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도 (문단 편집) == 여담 == [[이익(실학자)|이익]]의 [[성호사설|《성호사설》]]제2권 천지문(天地門)에는 가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도(椵島)는 가죽섬[皮島]이다. 가수(椵樹)란 우리 말의 [[가죽나무]]다. 지금은 삼화현(三和縣)에 속하며 50리 밖의 바닷 속에 있다. [[고려]] [[원종(고려)|원종]] 10년에 [[임연]]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 등이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무리들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섬의 병영을 점령하고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과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몽골|몽고]]에 가서 허위로 보고하기를, “고려에서 북계(北界) 모든 성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하였다. >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뒤에 왕이 복위하여 여러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1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반환하고 탄은 처형하였다. > >이곳은 또 근세에 [[모문룡]]이 점령했던 땅이다. 고려 왕조부터 병영을 설치했다가 반란군들에게 점거된 곳이다. 지금 《여지승람》에는 그 전말을 기술했어야 할 터인데도 빠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수록한다. [[1622년]]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에 머물게 했는데, 그는 이곳에 진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고 이름짓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을 받아들여 이곳을 기지화 시켰다. 그는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고, [[명나라|명]]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후금]]의 후방을 교란한다. 결국 가도로부터 발생한 금의 후방 불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112026001|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