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0년대 (문단 편집) === 방송 === 1969년 [[한국방송공사|KBS]], [[동양방송|TBC]], [[MBC]] 3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했다. TV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의 지위를 추월한 것도 이 시기였다. 흑백 텔레비전은 대중문화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는데, 1960년대만 해도 극소수에 불과한 TV 수상기의 보급은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1967~68년 당시 10만 대밖에 안 된 TV는 1972년 100만 대, 1975년 200만 대, 1978년 400만 대, 1980년 660만 대로 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TV의 광속보급은 전자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경제정책과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대중의 여가생활 및 오락에 대한 요구가 결합됐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를 풍미한 흑백 TV는 국민들의 관심과 여가를 묶어 놓은 오락매체로서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중문화의 총아가 됐다. TV는 대중들 입장에선 신문이나 대한뉴스 류의 뉴스영화보다 빠른 정보전달 매체이자 사회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오락매체로서 사회/문화생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으로는 대중조작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정부나 자본이 방송매체를 장악하면 자신들의 주장과 이해를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특성을 지니는데, 1970년대 방송매체는 후자가 더 강해 정부의 정책 홍보수단이자 기업들의 선전장이 됐다. 정부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방송도 더 엄격히 통제와 규제를 가했는데, 방송은 방송법과 전파관리법, 공연법 등 법적인 통제를 받았으나 인사관리 및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문공부 지침, 기관원 상주 등과 같은 직접적 규제가 강했다. 정부는 KBS-TV의 <총리와의 대화>나 <정부와의 대화> 같은 정책홍보 프로그램이나 '목적극'이라 하는 반공/경제성장 드라마 등을 만들도록 하여 시청자들에게 반공/반북의식과 성장제일주의를 세뇌시키도록 했다. 이 시기를 빛낸 반공드라마론 KBS-TV의 <실화극장>과 <조총련>, <전우>, TBC-TV의 <추적>, MBC-TV의 <113 수사본부> 등이 있고, 관변 드라마로는 KBS의 <[[꽃피는 팔도강산]]>이 있다. 또 1976년 4월 문공부가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극'을 편성토록 했고, 1978년 '프로그램지침'을 통해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극'을 새마을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도록 했다. 대표적인 민족사관 정립극으론 TBC의 <풍운백년>과 MBC의 <예성강>, <사미인곡> 등이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정부 논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야 했던 뉴스와 툭하면 저질 시비에 시달리던 코미디에 비해 그나마 자유로운 창작이 허용되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최고의 텔레비전 컨텐츠였다.[* 물론 드라마도 당국에서 "사회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규정할 경우(...) 조기종영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1978년 MBC 주말연속극 [[청춘의 덫(MBC)|청춘의 덫]]이 불륜을 소재로 다뤘다는 이유로 조기종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99년에 리메이크된다.] 1970년 TBC 일일연속극 [[아씨(동양방송)|아씨]]가 대히트하면서 각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연속극을 편성했고 하루에 방송사당 4~5편의 드라마가 편성되기도 했다. <아빠>와 <갈대>, <안녕>, <여로> 등 멜로드라마도 양산됐다. 70년대에는 탤런트 전속제가 매우 강하게 적용되었으며, 1970년대 초까지 TV 드라마의 주축이던 연극/영화배우들은 [[장민호(배우)|장민호]], 정민, [[강계식]], [[주선태]], [[정애란]], [[한은진]], [[김희갑]], 지계순 등 일부를 제외하고 본업으로 돌아갔고, 1972년에는 한국영화인협회가 [[최무룡]], [[신성일]], [[황해(배우)|황해]], [[허장강]], [[고은아]], [[윤정희]] 등 톱스타급 13명에 대해 TV 드라마 출연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204050023910803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2-04-05&officeId=00023&pageNo=8&printNo=15689&publishType=00010|금지한 바 있었다]]. [[김자옥]]처럼 [[KBS]]와 [[MBC]]를 넘나들며 출연하는 경우나 [[박근형]], [[김영애]]처럼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뒤 다른 방송사로 컴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보통 한 방송사와 전속 출연 계약을 맺고 해당 방송사의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했다. [[2세대 여배우 신트로이카|70년대 충무로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도 모두 TBC 동양방송 전속 탤런트였다. 이러다 보니 각 방송사의 간판 배우들이 연달아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일례로 당시 MBC 전속 탤런트였던 [[최불암]]과 [[김혜자]]는 70년대에 이미 십 여편의 드라마에서 부부 역할로 출연하였으며,[* 두 사람의 부부연기 대표작인 [[전원일기]]는 1980년에 시작했다.] 심지어 [[어린이 드라마]]도 같은 아역배우들이 주연과 조연을 번갈아가며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한편 1973년 12월 에너지 절약 명분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고,[* 아침방송은 1981년 5월에야 부활한다.] 1976년 4월에는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제작/편성지침'[* 6시대 어린이 프로그램, 7시대 뉴스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 8시대 가족 대상 프로그램, 9시대 뉴스와 드라마 등.]과 외래어 사용 금지 지침[* 특히 ~~민영의 탈을 쓴 국영방송~~ MBC가 이 지침을 철저히 지켜서 뉴스데스크는 뉴스의 현장으로, 그랜드쇼는 토요일토요일밤에로 제목을 변경했고, 가수들의 이름도 바니걸즈가 토끼소녀로, 어니언즈가 양파들로 바뀌었다.]이 각 방송사에 내려졌다. 이때 종합뉴스 시간대가 밤 9시로 정해지면서 '''뉴스는 9시'''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1991년 신규 개국한 SBS가 종합뉴스를 8시에 편성하면서 9시=종합뉴스 공식이 처음 깨졌지만 실질적으로 이 공식이 힘을 잃은 건 2012년 [[MBC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이동과 이후 [[JTBC 뉴스룸]]의 영향이 컸다.] 방송사들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음에도 기본적으로는 철저히 상업성의 논리를 따랐는데, 이는 광고 때문이다. 광고료는 방송사의 주 수입원이라 이들은 한결같이 높은 광고수입을 보장받는 시청률 경쟁과 대중의 감각적 요구, 저속한 취미에 영합하는 프로그램의 양산에 매달렸다. 교양프로는 새마을 운동이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등의 계몽적인 목적 외엔 맘대로 만들 수 없었고, 사회 고발프로나 토론, 질 좋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아예 꿈도 못 꿨다. 그렇다 보니 코미디, 쇼, 일일연속극, 가요프로 등 오락프로가 전부였다. 코미디에서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이기동(코미디언)|이기동]] 등 1세대 코미디언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극후반이긴 하지만 [[이주일]]도 이 연대에 처음 TV에 등장했다. 또 TBC 쇼쇼쇼 1대 MC 곽규석[* '''후라이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세대 코미디언.]의 후임으로 [[허참]]이 등장하고 KBS의 [[김동건(방송인)|김동건]], TBC의 [[황인용]], MBC의 [[변웅전]], [[차인태]] 등 명아나운서들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했다.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선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최고의 전성시대다. 특히 토요일 밤 8시 [[TBS 테레비|일본 TBS]]에서 방송한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ヨ!全員集合)"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일본 예능 역대 최고 시청률 '''50.5%'''를 기록하며 "괴물 프로그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 전국을 장악했던 시대이기도 하며 이것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도리후. ~~당시 [[오사카]]와 [[요시모토 흥업]]은 쪽도 못썼다~~ 서쪽의 섬나라 영국에선 [[몬티 파이선]]이 시대를 초월한 병맛개그를 시전하고 있었다. 한편, 1970년대는 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컬러 TV의 대중화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세계 최초로[* [[CBS(미국 방송)|CBS]]- 1950년] 컬러TV방송을 개시한 미국이나 1960년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한 일본 등도 전면 컬러화는 각각 1972년, 1971년에야 달성했다.[[https://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the_introduction_of_color_television_in_countries|#]] 우리나라도 60년대 말(TV방송 초기)부터 컬러 TV방송을 추진했고 70년대 중후반부터는 프로그램 제작을 컬러용으로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신문사들의 반대로 실제 시판과 컬러 송출은 1980년으로 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