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보고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신라 상대등)]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fbe673 '''장보고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 ||<-3> '''[[청해진|{{{#fbe673 청해진 대사}}}]]''' || || '''장보고''' || {{{+1 →}}} || [[염장(통일신라) |염장]]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color: #fbe673" '''신라 제35대 상대등[br]{{{+1 장보고 | 張保皐}}}[* 장보고의 한자명은 조금씩 다른데, [[중국]] 측 사료인 《[[신당서]]》에서의 기록은 張保皐. [[대한민국|한국]] 기록은 으레 중국 기록의 표기대로 간다. [[일본]] 측 사료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의 기록은 張寶高. 여하튼 모두 Po-k에 가까운 발음을 쓰려고 한 듯하다.]'''}}}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장보고 표준영정.jpg|width=100%]]}}} || ||<-2> {{{-2 {{{#fbe673 1979년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 (상상화이다.)}}} }}} || ||<|2> '''출생[br]{{{-3 (음력)}}}''' ||[[780년대]] 후반 추정[* 장보고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 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944451|#]]] || ||[[통일신라|신라]] || ||<|2> '''사망[br]{{{-3 (음력)}}}''' ||[[846년]][* [[삼국사기]]의 기록.] || ||[[통일신라|신라]] [[청해진]] || ||<|2> '''재임기간[br]{{{-3 (음력)}}}''' ||'''{{{#fbe673 제35대 상대등}}}''' || ||[[839년]] ~ [[846년]] 이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장(성씨)|장(張)]] || || '''별칭''' ||아명은 궁복(弓福),[* 《[[삼국사기]]》의 기록. 궁복은 활보라는 뜻. -보는 '먹보', '심술보' 등의 '-보'자 접미사로 추정하기도 한다. 즉 활 잘 쏘는 사람에게 붙는 이름이다. 장(張)과 보고(保皐)라는 이름도 궁(弓)과 복(福)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궁파(弓巴)[* 《[[삼국유사]]》의 기록. [[사복]]불언 설화에선 복(卜, 伏)과 파(巴)는 어린아이를 뜻한다고 적혀있다.][br]현대 호칭은 '''해상왕(海上王)''' || || '''종교''' ||[[불교]] || || '''신장''' ||장신[* 기골이 장대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평균키인 [[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0|160cm]]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장보고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국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3394905#home|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은 등신상(等身像)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좌상의 앉은 키가 78cm인데 현대인의 '앉은 키 / 키'의 통계에 의할 때 이에 해당하는 키는 146c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직업''' ||[[군인]], [[국제무역|무역가]] || || '''직위''' ||'''청해진 [[대사]](淸海鎭 大使)'''[* [[흥덕왕]] 시기 제수.][br] 감의군사(感義軍使)[* [[신무왕]] 시기 제수.][br] 진해장군(鎭海將軍)[* [[문성왕]] 시기 제수.][br] [[상대등]](上大等) ||}}}}}}}}} || >'''옛 사람이 말하길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난 비록 평범하고 미천하지만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 >신무왕의 부탁을 받은 장보고의 답변. 이후 그는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휘두른다.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 군주''' >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현재도 널리 쓰이는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든 인물이다.] 하버드-옌징 연구소 소장.[* 그는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여기에서 등장하는 재당 신라인들의 역할에 주목했고, 자신의 논문에서 엔닌의 구법행을 도왔던 재당 신라인의 수장 장보고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에서 흔히 장보고를 부르는 수식어인 '해상왕'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3SQ51hwXzA)]}}} || [[통일신라]]의 [[군인]]이자 [[호족(한국사)|호족]]. 어린 시절 [[당나라]]로 넘어가 그곳에서 [[벼슬]]을 했다가 고향인 신라로 돌아와 군인이 되었으며 훗날 [[청해진]] 대사가 되어 당시 [[한중일]] 사이의 [[바다]]를 장악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던 인물이다. [[한국사]]에 기록된 최초의 [[호족(한국사)|호족]].[* [[역사저널 그날]]에서 [[고려사]] 전공 이익주 교수가 한 말.]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 그의 힘과 위세는 실로 막강하였다. 출신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미천했고 지방 호족에 불과했지만 [[중국]], [[일본]], [[통일신라]] 중앙의 [[왕실]]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으며 희대의 [[영웅]]이라 부를 만한 행보를 보였다. '''해상왕'''(海上王)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당시 신라인들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들이 붙인 이름이지만 한때 동아시아 해상에서 장보고가 지녔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과장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바다에서 활동하며 크게 이름을 떨쳤고 동시에 국제적인 인물이기도 해서 현대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좋아하고 밀어주는 [[위인]]이다. 해군에서는 주로 [[대사]]라 칭한다. 여담으로 [[왕]]이나 [[왕족]] 또는 [[연개소문]]처럼 독재자급 권신을 제외한 역대 전근대 한국 왕조의 인물들 중 [[김유신]]과 더불어 유이하게 [[한중일]] [[정사(역사)|정사]] [[역사서]]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에 세워진 것이긴 하지만 [[전라남도]] [[완도]]에는 장보고 기념관이 있으며 중국 [[산동반도]]의 법화원에는 장보고 [[동상]]과 기념관이 지어져 있고 [[승려]] [[엔닌]]이 세운 일본 [[교토]] [[엔랴쿠지]]에는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한중일 [[삼국]] 모두 기념하는 한국인은 한국 역사 이래 장보고가 거의 유일하다.[* 신라의 [[원효]] 또한 일본, 중국, [[인도]]에서 높은 평가를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으나 기념하는 기념관이 남아있는 인물은 장보고가 유일하다.] == 생애 == === 유년기와 당 장교 시절 === 본명은 이두로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표기되었는데 한국 고유어식으로 읽으면 ‘활보’ 가 된다. 여기에서 보는 몇몇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을 특성으로 지닌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현대어에도 남아 있어서 꾀보, 먹보, 잠보 등의 어휘가 있다. 예시다. 기록에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나타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장보고가 [[활]]을 잘 다루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은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보이며 [[골품]]은 수도인 [[경주시|경주]]의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므로 골품의 질서 안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출신지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장보고의 [[친구]] [[정연(통일신라)|정연]]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른 곳이 아닌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인근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데 완도라는 지역 자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고향]]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개연성이 크며 당나라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정연(통일신라)|정연]]이 '죽어도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에 있던 장보고를 찾아왔다는 기록,[* 물론 여기서 정연이 말한 '고향'은 완도 청해진이라는 세부지명이라기보다는 신라라는 나라 자체를 지칭한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할 때 대화한 상대가 당에 사는 풍원규였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대신]]들이 장보고가 해도(海島)인([[육지]]가 아닌 [[섬]]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도 그렇다. 이설도 있는데 장보고가 [[기병]]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신라 귀족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인다고 전쟁사 교양 서적을 여럿 낸 서영교는 단정하듯이 썼는데 통일신라에서 지금의 [[전남]], [[경남]]에 이르는 남해안 여러 섬에 목장을 다수 운영한 것은 맞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나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목동 출신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만큼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전라북도 [[부안군]]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7365/1|변산반도]]가 장보고의 고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청해진이 있었던 지금의 [[완도군]] 장도는 장군도(將軍島) 또는 조음도라고도 불렸는데 장좌교 서북쪽 100m의 장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의 동백나무숲 언덕에 6기의 [[무덤]]이 있고 목없는 [[시신]]이 묻힌 1기가 장보고의 것이고 나머지는 장보고의 양친과 선대의 것이라는 전승이 있으며 장보고는 반농반어로 먹고 살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장도 바깥쪽 바다에서 고기잡이, 노젓기, 수영을 배우고 활과 창으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민간 [[전설]]도 전하고 있다.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 >'''《번천문집》[* 당의 시인인 [[두목]]이 쓴 책. 장보고에 대한 당대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신라본기에서의 장보고 기록은 신라 측 기록을 인용한 것과 달리, 장보고 열전은 번천문집의 기술을 옮겨놓았다. 그래서 열전의 내용을 보면 '본기와는 다르다.'고 언급된 부분이 등장한다.] 권6, 장보고⋅정년전'''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인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그곳의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당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갔다는 이야기는 2002년 서울무비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의 줄거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실 신라의 [[골품제|살인적인 신분 제도]]를 생각하면 골품도 없는 그가 [[출세]]할 길은 당나라에라도 가서 군인이 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전무했다.]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이라는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나라는 번장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장으로 쓰기도 하는 등 이민족의 등용에 대해 꽤 개방적인 [[국가]]였다.[* [[절도사]] 가운데 이민족 출신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선지]], 부몽영찰, [[이정기]], [[복고회은]], [[가서한]], [[안녹산]]. 특히 안녹산은 본래 이란계 [[민족]]들 중 하나인 [[소그드인]] 출신이다. 본명이 알렉산더인 [[유럽]]계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고 진짜 본명은 [[인도인|북인도인]]이나 [[이란인]]에게서 흔한 이름인 '로우샨'의 [[소그드어]]식인 '로흐샨'이다.] 당나라에서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장보고는 말 타고 창 쓰는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으며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 일종의 [[장교]]. 하서절도사 휘하의 [[관직]]으로 1천에서 5천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직책이었다. 현재의 군 체계에 비유하자면 연대에서 여단급 [[병력]]을 지휘한 셈이다.]으로 출세하기까지 한다. 무령군은 산동반도에 할거하며 당에 맞섰던 [[고구려]]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 [[이정기]]의 손자로 당시 그의 세력은 [[허난 성]]과 [[허베이 성]]을 연결하는 [[산둥성]] 지역을 장악해 강력한 지방 [[군벌]]로 성장한 상태였다.]를 정벌하려고 만들어진 부대였는데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 진압에 참전했다고 전한다. 모종의 일로 당군 시절을 그만두고 신라로 돌아왔는데 장보고가 귀국을 선택한 이유로 몇 가지 추측이 있다. 장보고가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을 만나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이름[* '바다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는 의미.]을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1차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보고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위인전]]이 이 설을 채택했다.]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연은 당에 남았는데 훗날 정연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 후에도 장보고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장보고가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연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해신(드라마)|해신]]에서는 장보고가 때려잡은 옛 고구려 유민 출신 군벌 이사도가 자기는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아 결국 당나라 장수 일을 때려치는 계기가 된다. 원작이 된 최인호의 동명 [[소설]]에서는 이정기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신라인으로서 고구려 유민과 싸운다는 설정 때문에 해신 방영 당시에는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고구려 죽이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기도 했다.] 이 시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업에 종사했고 당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비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서는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서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에 장보고는 귀국했는데 805년 전후에 당나라로 넘어가 828년에 귀국했으니 20~30년만이었다. === 신라로 귀국,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북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다 === >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13&ref=y&cid=ㄴ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곧바로 서라벌로 가서 당시 [[임금]]이었던 [[흥덕왕]]에게 "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당의 해적들을 막겠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제수해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 및 무역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대사건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귀족들 간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인해 왕권과 지방 통제력이 자연스레 무너지면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828년 당시 [[통일신라]]의 형편상 1만의 군사를 내어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김헌창의 난]]이나 나중에 김우징의 쿠데타 때 병력을 보면 밑천 긁으면 가능하겠지만 쉽게 대뜸 내어줄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10,000명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이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만약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반대급부로 해적들을 아예 때려잡긴 했지만 앞의 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는 단순히 불법 군사 조직일 뿐이다.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을 정도. 그러나 10,000명의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무엇보다 이 병력을 사병이라고 적은 역사적 기록이 일절 없다는 것이 크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에 보면 장보고가 정식으로 신라왕([[흥덕왕]])을 찾아가서 병력을 받아냈다는 것 밖에 나와있지 않는데[* 대왕이 장보고에게 1만 명을 주었다.(大王與保臯萬人)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그 병력이 사병이지 않냐는 것은 그냥 후대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사병을 먹이고, 입히는데는 엄청난 재원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 때 신라는 [[후삼국시대]]처럼 막장까지 치닫진 않은 상황이었다. 세금 받아 재원을 마련하는 국가인 신라가 형편상 10,000명의 군사를 내주기 어려웠다면 대체 일개 개인인 장보고가 무슨 수로 사병을 10,000명이나 거느렸다는 말인가? 서남해를 지배했다는 수달([[능창]])이 동원한 사병의 규모조차 겨우 500명에 불과했으며 [[규슈]]지역을 잔뜩 헤집어놓은 [[현춘]]의 [[신라구]] 해적함대가 2,500명[* 사료상 기록으로 현춘의 해적함대는 왕명에 의해 조직된 것이므로 사병이 아니라 그냥 신라 해군이었을 가능성도 많다. 근대 이전에는 사략함대와 해군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병집단인 [[태조(조선)|이성계]]의 가별초가 1,000명~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계는 1361년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친병 1,500명을 동원했고, 1362년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친병 2,000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기황후]]가 보낸 최유의 병력 10,000명을 토벌하는데 친병 1,000명을, 1370년 [[제1차 요동정벌]]때는 친병 1,6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전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른 수 많은 전투 중 한번도 사병을 2,000명 이상 동원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별초의 병력을 1,000~2,000명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로 [[조사의의 난]] 때는 반란군이 10,000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태조(조선)|이성계]]는 일개 고려의 지방호족이 아니라 조선의 [[태상왕]]이라 사병이 아닌 군대를 동원할 권력이 있었다.] 그나마 이성계는 동북면([[함경도]])을 영주나 다름없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병도 아닌 [[후고구려]]군의 나주 공략시 병력이 2,500명, [[후백제]]군의 나주 탈환전(910년)시 병력이 3,000명이다.[* 후백제와 고려의 병력은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점점 늘어나 920년 이후에는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청해진을 설치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던 사병의 수가 10,000명을 족히 넘었다면 장보고가 임금과도 견줄 수 있는 대호족 출신이란 말인데, 정작 사서인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고향과 아버지 및 조상에 대해 알 수 없다고 기록한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장보고와 정연은 모두 신라 사람이지만,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오히려 [[삼국유사]](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미천한 신분이라며 반대했다는 기록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영향으로 10,000명의 병사들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c7e0585c1f9949ea4b09289519ef7a3.jpg|width=100%]]|| ||해적들을 소탕한 장보고의 함대[* 1975년에 박광진이 그린 장보고의 해상 활동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물론 그림 속의 갑주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으로 고증에 맞지 않다.]|| 아무튼 해로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원래의 취지였던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까지 발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다. 83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 [[천태종]] 승려로, 일본에서는 지가쿠 다이시(慈覺大師)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일본인이 신라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 김정남(金正南), 박정장(朴正長) 등을 고용하여 배마다 배치해 동행시킬 정도로 신라의 해상 영향력이 커져 있었다. 이 시기 중국 해안가도 대부분 신라인 집단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엔닌은 당나라 활동 중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 장보고는 [[산둥 반도]]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고 이 곳에서 신라, 일본 등에서 건너온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엔닌이 있다.] 이 적산법화원은 [[장영]] 등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맡았다고 전한다. 현대 [[코리아타운]]의 [[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셈. 적산법화원은 [[무종(당)|당무종]]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되어 중국에 남아 있다. 한편 장보고는 [[청해진]]과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법화원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어떤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 사회 구성원은 거의 바다와 관계가 깊은 직업이었고, 당시 바닷사람과 관세음보살 신앙의 관계는 [[삼국유사]] 민장사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가 《[[동방견문록]]》,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생각한다는 책인데, 어디까지나 일본과 라이샤워 교수 본인의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고,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 교관 선단의 우두머리.]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 지금도 중국 산동성의 장보고와 관련된 유명 관광지이다.]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 동해안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동쪽의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기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규슈]]의 [[다자이후]][* 고대 일본에서는 제2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후쿠오카]] 근교의 관광지로 유명하다.]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장보고의 난과 비극적인 최후 ===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희강왕|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천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서라벌|국도(國都)]]에 들어가 [[민애왕|반란자]]를 베고, [[신무왕|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 >'''《번천문집》 권6, 장보고⋅정년전''' ----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장보고(張寶高)가 [[신무왕|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로 삼았다."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사년(839년) 이렇게 청해진이라는 신라 중앙과는 유리된 특수한 환경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경험이 쌓인 정예병력들과 막대한 재력을 다시 군사력에 투자하며 힘을 기르던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기에 이르며, 더이상 중앙조정에서도 무시가 힘든 독립 군벌이 된 상황이었다. 결국 838년 2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온 [[신무왕|김우징]]을 도와주기로 약속하고 군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장보고를 찾아온 것을 장보고가 맞이하여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에서 반란[* 김명이 희강왕을 주살하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것을 가리킨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보고는 '네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정년에게 5천 군사를 맡겨[* 청해진을 창설할 때 군사가 1만 명이었다고 했으니 거의 '''자기 병력의 절반'''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 지금의 [[남원시]]인 남원경까지 쳐들어갔다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이후 5개월이 지난 838년 12월에 다시 출격해 달벌([[대구광역시]])에서 이찬 김흔,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부군 10만을 상대로 한 [[달벌대전]]에서도 대승을 거둬 병력의 절반 이상을 괴멸시키는 기염을 토했고, 이 소식을 듣고 별궁으로 도망친 [[민애왕]]을 추격해 시해하고는 우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렇게 옹립된 [[신무왕]] 김우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 장군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기는 했지만,[* 이런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 같은 직책들은 장보고 이전 신라에는 없었던 관직이다. 낮은 신분 출신 장보고에게 [[골품제]]의 규정을 초월하는 포상을 내린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삼국사절요에서는 삼국사에 의하면 장보고를 상신 즉 상대등에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무왕 초기에는 상대등 혹은 그에 가까운 직위를 장보고에게 내렸는데 이후 다른 명예직으로 돌리면서 골품제에 따른 논공행상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딸|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 본인의 딸과 혼인하겠다는, 다시 말해 사돈이 되겠다는 것을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버젓이 실려 있다. 이는 신무왕으로서는 장보고와 사돈관계가 되어 연결을 단단히 함으로써 장보고라는 거대 세력의 힘을 앞세워 왕권을 높일수 있었고 장보고 또한 왕가 일원이 되고 왕가를 우군으로 삼아 청해진을 중심으로 친청해진 정책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윈-윈 약속이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그 신무왕이 약속을 지키기 전에 금방 승하하여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 후임인 [[문성왕]]에게 앞서 신무왕과 했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8년(서기 846년)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 >이 무렵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 >'''《삼국유사》 기이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원래 문성왕도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 장보고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을 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 첫째 왕비로 들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둘째 왕비로 들이겠다고 하는데도 반대했다.]로 단념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미묘하게 다른데, 삼국사기상으로는 이 소식을 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상으로는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고 했다고 한다. 즉 삼국유사의 장보고는 반란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세력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조정은 [[염장(통일신라)|염장]]을 장보고에 보냈고, 염장은 장보고에게 가서 '제가 왕에게 원망이 있는데 당신에게 의지해 살려고 도망쳐 왔다.'고 전하게 했다. 장보고는 처음에는 '너희들 때문에 내 딸이 왕비가 못 됐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와?' 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염장은 '그건 백관들이 간언한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라며 기어이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평소 [[협객]]을 아꼈던 탓에 염장을 협객이라며 반겼지만, 그날 염장을 환영하기 위해서 열었던 연회에서 장보고가 잔뜩 술에 취한 사이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취해 있던 그의 목을 베어 암살해버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경위로 최후를 맞은 인물로는 훗날 [[고려]]의 [[무신정권]]을 열어젖힌 [[이의방]]이 있다.] 이렇게 장보고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장보고의 최후와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제11권 [[닌묘 덴노]](仁明天皇) 조에서도 어느 정도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장보고 사후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신라)|이창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살짝 다른 부분인데[* 물 건너가 소식으로 전해진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정사보다 낮을 수도 있지만, 반면 《속일본후기》는 장보고가 죽고 불과 몇십 년도 지나지 않은 9세기에 편찬된 기록인 만큼 먼 훗날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상황을 보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보고 암살 사건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살짝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장보고 휘하의 세력은 염장이 대신 차지하려 한 듯 보인다. 속일본후기의 해당 기록에서도 장보고의 부하가 일본에 가지고 간 물건들을 다시 찾아가려고 하는 상황을 다룬 기사다. 장보고의 사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에 기술된 기록과 일본 측이 작성한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장보고의 사망 시점에 관해서도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 측 기록을 참고해 적었을 《삼국사기》에는 846년(문성왕 8년)에 암살당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841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어 삼국사기에서 나온 시기보다 5년 앞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사국인 신라의 기록을 참고했을 삼국사기의 정확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장보고 관련 기록 중 하나인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845년 7월 9일, 엔닌은 중국에서 청해진 병마사 직위에 있던 최훈과 만났는데 이 때 최훈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유와 관련해 "신라의 국난을 피해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직접 최훈과 만나서 그에게 직접 듣고 이를 적었을 테니 청해진 병마사가 나라에서 뛰쳐 나올 정도로 신라 내에서 큰 변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청해진 병마사가 도주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사실상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중앙 관군에 의해 진압된 것 밖에는 생각할 게 없는데 이를 근거로 841년에 청해진에서 반란이 터졌고 이 때 장보고가 암살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에 속일본후기의 기록과 아귀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고 일본 측의 기록이라 해도 '''당대에 지어진 것'''이어서 신뢰도가 높다고 볼 여지도 있다는 점이 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예전 그것도 고구려의 케이스이긴 하지만 [[안장왕]]의 암살과 [[안원왕]] 이후 벌어진 고구려 왕실의 혼란상이 《일본서기》에 전해오는데 학계에선 안원왕 이후 고구려의 왕권이 떨어지고 혼란이 가중되는 듯한 정황 탓에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 사후 영향 === 한편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은 장보고 사후에 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없어지진 않았더라도 장보고 암살 당시 상당히 혼란에 빠졌던 것은 일본 측 기록 속일본후기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 어려계(於呂系) 등 여러 사람이 일본에 귀화하면서 '우리는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어'''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증언했으며, 그 외에 장보고가 죽은 뒤에도 자손들이 그 곳에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속일본후기 권11, 인명 천황 조와 9년(842) 1월 10일] >13년(서기 851년)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제11권 신라 본기 제11 문성왕''' 끝내 851년 신라 조정에서는 '''청해진을 아예 완전히 없애버렸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을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청해진은 사라졌지만 장보고가 남긴 영향은 그대로 남았다. 학계에서는 장보고와 청해진이 후대 한국사에 남긴 영향으로 [[선종(불교)|선종]]의 국내 확산과 중국 [[도자기]] 기술의 도입을 들고 있다. 우선 장보고가 교역했던 중국 [[저장 성]] 월주(越州) 지역의 자기인 월주요(越州窯)가 신라 시대 국내에서 제작된 흔적인 가마 터가 청해진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전남 서남해 강진, 해남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월주요 가마 터가 발견된 것에 대해 당시 중국 월주요의 제작 기술을 신라 국내에 도입해서 그것을 자체생산해 다시 수출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이 장보고였다는 설명이 따른다. 이때 국내에 도입된 월주요 기술이 훗날 [[고려청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http://www.wando.go.kr/changpogo/changpogo/activity|#]][[http://www.gjon.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9563|#]] 또 장보고 사후에도 서남해 지역은 당으로 가는 승려들의 출발지이자 도착 지점으로 쓰였는데, 서남해 지역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당시 장보고가 해적들을 평정하여 선종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하러 가는 항로를 보호해줌으로써 선종 사상의 자유로운 전파와 세력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10261746571&code=960206|#]][[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006|#]] 훗날 신라 말기에 일어난 호족들이 대부분 선종 승려들로부터 사상적인 배경을 얻었고 끝내는 호족 정권에 의해 신라가 무너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보고는 후대의 한국 역사의 흐름에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공헌한 셈이다. == 평가 == 당대에도 한중일 삼국에 영웅으로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자신의 문집 《번천문집》 중에서 따로 장보고와 정연에 대한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302&tabId=01&levelId=hm_034_0040|기록을 남겼고]], 《[[신당서]]》 편찬자 중 한 명인 송기 역시 [[당나라]]에는 [[곽자의]]와 장보고가 있었다는 식으로 자타공인 중국의 [[충신]]이자 [[명장]]인 [[곽자의]]와 비교하면서까지 장보고를 높이 띄워주었다. 거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을 평하는 과정에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용기도 드높고 뛰어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김유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했으며,[[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43_0060_0120|#]] 장보고 열전은 일종의 '반역자 열전'인 열전 9권이 아니라 ''''명장''' 열전'인 열전 4권에 실었다. 즉 '''장보고는 오래 전부터 아주 훌륭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순신]]은 [[박정희]]가 띄웠으며 [[원균]]은 과하게 폄하되었다는 설이 있다. 박정희는 이순신을 어느 정도 띄웠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원래 띄워져 있었던 인물이다. 특히 이미 조선시대부터 충무공으로 시호가 내려졌으니 그 영웅성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장보고가 [[충신]]으로 발돋움할 수 있던 것은 실은 [[고려]] 왕조가 아닌 [[조선]] 왕조의 공이 컸다. [[고려]] 왕조는 장보고를 상당한 무골이자 삼각 무역을 주도한 인물로 치켜세우며 명장 열전에까지 포함시키는 등 호평을 내렸지만 그를 충신이라고까지 극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장보고의 기록이 남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적어도 장보고를 대놓고 반역자라고 기록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삼국사기의 장보고 열전 사론에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신경 썼다'라고 나와 있다. 그 사서에서도 일종의 반역 열전이 아닌 명장 열전에 실린 것을 보면 최소한 역적으로 보진 않았던 게 명백하다.] 반면 [[조선]]의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의 기록에서는 장보고가 반란을 진압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충신이라고까지 치켜세우고 있다.[* [[신무왕]]의 재평가도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미 신라 하대기 최고의 [[성군]]으로 꼽았다.] 이것은 [[신무왕]]을 반역자라고 평했던 [[삼국사기]]의 평이 결정타인데, [[고려]] 왕조의 경우는 실은 청해진보단 혈구진 문제가 컸다. 혈구진을 설치한 게 문성왕과 김양이기 때문. 정작 [[조선]] 왕조의 경우는 혈구진이 있는 강화 지역이 아닌 [[전라도]] [[전주시|전주]]를 발상지로 삼아 일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기존의 기록을 고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이자 국학자였던 [[안정복]]도 [[동국통감]]에 실린 최보의 사론을 빌어, 저서 [[동사강목]]에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다, ''''도와주면 딸을 왕비로 맞겠다.'고 약속해 놓고''' 입 싹 닦았으니 당연히 열 받지 않겠냐.'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조한 공신인 만큼 죄를 지었어도 공을 감안하면 죽일 것까지는 없었는데, 함부로 죽였다고 장보고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데 일조했던 [[김양]]이 장보고가 죽을 때 한 마디 변호하는 말도 해 주지 않았다며 장보고가 자기와 세력이나 공적이 대등한 것을 내심 꺼려서 그런 것 아니냐고, 어떻게 해석하면 장보고의 죽음에 김양이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장보고 사후 문성왕은 김양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물론 현재까지는 그 직접적인 배후가 염장이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은 편. 다만 서로 이해 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서남계 호족이자 지방 세력가인 염장과 그 부하들과 경주 귀족인 김양과 그 귀족들이 모종의 결탁으로 죽였다는 카더라도 있다.[* 드라마 해신에서는 이 설을 반영해서 신무왕은 물론 장보고마저 김양의 부추김을 받은 염장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 김양은 장보고가 죽자 군사를 풀어 청해진을 없애고 염장도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염장은 청해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고, 김양은 신라 고유의 골품제를 사수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1년도 못 돼서 승하한 신무왕조차 사실은 김양에 의해 시해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으니. 그러나 신무왕은 정황상 종기로 인해 승하했을 개연성이 높고 김양이 장보고를 암살했다는 것도 암살 사건 직후 시중 지위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관련이 없을 가능성도 꽤 있긴 하다.[* 더욱이 부각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유독 문성왕 때 반란이 들끓었는데 이것조차 반란을 빌미로 한 문성왕의 숙청극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동국통감의 시각을 이어받아 신라를 대표할 대표적인 인물이자 최후의 인물로 장보고와 신무왕을 부각시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시각대로 장보고를 신라 안정의 위협으로 보는 시각도 꽤 있는 편이다.[* 장보고를 호족의 선구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시기상으로만 보면 장보고가 죽은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각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던 이들이 성주, 장군 등으로 스스로를 칭하며 독자적 루트를 밟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 말도 틀린 평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고려 왕조의 경우는 전 왕조의 인물들에 대해서 전 왕조와 차별화를 위해 크게 높은 평을 하지 않고 조선의 경우는 고려와 비교하면 고려 이전 왕조에 대해 나름 자유로운 평을 할 수 있기에 그런 평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고려에서도 장보고를 명장으로 평하는 등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 환빠류의 고구려 정통론자들은 장보고가 고구려계이자 산동 지방을 장악했던 [[이정기]]의 후손인 이사도의 거사를 망친 김춘추급의 친당파라고 까기도 했다(...). 사실 그 이사도 또한 그다지 유민의식은 없었고 그냥 자신의 영역을 지키다 당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저 반란을 일으켰던 것 뿐이다. 애초에 그때 장보고는 그렇게 계급이 높은 장교도 아니었으니 반란진압의 주동자도 아니었다. == 대중매체에서 == === [[드라마]] === * 2000년 [[KBS 1TV]]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1~2세대 앞 시대의 인물이므로 대사로 언급되는 정도이다. [[왕건(태조 왕건)|왕건]]이 장보고의 청해진 시절에 구축된 [[인맥]]을 통해 자기의 사촌 동생과 측근들을 보내 [[견훤(태조 왕건)|견훤]]의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나주 [[호족(한국사)|호족]] 오다련과 종례를 설득하여 [[나주 공방전]]에 뛰어든다. 드라마 제1화에서도 왕건과 그의 아버지 [[왕륭(태조 왕건)|왕륭]]이 장보고를 [[영웅]]으로 은근 호평하는 모습이 나오며 나주 호족들은 스스로를 장보고와 옛 청해진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진다는 설정이 나온다. 왕건의 집안 역시 해상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운 호족 집안이므로 이런 식으로 장보고와 왕건을 연결하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umb.mtstarnews.com/2005010710581700802_1.jpg|width=100%]]}}} || * 2004년 [[KBS 2TV]] HD 특별기획드라마 《[[해신(드라마)|해신]]》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연기했다. 최수종 스타일의 [[주인공]]을 그대로 끌어왔으며 장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장보고에 비해 최수종 본인은 보통 키 정도이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최수종 본인을 비롯한 [[수애]], [[송일국]], [[채시라]] 등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으로 상쇄하며 준수한 [[시청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닐슨미디어리서치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012299|평균 시청률은 28.5%였고 마지막회 시청률은 30.0%]][* TNS미디어코리아측 조사는 닐슨보다 높다.[[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js3491&folder=88&list_id=4826940|평균 시청률이 30.8%, 마지막회 시청률이 31.9%.]]]를 기록한 상당히 [[인기]]있는 작품이었다. 다만 실제 장보고는 60대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극중 최수종을 죽을 때까지 검은머리를 유지한다. * 2005년 [[EBS]] 역사 드라마 <[[점프(EBS)|점프]]>에서는 이 인물을 지우려다가 저지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장보고 역은 배우 [[주상욱]]이 연기했다. * 2020년 KBS 라디오 <[[와이파이 한국인]]>에서 첫번째 이야기로 장보고의 생애를 다룬다. 성우는 [[이명호(KBS 성우)|이명호]]. 추가된 설정(출신 성분)으로 백제계 신라인이라는 게 있고(완도 출신), 자수성가해 부모님과 재회한 게 있다. 여기서도 [[정연]]과 절친한 사이로 나타난다. [[흥덕왕]]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난 뒤 장사만 하려고 정치 개입을 꺼리는 성향을 보이지만[* 왕위계승분쟁이 시작된 이후 습관처럼 말한다. 결국 지키지 못하지만.], [[신무왕]]을 옹립하고 중앙정계와 연을 만드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딸(본인과 동일한 성우)을 왕후로 만드려다 역사처럼 [[염장(통일신라)|염장]]에게 암살당한다. (오리지널로 몸싸움 내용 추가, 호신용 칼을 뺏기고 암살당한다.) 많이 취한 상태에서 [[염장(통일신라)|염장]]의 본심을 뒤늦게 알고 최후를 맞이하는데 상당히 비참하게 묘사된다.사후에는 [[청해진]] 폐지와 벽골제 이주가 언급되었다.반년 기준 [[와이파이 한국인]] 최다 화수의 인물이였다가 [[김유신]]의 이야기가 할아버지, 아버지, 고구려-수, 당 전쟁 이야기가 얽혀 나오긴 했지만 80화를 넘어서자 최다 화수 인물 2위로 머문다. (원 69화, 약 70화.) === [[애니메이션]] === * 애니메이션 《[[초롱이의 옛날여행]]》([[1993년]]) 에피중에서도 6화에서는 장보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성우 [[김환진]]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위인전 애니메이션답게 무난한 내용이다. * 애니메이션 《청해진 호랑이 : 해상왕 장보고》([[1997년]])는 70분 정도 분량의 TV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며, 국제방송교류재단과 동원그룹 계열사이던 에스미디컴이 공동제작하여 [[아리랑TV]]에서 방영됐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장보고의 생애를 다루었다. 작중에 등장하는 장보고는 어린 시절에 돌고래를 타고 성인이 되어선 짐승가죽을 두르고 다닌다. 여기까지야 작중 연출이라고 볼 수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물론 '''[[중동]]에 [[아프리카]]까지 무역선을 잇는다는 내용은 양반이고 작중에서 총과 포탄이 나오는 등''' 역사 왜곡을 넘어 국뽕 판타지가 따로 없다. 실제 역사에서 장보고를 암살했던 염장은 장보고의 부하가 아니라 그냥 해적으로 나와서 장보고를 총으로 쏴 죽이지만 결국 자신도 죽는 역할로 등장했다. 해당 애니는 계림출판사에서 'TV 애니메이션 소설' 레이블로 나오기도 했고, 비디오 테이프까지 나왔지만 현재 레어템이다. 장보고의 성우는 궁복으로 불릴 때는 [[강수진(KBS 성우)|강수진]], 장보고로 개명했을 때는 [[김관철(성우)|김관철]]이 각각 담당했다. * 애니메이션 《모험왕 장보고》([[2001년]])는 [[http://www.kuvun.co/video/MaoXianWangZhangBaoGao/|TV용 애니메이션으로 본래]] [[https://www.google.com/search?q=%EB%AA%A8%ED%97%98%EC%99%95+%EC%9E%A5%EB%B3%B4%EA%B3%A0&client=ms-android-samsung-ss&prmd=ivn&sxsrf=ALiCzsZ-ZbxsMF-OFxIGS-A96jN6SiUTvg:1669537021374&source=lnms&sa=X&ved=2ahUKEwj0oeSI9s37AhXbFIgKHeODAM4Q_AUoAHoECAwQAA&biw=412&bih=708&dpr=2.63#ip=1|장편으로 제작되었는데]] TV 에서 방영할때는 에피소드를 5개로 쪼개어 방영하였다.현재는 뒤이어 방영한 [[바다의 전설 장보고]]에 밀려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보고의 일생을 다룬 [[전기물]]으로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캐릭터들은 전부 2등신이며 분위기는 가볍고 코믹한 편이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내레이션도 깔려있는 등 교육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동용이라고 해도 염장에게 암살당하는 것도 간접적으로나마 언급된다. * 애니메이션 《[[바다의 전설 장보고]]》([[2002년]])는 [[https://youtu.be/Mks-PfXlSB4|비록 역사물은 아니지만 액션물로]] 장보고에서 모티브를 따온 주인공인 [[장보고(바다의 전설 장보고)]]가 출연한다.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작중의 설정상에 따르면 황금배의 전 주인인 위대한 제독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유령섬 에피소드에서 장로가 전설의 제독의 초상화를 보여주는데 바로 장보고의 초상화였다.] * [[원피스(만화)|원피스]]의 표절작, 《[[와피스]]》의 주인공, 짱피의 조상으로 언급된다. === [[소설]] === * 오세영의 소설 《[[만파식적]]》에서는 조연으로 등장, 민애왕 시기를 배경이로 역사대로 반정을 돕지만, [[김우징]] 측을 신뢰하지 않아서 사로잡힌 주인공을 풀어주면서[* 이 주인공은 무열왕계 후손이다.] 보내어 민애왕을 빼돌려 청해진에서 보호하여 보험으로 삼으려 하지만, 주인공이 장보고의 부하들에게 [[민애왕]]을 넘기고 안심하고 돌아선 사이 다른 자객이 민애왕을 죽여서 실패한다.[* 주인공은 이 자객에게 한번 패배한 적이 있고, 이 때 재대결하여 승리하지만 민애왕도 이미 죽었고 주인공 자신도 사적인 감정은 넘었기에 자객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준다.] * [[간절히]] 작가의 [[후삼국시대]] 배경 [[대체역사]] 웹소설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에서 직접적으로 출현하지 않지만 언급은 된다. 작중 주인공의 활약으로 고려 왕실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의 아내이자 서해용왕의 딸, 즉 '용녀'로 알려졌던 [[저민의]]가 장보고의 딸이었음이 밝혀진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서해용왕의 정체는 장보고가 되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고려 왕실은 용녀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용손]]이라며 대대로 [[정통성]]을 내세웠던 만큼 나름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는 작중에서의 이야기이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보진 않는다. === [[게임]] === * 트리거소프트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장보고전]]》에서는 [[청해진]]군의 영웅(수비장 스킨)으로 등장한다. 스토리 자체가 가상 스토리라서 시대 배경과 청해진의 수장이라는 점 말고는 이름만 따 온 수준. * 국산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해상왕 장보고]]》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워크래프트 3]]의 아류에 가까운 행사흥보용 게임이었기에 별다른 반향은 이끌어내지 못하고 묻혔다. * 코에이의 MMORPG인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PvE 컨텐츠인 가나돌에서 대전 상대인 고대 가나돌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여담 == * '''"[[고려청자]]를 탄생시킨 인물이 장보고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고려청자는 이름대로 고려시대에 주로 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서남해 무역집단이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당나라의 도자기를 꾸준히 수입했고, 한동안은 중국 수입품으로 수요를 감당했지만 이에 자극을 받아 [[강진군]], [[부안군]] 지역 등의 가마터에서 자체제작 청자의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이 시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808162|기사1]][[https://www.joongang.co.kr/article/3808160|기사2]] *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는 장보고가 활동한 재당 신라인의 중심이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다. 웨이하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당나라 당시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고 [[무종(당)|당무종]] 시대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파괴되었다가 현대에 복원된 곳이다. * [[일본]] [[교토]] 적산선원(赤山禅院, 세키잔젠인)에 [[활]]을 든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교토 중심부에서 동북 쪽으로 떨어진 사쿄 구에 있는데 교토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슈가쿠인리큐(修学院離宮) 근처에 있다. * [[일본]] [[교토]] [[시가현]] 히에이 산에는 [[엔랴쿠지]](延曆寺. 연력사)에는 청해진 대사 장보고 비석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2002년에 [[완도군]]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 엔랴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몽땅 불에 타 버린 적이 있어서 한국의 [[불국사]] 급으로 일본에서는 유명하다. * 교토 바로 옆인 일본 [[시가현]] [[오츠시]]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 신라묘진)을 모시고 있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다. 장보고에게 당나라 [[여행]] 중 많은 도움을 받았던 승려 [[엔닌]]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 남해안을 지나던 중 바람이 불지 않아[* 범선 시대에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음은 [[사망플래그]]나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유령선]] 전설은 대부분 이것 때문에 생겼다.] 위기에 빠졌던 엔닌 일행이 현지 토지신에 빌자 곧 서풍이 불었고 이 신라 신을 일본에 돌아온 뒤 모신 것이다. 이 곳에서 모시는 [[일본의 국보]]이자 높이는 78cm 정도인 목조 신라명신좌상[* [[https://japanese.joins.com/article/885/107885.html|가끔 공개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공개 유물이다.]]]은 엔닌에게 큰 도움을 줬던 장보고의 실제 모습을 본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당대의 초상이 남아있는 셈이다. *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인물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新羅三郎源義光, 신라삼랑원의광)와 그의 후손인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다이묘]]인 [[다케다 신겐]] 가문이 신라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2003년 [[KBS]] <[[역사스페셜]]> 장보고 특집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요시미츠가 신라사부로라는 이름을 쓴 것은 오미 신라묘진(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렀기 때문에 붙은 것이지 요시미츠 밎 다케다 [[가문]] 자체와 한국사의 신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예를 들어 요시미츠의 큰형 요시이에는 하치만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렀기에 하치만타로, 둘째 형 요시츠나는 교토 카모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러 카모지로로 불렸다. 통칭인 신라사부로를 마치 [[성씨]]인 것처럼 해석해 일어난 일이었다. * 위의 신라사부로와 비슷한 사례로, [[전국시대(일본)]]에 [[홋카이도]] 남부를 지배한 다이묘 [[마츠마에]] 가문[* 원래 가키자키(蠣崎) 가문이었다가 5대 [[마츠마에 요시히로]] 때 마츠마에로 바꾸었다.]이 자기 가문의 역사와 가계도를 편찬한 기록물이 [[https://ja.wikipedia.org/wiki/%E6%96%B0%E7%BE%85%E4%B9%8B%E8%A8%98%E9%8C%B2|신라지기록(新羅之記録)]]이라서, 신라인의 후예가 머나먼 홋카이도까지 진출했다는 식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이 역시 위에서 말한 신라선신당과의 인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한국사의 신라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 은근히 신라 말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충신인 [[최치원]]과 이미지가 많이 겹친다. 신라 내에서 중앙에서 소외되었던 출신에 당나라에서 경력을 쌓아 귀국해 입지를 다진 점, 비극적인 최후 등등. 다만 문(文)적인 이미지와 무(武)적인 이미지가 확연히 갈리는 데다가 장보고는 이미 당나라에 있을때부터 나름대로 고위 장교직에까지 오르고 당, 신라, 일본에까지 명성이 천하에 널리퍼진 거물 급이었다는 점에선 확실히 차이가 있다. * [[대한민국 해군]]의 본격적인 첫 잠수함 SS-061 장보고함은 그의 함자를 따서 명명되었다.[* 그보다 이전에는 특수 임무용 소형 잠수정만이 있었다.] * 동일 규격 형식의 함종은 1번함의 이름에 따라 지칭되는 관례에 따라, 장보고함 이후 같은 모델의 잠수함들은 통틀어 "[[장보고급 잠수함]]"이라 일컫는다. 이 경우 1번함을 "네임 쉽(name ship)"이라 한다. 또한 장보고함은 대한민국의 모든 잠수함[* 이전에 있었던 [[돌고래급 잠수정]]같은 소형 잠수정 제외] 중 1번함이므로, 건조 사업 시작시 [[손원일급 잠수함]] 사업은, 장보고-II(KSS-II),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사업은 장보고-III(KSS-III) 사업으로 명명되었다. * 2014년 완공된 우리나라의 제2 [[남극]] 과학 기지의 이름도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로 결정되었다. * 청해진이 있었던 장좌리 장도는 삼국사기 제사지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름이 올라 있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 새벽에 장도에 있는 사당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는데, 사당에는 원래 고려 시대 [[삼별초]]의 장수로 알려진 송징] 장군이라는 인물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여기에 정년 장군과 혜일 대사[* 고려 시대의 승려라고 한다.]를 합사해 신령 세 위(位)를 모셨지만, 1982년부터 장보고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 뜨기 전 새벽부터 마을 회관에 장좌리 주민들이 모여서 장도로 향하는데, 그 시간에는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바닷물이 빠져서 뭍이 드러나 섬까지 걸어들어 갈 수 있고, 제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다시 바닷물이 차 올라 있어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어 있다. 지금은 물론 장좌리와 장도 사이에 나무 다리가 놓여 있어서 별 의미없게 되었다. 장보고를 제사하게 되면서 원래 모시던 송징이라는 인물은 거의 잊혀져 버렸고 이를 가리켜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출처 : 윤용혁 <삼별초 - 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다만 장보고와 함께했던 정년은 예전부터 송징 옆에 모신 것을 보면 완도 주민들도 이미 그 전부터 장보고를 나름 의식하고는 있었던 셈. 역적으로 죽은 장보고를 버젓이 사당에 모시고 제사하기에는 그들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9/2017041900007.html|#]] 설득 끝에 장도 주민들은 송징이 장보고의 별호가 아니겠느냐라고 타협하기도 했다. * 신라 하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한 가지 거대한 떡밥이 있는데 훗날 [[후고구려]]를 건국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789|궁예의 생모가 장보고의 딸]][* [[신무왕]] 또는 [[문성왕]]의 둘째 왕비가 될 뻔했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기사를 끝으로 사서에서 사라진다.]이라는 것. 그 설이 사실이라면 궁예는 장보고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이 설의 요지는 바로 궁예와 장보고가 모두 궁(弓)씨로 추정되는 것에 기원한다. 이 설을 받아들일 경우 궁예가 신라에서 박해받아 도망치는 이유를 좀더 사실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헌안왕과 [[장보고의 딸]] 사이에서 궁예가 태어났지만 846년 장보고가 반역 죄목으로 염장에게 암살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궁예]]는 845년생이 된다.[* 모든 역사 기록에서 궁예의 사망 시점을 918년으로 잡고 있는데 845년생이 맞다면 73세가 되므로 그렇게 나이가 많아지는 편도 아니다.] 마침 그의 생모로 지목되는 장보고의 친딸이 [[문성왕]]의 왕비로 거론된 시점도 845년.[* 둘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문성왕의 차비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신무왕의 이복동생이었던 [[헌안왕|김의정]]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 장보고가 현대에 들어 부각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2가지 설을 제기한다.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의도적으로 장보고를 띄웠다는 설을 제기했다. 애초에 집권 [[민주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대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손잡고 했던 밀수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뒤통수를 맞자 해상 무역과 비운의 기업인 [[이미지]]가 있는 장보고를 주목하여 장보고 기념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즉, 장보고는 삼성그룹이 의도적으로 거물로 포장시킨 인물이라는 것. 반면 [[중앙일보]]에서는 [[http://m.news.nate.com/view/20091017n00569|김대중 정부의 지지를 받아 부각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소설과 드라마 해신을 들었다. 즉, 장보고의 행적이 아래와 같이 김대중 대통령과 겹친다는 것. 강준만의 가설에 따른다면 삼성그룹은 2~3번, 중앙일보의 가설에 따른다면 김대중 정부는 1~3번을 주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드라마 해신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방영되었고 당시 해군 출신인 [[윤광웅]] 국방장관이 전군에 시청하도록 했으니 [[김대중 정부]]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을 집필한 [[최인호(작가)|최인호]]는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작가]]로 특별히 김대중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정치]]적 목적을 가진 드라마라면 아무리 악역이라도 주요 배역인 염문 역에 당시 한나라당에서 출마까지 한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을 캐스팅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 이미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장보고는 [[위인전]]과 국사 [[교과서]]의 중요부를 당당히 차지하였으며 2000년대는 [[불멸의 이순신]] 외에도 [[후삼국시대]] 시절의 [[왕건]], [[견훤]], [[궁예]],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성왕|주몽]], [[연개소문]] 등 그동안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던 비(非) [[조선시대]] 인물들을 [[방송국]]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던 시절이었다. 유명한 이런 사람들을 다 다룬 다음에 드라마 [[해신(드라마)|해신]]이 나왔는데 실제로 드라마가 나온 순서는 태조 왕건(2000), 해신(2004), 불멸의 이순신(2004), 주몽(2006), 연개소문(2006), 대조영(2007) 순으로 해신이 앞서 나왔다. 더구나 장엄한 사극을 원하는 방송사들에게 [[대륙]]과 [[바다]]와 [[신분]]을 실제로 넘나들었던 장보고는 스케일이나 인생 편력에서 구미가 당기는 소재. == 관련 단체 == * 장보고기념사업회: 2013년 설립. *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1999년 설립, 2012년 해산. == 관련 문서 == * [[엔닌]]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둘러보기 == [include(틀:삼국사기)]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각주] [[분류:장보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