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대 (문단 편집) ==== 사회 ==== 사회/문화적으로는 이 시기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1980년대]]의 '''이념적인 면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X세대[* 더글러스 커플랜드라는 캐나다 작가의 소설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래 뜻은 1970년대 풍요로운 세상에서 태어나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보며 자란 뒤 실업률이 급증한 상태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꿈은 포기했으나 옷차림 등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넘쳐났던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출처는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3권 'X세대와 Y세대' 편과 시사저널 1993년 8월 19일자 기사) 다만 한국에서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데다 1996년경까지 호황기였던 관계로 뭔가 다른 의미가 된 것.]는 개성을 중시하고 대중 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중 문화는 본래 취향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과정이 수용자의 개성을 확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 당시까지는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 범위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개성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획일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음반시장도 세계 수위권에 들 정도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전자/통신혁명은 더욱 세를 불려 위성방송, PC통신, 케이블TV, 인터넷 등으로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 1998년 사이버 가수 '아담' 및 사이버 작가 '새파란'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반면 X세대가 주체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보다는 상업문화의 소비주체로 전락하며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비판 역시 공존한다.[* 이 시기의 문화 소비를 가리키는 일명 '명품세대'라는 용어도 있다.] 게다가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학교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데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인 과도한 사교육 문제와 학생 인권 침해는 이 시대에도 별반 다를 건 없고 오히려 일부 부문에서 악화되기까지 했다. 우선 1986년에 교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는 학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교복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부활하면서 교복을 지정하지 않은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방영된 [[영심이]]나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사랑이 꽃피는 교실, 푸른교실, 맥랑시대 등과 1990년대 중후반에 방영된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학교 시리즈, [[사춘기(드라마)]], [[나(드라마)|나]]를 보면 등장인물로 나오는 학생들의 복장이 확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991년 [[UN 아동권리협약]] 가입이나 1995년 '5.31 교육대개혁' 같은 정부의 교육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교육환경은 전근대적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에서 빠따 같은 것이 잘만 돌아다니고 개성이 충만한 청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멸시했으며, 교무실만 에어컨을 상시에 틀어놓은 채 교실에는 선풍기만 주야장천 틀어놓는 권위주의적 교육환경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장기결석을 하거나 자퇴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는데, 에세이스트 김현진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 이상협, 최연소 KMTV VJ 전한해원 등 자퇴생 출신 유명인이 주목받았다.([[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99|시사저널 기사]]) 또 야간자율학습이 적용된 건 마찬가지였으며 방과후 학원 혹은 학습지 여러 개 시키기, 선행학습 등의 사교육도 1990년대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으며[* 애초에 서슬 퍼런 5공화국 시절에도 과외는 금지시켰지만 멀쩡히 운영하고 있던 학원들까지 죄다 문을 닫게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학원들이 운영되면서 사교육 문제는 여전히 문제점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기는 했다.], 경제력의 향상과 더불어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사교육비 문제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되어갔다.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대안교육' 및 '공동체교육'이 확산됐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학교폭력 문제도 점차 급증하여 1990년 3,704건에서 1992년 5,192건으로 증가했고, 1995년 학교폭력 피해 학생 김대현의 자살 사건으로 학폭이 사회문제화되어 부친 김종기가 '청소년폭력예방재단(현 푸른나무재단)'을 세워 국민적 환기를 촉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같은 해 정부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마련했고, 1997년 '청소년보호법'을 제정했다. 교과 내용 면에서 변화가 좀 있었는데, 1990학년도 때 국사 교과서에서 6.25 남침이 '전쟁'으로, 5.16 혁명이 '군사 혁명' 등으로 각각 일부 수정됐고, 1988~89년 월북 문인 해금의 여파로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정지용 시인의 작품 <고향> 등 일부 작품이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제6차 교육과정 중이던 1994학년도 때 교과서 앞표지에 있던 '국민교육헌장'과 교련 과목의 제식훈련 등 군사훈련 부분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5.16 군사혁명이 '군사정변', 4.19 의거가 '혁명' 등으로 각각 바뀌었다. 1997년부터 반공소년 [[이승복]] 이야기도 도덕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에 재야 문인 작품 등은 잘 싣지 않았고, 국사 역시 좌익 항일투쟁 등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전교조는 문민정부 출범 뒤에도 존속했으나, 합법화가 안 돼서 여전히 정부와 대립했다. 그러나 1994년 정부가 전교조 해직교사 1,490명 중 1,329명을 복직해 새 전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복직이 됐지만, 해직까지 감수하며 여전히 전교조 활동을 지속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노사정 합의를 거쳐 1999년 교원노조법 제정에 따라 합법화됐다. 1980년대 후반 '참교육 운동' 때 성행하던 고등학생운동은 1990년대 초중반 들어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점차 쇠퇴를 겪어 직선제 자주학생회도, 동아리도 급속히 와해되어 교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이에 불구하고 비공개 조직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나마 활동하긴 했다. 반면 고운 1세대들은 졸업 후 1991년 관악지역 청소년운동단체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를 시초로 1990년대 초반 동안 '청소년단체 샘', '푸른벗', '희망', '나눔터' 등 지역 청소년조직이 발족돼 문화활동을 하며 정치/사회투쟁을 했지만, 1994년 주사파 파동 시기 '청소년단체 샘 사건', '<새날열기> 사건' 등 공안사건이 터져 정치적인 고등학생운동이 와해됐다. 그러나 1995년 춘천고 학생 최우주가 강제자율학습 및 보충수업 폐지 민원을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올리고 해당 글을 하이텔에 게시하면서 학생 개인의 인권침해 문제와 입시교육, 교육구조 문제 등이 PC통신 토론방의 주 화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하이텔에 '중고등학생복지회'가 결성돼 '청소년 인권운동'이 탄생했다. 초기 학복회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청소년 인권운동은 활동방향 및 지속성에 난항을 겪었고, 단체 자체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학교측의 탄압도 빈번했다. 1998년 교육부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해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했지만 학생 및 일선 교사가 배제된 모호한 조항이라 흐지부지됐고, 11월 3일 나우누리 및 하이텔 학복회가 '중고등학생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다만 [[2020년대]] 현재와 비교하면 1990년대의 문화 및 사회풍토는 지금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많았고, 촌지, 주6일 근무+야근이나 갑을 문제, 여성 혐오,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유소년층의 성비불균형, 장애인과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차별 같은 사회부조리들도 여러모로 강했기도 했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IMF 외환위기]] 이전은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라는 표현이 회자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고 그 여세를 타서 [[OECD]]에 가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을 정도로 한국 경제가 부흥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점진적으로 진보화되었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했고 단군이래 최대호황기라고 불리던 시기라 해도 이전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워진 사회적인 부조리도 많았기도 했다. [[개인주의]]는 2020년 현재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조금씩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급 취급 하면서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있었고 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오렌지족이 어쩌니 하는 기사들도 많이 나왔으며 샴페인, 과소비 타령도 많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신토불이가 강조되었던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기는 어폐가 있고 당대 농촌이 인구감소와 저소득 문제, 수입 농산물 유입 등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황폐화되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농촌지역 인구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어도 그나마 수는 되었지만, 이것도 인구유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무력했던 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저출산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농촌 지역 자체의 인력이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농어촌 지역의 지속적인 황폐화를 막지 못한 채 아예 지방소멸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전까지는 한국의 황금기이며 재미교포가 한국으로 일하러 오던 시대다. 명목상 경제지표는 2000년대 이후가 1990년대보다 더 성장했으나 이 당시의 희망찬 사회 분위기와 정서는 되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는 단순히 물가 상승으로 인한 숫자 놀음이라는 평가도 많다. 1991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입국이 허용되어 매년 수십만의 외노자들이 들어오고 불법체류자들도 대량 양산되는 계기가 되는데[* 1990년대부터 기업주들이 싼 임금의 유혹으로 인한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외노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노동자들의 임금 하향화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80년대의 호황취업경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서서히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1996년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변형근로제'가 도입돼 [[1997년 외환 위기]]로 가속화되어서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률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대학교들도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구 분포에서도 청소년층이 줄고[*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줄어들면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출생아수가 60만 명대까지 떨어졌고,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한창 학창생활을 보냈을 때가 1990년대 ~ 2000년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참조. 물론 당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농어촌지역이나 탄광촌에서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서 인구정책이 따라온 것은 아니라서 산아제한 정책은 1996년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386세대]] - [[X세대]]를 위시한 성인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년층도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진학률이 증가하였고[*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진학률은 20-30%대 정도의 수준이었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위낙에 빡센 일이었기 때문에 덜했던 정도였다. 물론 대입시험 보느라 생고생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상고와 공고를 천시하고 인문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대학만능론'[* '사람은 무조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학 안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는 용어.]은 2000~2010년대 이후 사회의 [[독극물|독]]이 되고 있다.[* 1990년대~2000년대 당시 중학교에서는 인문계를 중시하고 상고와 공고를 천시했으며, 인문계고교에서는 무조건 대학 입학만 중시하고 학생의 진로와 생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교육을 북한처럼 세뇌교육 형식을 통해 교육했다(한국판 북한 학교).학부모들도 역시 이에 격렬하게 동조하였고 당연하게도 당대에도 많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이후에도 대학을 가야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기 쉽다는 메리트 때문에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고와 공고 출신들도 상당수가 취업이 아닌 진학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는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이 가장 크게 변화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휴대전화 등의 정보기기 보급에 의한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은 은밀히, 그러나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의 [[권위주의]]적이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를 떨쳐내고 좀 더 다양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회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통령 존영이 관공서에서 사라지고, 대통령의 호칭이 비공식적으로도 각하에서 님으로 바뀐 것도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부터였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에 따르면, 연설문에서도 권위적인 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나와있다.] 더불어 경제적 풍요와 넘쳐나는 상품들 속에서 더 소비지향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사람들의 의식 역시도 좀 더 다양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소비 트렌드에 민감해졌다.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과 단절하면서, 이후 시대인 [[밀레니엄]] 이후 시대의 모든 사회적 요소들의 맹아를 품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능]], [[아이돌]], [[한류]], [[IT]]산업, [[온라인 게임]], 개인용 [[PC]], 한국산 [[블록버스터]], [[핵가족]], [[휴대폰]], [[오타쿠]], [[엽기]], [[패러디]], [[해외여행]] 등등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수한 문화 요소들이 모두 이 시대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라고 보아도 되겠다. 2000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1990년대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2020년대(2023년 기준)에 40~50대 중반에 접어든 세대는 2020년대의 10대~20대 문화에 어느정도 적응하는 반면 비해 50대 후반 이상 세대[* 즉 1960년대 초중반생까지]에서는 적응을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기 영상세대들은 메시지보다 이미지를, 활자보다 영상을, 편지보다 전자통신을 더 선호했다. 의사소통 매체는 유선전화 외에도 무선호출기, 휴대폰, PC통신 등으로 다양화됐고, 영상매체 발달 및 대중문화의 변화는 연예인 등 영상 스타들에 대한 열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신세대들 사이에 신체조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나타났다. 영화배우나 TV 탤런트, 광고모델, 스포츠 스타들이 영상시대 최대 우상들이었고, 다이어트는 젊은 여성 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 그리고 남자들에게도 필수적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영상문화의 열기는 X세대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애인 같은 아내'라 불리는 미시족의 등장과 그들의 현시적 문화 욕구가 중년층에게 파급되었다. 1996년 유동근-황신혜[* 당시 유동근은 40세, 황신혜는 33세였다.]가 주연으로 나온 MBC 드라마 <애인>이 인기를 얻자 '애인과 배우자가 공존할 수 있다'며 너도나도 애인 열풍에 휩싸였다.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여기에 연계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권]][*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외환위기로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고 말았다.], 절대적 [[빈곤]] 등 이전 시대의 산물들이 확실하게 몰락해 버렸으며, UN에 가입하고 경제적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등 국제적 위상도 올라갔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당시의 분위기 역시 오늘 날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더 이상 한국이 무한히 성장하기만 하는 국가가 아닐 것이라는 자각, 무절제한 소비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기업과 국가의 경제가 제대로된 운용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우려 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1970년대 오일쇼크 때도 있었기는 했지만 너무 간격이 멀고(...) 1990년대 초반에도 [[3저호황]]이 끝나고 해서 중소기업들의 파산률이 크게 늘어나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섰으며 물가도 급상승하는 테크를 밟았지만 그래도 성장률은 5% 이상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기는 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2006년 낸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머릿말에서 이 시기를 '이념에서 소비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정의했다. 1990년대의 기후는 잦은 비로 일조시간이 적은 2000년대, 이상 고온이 심해서 여름이 매우 더워진 2010년대와 달리 살기 좋은 년대였다. 1990년대에 들어가면서 한파겨울은 없어지고 연속적으로 이상 고온 겨울이 발생했으며 특히 1월은 연례행사급 이상 고온이었다. 이 년대의 여름은 극과 극인데 1994년, 1997년처럼 폭염이 심한 해도 있는 반면[* 이 밖의 1990년, 1995년, 1999년도 더운 편이었다.] 1993년, 1998년처럼 이상 저온이 강한 해도[* 이 밖의 1991년, 1992년도 이상 저온으로 시원했다.] 있었다. 1996년은 평범한 편. 사실 1990년대의 기후가 그런 이유는 199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엘리뇨 해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2010년대 중반부터 [[유튜브]] 등에서 이 당시의 영상이 다뤄지면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90년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히 MBC는 유튜브 채널 타M머신(구 타임머신 코리아)을 통해 자사의 축적된 뉴스 콘텐츠를 십분 활용하여 2015~2016년, 2019년에는 90년대~00년대 초반 뉴스를 올렸다. 대충 [[1호선(웹툰)|1호선]]이 갖는 느낌과 비슷하다. 각종 재난이나 실내 흡연 등 지금과는 다른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앞선 시대보다 대량의 영상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https://www.instiz.net/pt/6775741|#]] 또한 서울역사박물관 측도 2014년 10월 29일부터 2015년 12월 17일까지 기증유물특별전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03&seq=20141023190000516&sso=ok|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을 열어 1990년대 초반을 살아 본 사람들의 추억을 환기시키도록 했다. 출산율의 경우 1990년 산아제한정책이 실질적으로 중단된 것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990년 1.57에서 1991년에는 1.71, 1992년에는 1.76까지 상승했으나 이후로는 1999년까지 계속해서 소폭 하락해서 1.42명까지 하락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하지는 않았고, 출생아 수는 60만명대를 유지해서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던 수치였기에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시기였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국내에서 [[판다]]를 볼 수 있었으나 1998년에 중국으로 조기 반환되어 2016년까지 국내에서는 판다를 볼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