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먼드 힐러리 (문서 편집) [include(틀:대영제국 훈장(기사작위 수훈자들-남자))] [include(틀: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영웅들 & 아이콘들))] ---- ||<-2> '''KG ONZ KBE[br]{{{+1 에드먼드 힐러리}}} 경[br]Sir Edmund Hillary'''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rcqNJpXEAE2xso.jfif.jpg|width=100%]]}}} || || '''본명''' ||에드먼드 퍼시벌 힐러리[br]Edmund Percival Hillary||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뉴질랜드)]|| ||<|2> '''출생'''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뉴질랜드)|오클랜드]]|| ||<|2> '''사망''' ||[[2008년]] [[1월 11일]] (향년 88세)|| ||[[뉴질랜드]] [[오클랜드(뉴질랜드)|오클랜드]]|| || '''직업''' ||산악인, 탐험가|| || '''배우자''' ||루이즈 메리 로즈 ^^(1953년 ~ 1975년, 사별)^^[br]준 멀그루 ^^(1989년 결혼)^^[* 남편인 피터 멀그루(Peter Mulgrew, 1927~1979)가 후술할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아픔을 겪었다.]|| || '''자녀''' ||1남 2녀[br]피터, 세라, 벌린더|| || '''서명''' ||[[파일:Edmund_Hillary_Signature.sv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mundhillarycropped.jpg|width=300]]}}} || || 말년의 모습 ||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1919~2008)으로, 1953년 [[네팔]]의 산악인인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최초로 등정'''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 생애 ==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뉴질랜드)|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구들보다 몸이 왜소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성인이 된 뒤의 키는 '''198cm'''의 [[장신]]이었다.] 매우 소심했고, 책 속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모험에 대한 공상을 즐겼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등하교에 각각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렸고, 그 시간을 독서를 하는데 보냈다. 그는 왜소한 몸을 극복하기 위해서 복싱을 배운 후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16세 때, 수학여행을 통해 루아페후 산(최고 2,797m)을 등반함으로써 등반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는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고, [[1939년]]에는 [[남 알프스 산맥]]의 [[쿡 산]] 근처에 있는 1,933m의 올리비어 산을 등정하게 된다. 산에 관심이 많았지만 원래 '''양봉업자'''로 이름을 떨쳤고, 양봉업은 여름의 한시적 직업으로 겨울에는 등반을 하면서 뉴질랜드의 스키와 등산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뉴질랜드군|공군]]에 자원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로 이를 철회했다. 하지만 [[1943년]] 징병으로 인해 그는 조종사로 공군에 입대하여 비행정을 조종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1945년]]에 [[피지]]와 [[솔로몬 제도]]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보트 사고로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 그 이후 다시 뉴질랜드로 송환되었다. === [[에베레스트|지구의 가장 높은 곳]]에 처음으로 다다르다 === || [[파일:image-asset.jpg|width=300px]] ||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촬영된 사진 (1953.5.29) ||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산을 세계 최초로 정복한 역사적인 산악가로 유명하다. 힐러리의 정복 전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당시 [[에베레스트]]로 가는 루트는 [[중국]]의 [[티베트]] 통제로 폐쇄되었고, [[네팔]]은 1년에 한 번에 한 해 허용을 했다. [[1952년]]에 같이 참가했던 스위스 원정대와 정상에서 240m 지점에 남기고 악천후로 의해 하산했다. [[1952년]] 힐러리가 [[알프스 산맥]]를 등반하는 동안, 조지 로우(George Lowe)가 1953년 등반에 승인된 영국팀으로 연합 히말라야 위원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을 알게되었고, 초청이 됨으로서 힐러리도 같이 갈 수 있었다. 여기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셰르파]]를 만나게 되는데 그 셰르파는 '''[[텐징 노르가이]]'''이다. 노르가이는 정상 바로 앞에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를 기다렸다가 힐러리가 최초로 정상에 설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최초 등정자에는 두 명의 이름이 같이 적혀있다. 정상에 선 힐러리는 텐징 노르가이를 다시 정상에 세우고서 정상에 올라 선 텐징의 모습을 카메라(Kodak Retina 118)로 찍었다.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 유명한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사진'''으로, 이 사진을 통해 텐징 노르가이는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모습이 사진으로 찍힌 인물이 되었다. 힐러리는 위처럼 텐징의 사진은 찍어주었으나, 자신의 사진은 남기지 못했는데, 이는 텐징이 사진기를 쓰는 법을 몰라 힐러리의 사진을 찍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손짓발짓으로라도 가르쳐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해발 8,000미터가 넘는 고산은 극한의 환경이라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 조차 상당한 고역이고 거의 눈빛으로 소통하는 게 일반적이라 이런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평지 대비 산소량이 1/3에 불과해 산소포화도가 60%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호흡할 산소도 부족하기 때문에 말로 소통하는 건 더더욱 어려워 고산적응이 안된 일반인이라면 고산병으로 인해 죽거나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산소마스크 달고 있어야 할 수준, 이조차도 평생 누워있는 장애인이 될 가능성도 높다.] 훗날 힐러리 경은 "거기서 텐징에게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었어."라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 여하튼 힐러리의 사진은 남겨지지 못했지만,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진 등을 몇 장이나 찍었고, 정상에 남겨놓고 온 소지품을 나중에 등정한 산악인들이 발견함으로써 초등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확실하게 인정되었기 때문에 힐러리의 정복을 둘러싼 진위여부 논란은 전무하다. === 에베레스트 이후 ===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그는 [[뉴질랜드]]에서 국민적인 환영, 찬사를 받았다. 당시 뉴질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인물이 많이 없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어니스트 러더퍼드]] 정도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러더퍼드의 생전에는 뉴질랜드가 온전한 독립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러더퍼드는 통상적으로 영국인으로 간주되었다. [[손기정]]의 이름이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 일본식으로 '손 기테이'라고 적힌 것과 오늘날의 [[체코]] 지역 출신인 유대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알려진것과 비슷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뉴질랜드의 경우엔 위의 경우와 달리 영국 이민자들이 바탕이 된 식민지라 혈통적으로도 영국인과 차이가 없다. 러더퍼드 본인도 생애 대부분을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처음 정복한 주인공의 모국으로서 뉴질랜드가 널리 알려지는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당시 뉴질랜드인들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냐면, 후술하듯이 '''생전에 고국의 화폐 모델이 될 정도였다.''' 1958년 설상차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이는 탐험가로서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그의 대표적인 성과다. 1960년대부터는 자신이 설립한 Himalayan Trust를 통해 네팔의 셰르파들을 돕는 데 전념했으며,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뉴질랜드 정부의 주인도 대사로 부임하여 외교관 생활을 하기도 했다. === 사망 === [[2007년]] [[4월 22일]] 힐러리는 [[카트만두]]로 여행을 가던 중 넘어져 [[뉴질랜드]]의 병원에 입원했으며, [[2008년]] [[1월 11일]] 향년 88세로 오클랜드 시립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힐러리의 사망 소식은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가 직접 발표했으며, 장례식은 [[2008년]] [[1월 22일]]에 국장으로 치러졌다. 시신은 화장된 후 동년 [[2월 29일]]에 [[오클랜드]]의 하우라키만에 산골되었으며, 남은 잿가루들은 에베레스트 근처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2010년]]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 재들을 흩뿌리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취소되었다고 한다. 힐러리가 사망한 직후, 힐러리를 추모하기 위해 네팔의 루클라 공항은 [[텐징-힐러리 공항]]으로 개칭되었으며, [[뉴질랜드 녹색당]]에서는 힐러리의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제안까지도 했다. == 서훈 == * [[1953년]]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 작위급 훈장) * [[1987년]] 뉴질랜드 훈장(ONZ) * [[1995년]] [[가터 기사단|가터 훈장]](KG) == 이야깃거리 == * [[뉴질랜드 달러|뉴질랜드 5달러]] 앞면의 도안이다.[* 뒷면은 노란눈펭귄.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희귀종이다.] 그것도 '''살아 생전이었던''' 1992년부터.[* 당시 힐러리의 나이는 73세.] 보통 지폐에는 현재 재위 중인 군주([[엘리자베스 2세]] 등)를 제외하면 사망한 위인을 넣는데,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실제로, 그의 초상을 지폐에 넣을 때 뉴질랜드 중앙은행이 힐러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힐러리 생전에 발행된 5달러 지폐의 일부는 '''힐러리 본인이 직접 사인해주었다.''' [[파일:attachment/뉴질랜드 달러/nzd211.jpg]] [[파일:zealand-bill-signed-sir-edmund_1_831c583e09f3ab11c75ec174326ab5fb (1).jpg]] (지폐에 사인해주고 있는 힐러리의 모습) * [[2013년]] 오클랜드 전쟁기념 박물관에 있는 에드먼드 힐러리의 시청각자료, 일기, 장비, 사진 등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 하마터면 여객기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원래 1979년 11월 28일에 [[에어 뉴질랜드]] 소속 [[DC-10]]의 [[남극]] 관광 비행에서 가이드로 탑승할 예정이었지만, 다른 일정 때문에 동료 산악인이던 피터 멀그루가 대타로 탑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비행기는 [[화이트아웃]] 현상 때문에 [[에레부스 화산]]에 충돌하였고, 다른 탑승객 256명과 함께 멀그루 본인도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의 여파로 남극의 합법적 관광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그리고 후에 멀그루의 미망인과 재혼했다.-- * [[명왕성]]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을 '''힐러리 산'''이라고 명명했다. [[분류:뉴질랜드의 탐험가]][[분류:1919년 출생]][[분류:2008년 사망]][[분류:대영제국 훈장 남성 2등급]][[분류:화폐의 인물]][[분류:영국의 기사]][[분류:뉴질랜드의 기사]][[분류:등산가]][[분류:가터 훈장]][[분류:오클랜드(뉴질랜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