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러시아 === ||[[파일:russia1990.jpg|width=100%]]|| ||거리를 방황하는 러시아의 [[비행청소년]]들.|| ||[[파일:russia2.webp|width=100%]]||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파일:russia3.webp]] [[파일:russia19901.webp]] ||[[파일:Russia4.png|width=100%]]|| ||러시아의 [[GDP]]. [[보리스 옐친]] 집권기인 90년대 동안 계속해서 하락했다.|| ||[[파일:Russia5.png|width=100%]]|| ||러시아의 경제성장률. 90년대의 뚜렷한 마이너스 성장이 눈에 띈다.|| '''눈 내리는 나이지리아'''라는 러시아의 막장 이미지는 9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역사의 암흑기 하면 항상 꼽히는 시기가 이때이다. 공산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시행한 개혁정책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가 실패로 끝나고 잠재되어 있던 연방 내 민족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동유럽에서의 잇따른 [[1989년 동유럽 혁명|자유주의 혁명]]으로 공산권을 이루던 구성국들이 싹 다 나가 떨어지면서 1990년대의 러시아는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잃고 급격히 몰락해가던 [[소련]]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공산주의 진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느낀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코메콘]]을 해체했고 보수파와 개혁파 간 갈등을 타개하는 동시에 [[주권국가연맹]]을 중심으로 하여 연방 내 공화국들의 더 많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신연방체제를 추진했으며, 각국 지도자들이 1991년 8월 20일 신연방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면서 현실화되나 싶었지만, 그 전날 일어난 [[8월 쿠데타|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는 이러한 희망을 산산조각내버렸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 쿠데타에 정부를 지탱하던 정치인들이 죄다 참여해버리면서 고르바초프는 권력 기반을 상실했으며 대부분의 권력은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갔다.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은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 해 9월 [[발트 3국]]의 독립, 12월 1일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우크라이나 독립 투표]]에서의 압도적 찬성 이후 12월 8일 [[벨로베즈스카야 조약]]에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 3국의 지도자들이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에 합의하면서 소련의 해체는 확정되었다.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고 12월 26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창설 68년 11개월 26일만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비록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 경제사정이 그닥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후유증이 대통령 [[보리스 옐친]]의 무능, 당시 재정부장관이자 총리 예고르 가이다르의 급격한 자유화 정책의 부작용과 겹쳐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90년대 내내 바닥을 기었다. 1989년 소련의 1인당 명목 [[GDP]]는 2,748달러로 한국의 절반 정도였으나, 10년 후 1999년에는 절반인 1,330~1,445달러로 줄어버렸다. 이때 급격하게 나빠졌던 러시아인들의 생활 사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러시아가 '그나마' 먹고 살만해진 현재도 소련 시절보다 나아졌다고 보기 힘들다. 소련 시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저축률, 월세와 집값의 상승, 빈약해진 복지 제도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옐친과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의 결과로는 물가 폭등에 비해 봉급 상승률은 이에 한참 못 미치는 한편 [[루블화]]가 외환시장에서 매물로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의 은행예금마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며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러시아 국민들의 구매력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직장을 잃고 [[실업자]]로 전락했으며 고급 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외국으로 유출되었다. 군대와 경찰에는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많은 장교들이 제대하거나 뇌물을 받고 무기를 파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러한 [[방산비리]] 역시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이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실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대규모로 민영화된 기업들은 부패한 [[올리가르히]]들의 손에 넘어갔고 이들이 러시아 정계, [[레드 마피아]]와 결탁하는 한편 호화스러운 해외여행을 다니고 호화별장을 꾸리는 등 사치생활을 즐기면서 벌어들인 자금은 전부 외국으로 빼돌렸다. 이렇게 경제개혁의 최대 수혜자였던 올리가르히들은 옐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자가 되어 정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역시 올리가르히들의 지원으로 총리가 되었으나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눈엣가시인 올리가르히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자신들이 지원해준 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다. 이 시절 거리에는 비행청소년, 불량배들이 넘쳐나며 치안을 비롯한 사회적 상황은 최악이었고 뉴스에서는 러시아 경제가 파탄났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져오고, [[러시아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심지어 여대생이나 [[OL]] 등의 엘리트 여성들까지 [[한국]]에 [[매춘]] 등으로 일하러 오면서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치안이 불안정한 나라라는 인상은 한국 국민들의 뇌리에도 깊게 박혔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런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현실은 이원복 교수의 해외토픽 만화 <현대문명진단> '외교관, 여기자, 그리고 콜걸(조선일보사팍 단행본 3권 수록)'에도 반영되어 있다.] 국내 정치도 개판인건 매한가지였다. 선거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공산당]]과 [[러시아 자유민주당]]같은 [[민족주의]] 극우 정당 등 극단주의 정당들이 약진했으며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최고회의 간에 헌법 제정을 두고 치른 갈등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로 발전했다. 러시아 국회의사당이 탱크에 의해 포격당하는 유명한 장면이 이때 나왔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옐친은 좌익계열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폐간시키는 등 자신의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써먹었다. 계속된 지지율 하락으로 1995년 총선에서는 [[겐나디 주가노프]]의 [[러시아 연방 공산당|공산당]]이 1당이 되기도 했지만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올리가르히의 지원을 바탕으로 옐친이 승리했다. 또한 [[조하르 두다예프]]의 독립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두다예프의 실각을 꾀하며 반군을 지원했음에도, 계속해서 상황이 부진하자 1994년 러시아가 [[1차 체첸 전쟁|직접 체첸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한 실패.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주도로 [[2차 체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잔당들까지 소탕되며 체첸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실패한 1차 침공은 1990년대 허약한 러시아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계속된 경제 악화로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때 옐친은 잦은 실정으로 권위가 만신창이로 떨어졌고 탄핵 위기까지 가기도 했지만 겨우 회생했다. 건강 악화로 1999년 8월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는데 푸틴이 [[2차 체첸 전쟁]]을 손쉽게 승리로 이끌면서 일약에 국민들의 스타로 등극했고 옐친과 여당도 덕분에 자연스레 지지세를 회복했다.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했고, 옐친은 대가로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임명하면서 러시아의 악몽같은 1990년대가 끝났으나 그 푸틴은 20여년이 지난 현재 독재권력을 확립한 한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으켜 악독한 전쟁광 이미지로 추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