503년]]부터 [[1522년]]까지 [[크림 칸국]]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9개와 성탑 3개가 딸린 성곽을 세우고 도시 내 독일인, [[루테니아인]], [[유대인]]을 위해 독립된 구역을 지정했다. [[1544년]]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잠시나마 궁정을 빌뉴스에 두었을 정도로 폴란드인들도 많았다. [[1579년]]에는 [[빌뉴스 대학교]]가 설립되어 [[동유럽]] 지성의 산실 역할을 했다. 빌뉴스 대학교는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뿐만 아니라 [[벨라루스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빌뉴스는 대학 외에도 인쇄소로도 유명했다. [[보헤미아 왕국]]에서 인쇄 사업을 하던 벨라루스인 출판업자 프란시스크 스카리나(Францыск Скарына)가 [[1525년]] 빌뉴스로 이주하여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다. 스카리나는 [[벨라루스어]]로 된 [[성경]]과 여러 가지 저작들을 인쇄하며 [[의학]] 등 다방면에 출중했던 [[사람]]으로, 오늘날 벨라루스에서 [[세종대왕]] 비슷한 존경을 받는다. 물론 스카리나의 인쇄소 사업은 벨라루스에게만 영향이 간 것은 아니었다. 스카리나가 운영했던 빌뉴스의 인쇄소를 시작으로 금속활자 기술이 빌뉴스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1529년]] 리투아니아의 첫 법령집이 편찬되었다. [[16세기]] 개신교 교회의 부속기관으로 건설된 [[초등학교]]는 이후 [[예수회]]의 활동으로 [[가톨릭]] [[미션스쿨]]이 된 이후에도 빌뉴스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잠시 빌뉴스 시에도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부흥하는 듯 했으나 이후 예수회가 경쟁적으로 부설학교들을 세우고 교육사업에 투자하면서 빌뉴스 시의 개신교 교세는 꺾이고 말았다. 다만 개신교와 가톨릭 예수회가 선교경쟁을 하느라 빌뉴스의 교육시설과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었음이 좋게 평가받는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원래 공용어는 [[루테니아어]]였지만,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고 도시 문화가 계속 폴란드화함에 따라서 리투아니아인 주민들이 [[폴란드어]]를 배우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면서 빌뉴스 시의 리투아니아계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리투아니아 내전에 참가했던 리투아니아 대귀족 다섯 가문들이 전부 다 리투아니아식 성을 쓰지 않고 폴란드식 성을 사용했을 정도였으니... [[1655년]] [[대홍수(역사)|대홍수]] 당시 [[루스 차르국]]의 군대가 빌뉴스를 함락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빌뉴스와 그 인근 지역의 인구가 급감하자 빌뉴스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르네상스도 끝을 맺었다. === 근현대 === [[1795년]]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가 설치한 구베르니야의 주도가 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해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던 도시들 중 3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빌뉴스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는데, 빌뉴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하레디]] 유대인과 반대되는 [[세속주의]] 성향의 유대 공동체를 대표했다. 빌뉴스를 대표하는 [[대학교]]이자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최대의 대학교였던 빌뉴스 대학교는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3개국 모두의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활동한 것을 기점으로 세 민족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서로 화합하는 기능을 했으나 [[1831년]] 폴란드 독립 봉기가 진압된 이듬해 [[1832년]]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폐교를 당했다. 빌뉴스 대학교 강제 폐교에도 불구하고 이미 뿌리내린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빌뉴스 대학 폐교 조치에 쉽게 굴하지 않고, [[프로이센 왕국]] 영토였던 "소 리투아니아"[* 현재 [[클라이페다]]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로부터 리투아니아어 책을 밀수하여 가정 내에서 리투아니아어 교육을 이어갔다.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빌뉴스 시 인구의 40%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고, [[폴란드인]]은 30.1%였으며 [[러시아인]] 20.9% [[벨라루스인]] 4.3% '''리투아니아인 인구 비중은 2.1%'''에 불과했다. 물론 빌뉴스에 살던 리투아니아인들이나 벨라루스-루테니아인들이 다 죽거나 도망가거나 한 건 아니고, 귀족들 중심으로 폴란드인들과 통혼하고 계속 폴란드어를 사용하면서 동화되었던 것. 같은 년도에 빌뉴스 근교의 [[농촌]]과 소도시를 포함해서 낸 통계에서는 벨라루스인 56.1%, 리투아니아인 17.6%, 유대인 12.7%, 폴란드인 8.2% 러시아인 4.9%로 나온다. 1914년부터 1921년까지 빌뉴스는 최소 8번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쟁탈전의 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1915년]]에서 [[1918년]]까지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이후 잠시 리투아니아에게 넘어갔다가 독일이 패망하여 폴란드와 볼셰비키가 쟁탈전을 벌인다. 러시아인 인구가 소개된 이후에 이루어진 [[1916년]]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50.2%가 폴란드인, 43.5%가 유대인이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했다. [[1920년]]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는 잠시 빌뉴스를 점령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패하고]]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에 이 도시를 넘겨주었지만, [[10월 9일]]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의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사단]]이 연출된 쿠데타를 통해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 시와 주변 지역은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 선포했다가 [[1922년]] [[2월 20일]] 합병해버렸다. 이후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라 하면 이를 갈며 싫어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정식수도이자 수복해야 할 땅으로 선포하면서 임시수도를 [[카우나스]]에 두었다. 빌뉴스, 아니 빌노(Wilno)는 폴란드 제5의 도시로 Elektrit 같은 라디오 공장[*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합병하면서 이 공장 시설도 [[민스크]]로 뜯어갔다.]도 보유하는 등 산업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당시 [[제3제국|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서로 체결한 비밀조약]]에 따라 1939년 [[9월 19일]] 빌뉴스는 [[소련]]이 장악하고 합병하였다. [[1939년]] [[10월 10일]]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얻는 대신 소련이 리투아니아 각지에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수도를 카우나스에서 빌뉴스로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미처 끝내기도 전인 [[1940년]] [[6월]] 소련이 리투아니아 전국을 점령하면서 빌뉴스는 새로 설립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1941년]] 6월에는 빌뉴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어 구시가에는 [[유대인]] 주민들을 위한 게토가 두 군데 세워졌고 빌뉴스의 유대인 인구의 95% 정도가 독일군과 그들에게 협력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1944년]]에는 폴란드 향토군과 [[소련군]]이 차례로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소련에 합병되었고, 종전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농촌의 리투아니아인들과 소련의 타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이주하면서 전후 빌뉴스는 주민 구성, [[문화]],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다. [[1931년]]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 인구의 0.8%에 불과했지만 [[1959년]]에는 34%로 증가하였고, 같은 기간 폴란드인은 65.5%에서 20%로 감소, 러시아인은 3.8%에서 29%로 증가, 유대인은 27.8%에서 7%로 감소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노래 혁명|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회복시켰다]]. 이에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1월 9일]] 군 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대응, [[1월 13일]]에 국립 라디오·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텔레비전 철탑을 공격, 그 과정에서 민간인 14명이 죽고 700명 이상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에 소비에트 연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탈퇴를 인정하였고, 이후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09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됐다. [[1980년대]]에 [[라트비아|윗동네]]에 [[리가 지하철]]이 [[노래 혁명]]으로 취소된 후 [[발트 3국]]에서 처음으로 [[https://en.wikipedia.org/wiki/Vilnius_Metro#:~:text=Vilnius%20Metro%20(Lithuanian%3A%20Vilniaus%20metropolitenas,in%20the%201990s%20and%202000s.|지하철 계획]]이 입안되어 추진중에 있다. [[2001년]] 처음 제안되어 [[2007년]] 논쟁을 빚고 좌초되는줄 알았으나 [[2018년]] 지하철 관련법 제정으로 민자사업으로 추진중이다. == 행정 구역 == [[파일:vilniausseniunijos.png|width=600px]] 하위 행정구역은 21개 구(seniūnija)로 이루어졌는데, '구시가지'란 뜻인 세나미에스티스 구가 빌뉴스 시내의 중심부이다. == 언어 ==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빌뉴스 시민들의 모어는 리투아니아어 67.01%, 러시아어 14.53%, 폴란드어 11.28%로 조사되었다. == 여담 == * 드라마 [[체르노빌(드라마)|체르노빌]]에서 [[프리피야트]]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대부분 빌뉴스에서 촬영하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EaysSNd6CJo|#]]. 실제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드라마 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리피야트]]에 거주해본 사람과 관광해본 사람 말에 따르면, 빌뉴스의 옛날 [[아파트]] 풍경이 구 소련의 [[신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프리피야트]]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한다. * 만우절에는 이 도시이자 수도 내에 또 하나의 국가인 [[우주피스 공화국]]이 만들어진다. * 문명5에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분류:유럽의 수도]][[분류:리투아니아의 도시]][[분류:리투아니아의 세계유산]][[분류:세계유산을 보유한 수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