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군사정권 시대의 야합 반론 ==== 이문희 주교가 이효상의 아들이기에 야합이라는 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평가이다. '''한국 가톨릭에는 '이효상의 아들' 이문희 주교도 있지만, 동시에 '장면의 아들' [[장익(주교)|장익 주교]]도 있으며,''' 이효상과 장면은 정치적으로 정반대 진영에 위치한 인물이었다. 곧 이문희 주교의 케이스는 '''장익 주교의 경우처럼''' 거물급 평신도의 아들이 주교가 되었다고 이해해야지,[* 그리고 이효상은 정치를 하기 훨씬 전인 일제강점기때도 이미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 편집부장으로 활동한 거물급 평신도였다. 박정희의 후광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이효상 본인 자체가 대구대교구의 유명인사였던 것. 쉽게말해서 거울에 비친 장면 총리라 생각하면 된다.] 박정희 정권의 산물이라 볼 순 없다. 이문희 주교가 사제품을 받은 시점과 주교품을 받은 시점의 차이인 7년은 실제로도 다른 주교와 비교해볼 때 제법 짧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교가 된 나이로 따져본다면 당시까지의 다른 주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아래의 목록은 만 40세 전에 주교품을 받은 한국인 주교들 명단이다. 우측의 나이는 주교수품 당시의 나이이며, 그 옆에 기재된 기간은 사제수품과 주교수품 시점간의 기간이다. *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만 37세. 10년 * [[천주교 청주교구|청주교구]]장 [[정진석(추기경)|정진석]] 니콜라오 주교: 만 38세. 9년 *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바오로 주교: 만 39세. 12년 * [[천주교 수원교구|수원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만 39세. 13년 한국 천주교에서 봉직하였던 외국인 주교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40세 미만의 나이에 주교품을 받은 주교 수는 더 많아진다. * 초대 인천대목구장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만 34세. 8년 * 초대 대구대목구장 플로리아노 드망즈 주교: 만 36세. 13년 *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만 35세. * 제8대 조선대목구-경성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 만 36세. 14년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만 37세. 14년 이렇듯, 조선대목구 설정 때부터 이문희 신부가 주교로 성성될 당시까지 기준으로는 만 35~40세에 주교품을 받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제수품 후 불과 7년만에 주교품을 받은 것은, 달리 생각하면 사제품을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늦게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위에 언급된 주교들의 주교 수품 나이에서 평사제로 지냈던 기간을 빼보자. 사제품을 받은 나이가 지금 기준으로 보기엔 아득히 빠른 나이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문희 대주교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더군다나 위 주장에서는 1986년에 주교로 성성된 강우일 베드로 주교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례없이 초고속으로 주교서품을 받았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미 위에 언급된 홍용호 주교, 정진석 주교, 나길모 주교의 사례가 있으므로, '유례없이 초고속으로'라는 말은 이미 사실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현대에는 사제들의 수가 늘어나고 평균 수명도 늘었기에 1970년대까지의 상황과 다르다. 그러므로 염수정 추기경을 가리켜 '보좌주교가 되는데 근 30년이 걸렸고'라고 하며 이것을 이문희 대주교의 사례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1972년에는 한국에서 주교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 더 엄청난 일이었다. 이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혹은 교황청의 지지 혹은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라는 말도 사실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먼저, 당시에는 주교의 수를 따지기 전에, 사제의 수부터 지금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이문희 신부는 그 와중에 경북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마친 인물로, 지금 기준으로도 엘리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문희 주교를 가리켜 엄청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런 인물에게 주교품을 주는 것이 마치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뉘앙스로 '더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더군다나 한국천주교회나 교황청이 '묵인'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의 주교들과 교황 대사와 교황청(당시 교황은 바오로 6세)은 그정도로 호구가 아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당시가 6.25 전쟁 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원래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려면 신랑-신부 중 최소한 한 명은 천주교 신자여야 하지만(박정희는 무종교였고 육영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전쟁 중이라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뿐이라는 것. 매일신문은 현재는 대구대교구에서 매각하여 완전히 가톨릭과 연관이 끊어진 세속의 신문사가 되었으나, 대구대교구가 지분을 소유했을 당시에도 교구가 오너로 있는 세속언론에 불과했다. 지역 세속언론에 그 지역 민심이 반영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실제 논조도 교구의 소유였음에도 정치적 보수주의보다는 TK의 지역 이권을 대변하는 것에 훨씬 가까웠다. 분명히 말하자면, 한국 가톨릭은 박정희 정권을 한국의 정부로 인정하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5.16 쿠데타의 명분 없음을 비판하지, 박정희 정부를 한국 정부 계보에서 제외하진 않는다.] 또한 이효상을 비롯하여 친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 존재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실상 박정희가 주교들에게 받아먹은 것은 대한민국 정부로 인정 받은 것 정도가 끝이었으며, 주교들과 박정희의 관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으로 가톨릭계 농민운동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건넜고, 장면 총리는 5.16 이후에도 여전히 가톨릭의 거물 평신도로 활동하였으며, 장면-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계 정당의 가톨릭 평신도들은 주교들과의 긴밀한 인맥을 가지고 박정희를 견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