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0년대 (문단 편집) === 만화, 애니메이션 === 한국 만화계는 도서윤리위에 의한 사전심의제 확립과 1972년 [[정병섭군 자살 사건]], [[합동출판사]]의 독과점 등으로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소재 범위가 제한되어 일상 및 해학 위주의 명랑만화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어린이들의 접근경로도 [[만화방]] 중심에서 아동잡지 쪽으로 점차 이행되어갔다. 성인만화 역시 [[고우영]], [[강철수]] 등이 스포츠신문과 주간잡지 등지에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반짝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은 1970년대 초반 침체기를 겪다가 해외 애니 하청제작에 하나 둘 뛰어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고, 1976년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로 최초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똘이장군]]> 등이 히트하면서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 애니업계에선 1970년대 초반 들어 애니 제작인력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1972년 [[토에이 동화]] 지명해고 및 파업과 1973년 [[무시 프로덕션]] 파산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공투]] 등 사회주의 운동의 약화로 아웃사이더 트렌드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972년 [[마징가 Z]]의 히트로 [[거대로봇물/애니메이션/일본|슈퍼로봇물]]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세로 자리잡았고,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동화]]도 해외판매 및 하청제작 발주를 받아들이기 시작해 일본 애니계의 큰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만화가 요시다 타츠오가 이끈 [[타츠노코 프로덕션]]도 1970년 <[[해치의 모험]]>, 1972년 <[[독수리 오형제]]>, 1977년 <[[얏타맨]]>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소녀물 쪽에선 <[[인어공주 나나]](1970)>, <[[에이스를 노려라]](1973)>, <[[큐티 하니]](1973)>, <[[유리가면]](1975)>, <[[캔디 캔디]](1976)>, <[[베르사유의 장미]](1979)> 등이 인기를 끌었고,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플란다스의 개]]>,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 등 명작동화 애니메이션도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대표한 감독으로는 [[나가이 고]], [[데자키 오사무]], [[나가하마 다다오]], [[린타로]] 등이 있다. 한편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가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TVA)|은하철도 999]]>, <[[기동전사 건담]]>으로 대표되는 제2차 아니메 붐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마츠모토 레이지]]나 [[토미노 요시유키]]가 마니아들에게 우상으로 등극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1978년 [[도쿠마 쇼텐]]이 일본 최초 애니전문지 <[[아니메쥬]]>를 창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