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8.15 광복 후 ===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옴에 따라 간도의 연길교구[* 연길교구는 조선인 신자가 많다는 특성상 조선관구에 속해 있었다.]와 [[함흥교구]], [[평양교구]]의 신자, [[수도자]], 사제들은 모진 고난을 받았고 심지어 만주의 수용소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은 독일인 수도자들도 있다. 이때 함경남도 원산시에 있던 [[덕원자치수도원]]은 남쪽으로 내려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수도원]]을 다시 재건한다. 성 [[베네딕토회]] [[http://www.osb.or.kr/|왜관 수도원]].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런 박해가 더욱 극심해져서,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성직자[* 주임신부는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라는 교구의 방침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와 신자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빈번했다(각 [[교구]]에서 발간한 교구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마을 단위로 이념이 갈라져서 서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처럼,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교우촌)은 인민군에 협조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박해를 받고, 국군이 진주해 오자 신자들이 이에 보복을 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고 한다. [[8.15 광복]]과 [[6.25 전쟁]]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구호단체가 한국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교세보다 뒤쳐지게 된다. 물론 상대적이란 것이지, 가톨릭 신자 수도 꾸준하게 늘었다. 이승만과 미국 덕에 한국 개신교 교세가 급격하게 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도 자체 판단하기로는 1907년 개신교 평양대부흥 이후 교세가 역전된 걸로 자체 판단하고 있다. [[http://home.catholic.or.kr/attbox/bbs/attboard/read.asp?maingroup=1&gubun=100&seq=201&table=gnattboard&group_id=8&sub_id=5&ReadFlag=T&bbscode=&id=459&keyfield=&key=&page=&getSeq=201&getID=460&strmember=jpatrick&menunm=%C7%D1%B1%B9/%BC%BC%B0%E8%20%B1%B3%C8%B8%BB%E7&ctxtMember=jpatrick&ctxtAuth=R|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2009년 12월 28일,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하여 순교한 덕원자치수도원장 신상원 보나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를 비롯한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연길교구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재판이 열렸다.[[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18365&path=201407|#]] 이 외에도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비롯한 평양교구 순교자 81위에 대한 시복시성도 추진되고 있다.[[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76812&path=201506|#]] 이 당시 천주교는 현대의 보수 개신교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반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에 거주하던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로 1/3 가량이 공산당에 반대하여 처형되었고, 1/3 가량이 공산당 정권에 협력하여 조그련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나머지 1/3이 남쪽으로 내려 와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 내의 반공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가톨릭 상황을 보면, 평양교구장 주교를 포함하여 교구 소속 사제단 전원이 한 사람 예외 없이 한국전쟁을 전후로 모두 처형당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전쟁 직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 반공 심리가 퍼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또한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와 가톨릭교회가 양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 외 또 여러 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 — 가톨릭시보 1949년 11월 10일자 社告 >나는 이같이 부르짖고 싶다. “[[볼셰비키]] 공산주의는 내 자신의 적이요, 전 조선 가톨릭 20만 신도의 적이며 이 강산 3천만 동포의 적이며 더한층 전 세계 기독교의, 아니 이 우주 창조 후 아담으로부터 조물주이신 천주를 믿는 전 인류의 무덤과 저의 영혼의 적인 것이다. 옛날 네로 황제는 로마를 불살랐지만 공산주의는 전 세계의 침략자며 전 세계에 불을 놓아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20세기의 네로이며 지상의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전 인류를 그 감언이설로 속여 유혹하고저 하는 20세기의 뱀인 것이다. 공산주의적 볼세비키는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에 대한 극도로 철저한, 즉 다만 이론적이 아니고 실천적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저들은 어떠한 신학적 비판적 神論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전투적 反神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암흑의 권력이며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 - [[윤공희]] <가톨릭청년>(1947.11)에 기고한 <볼세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