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인주의 (문단 편집) === 서양은 개인주의이고 동양은 공동체주의인가? === || [[파일:개인주의 지도.png|width=600]] || || 개인주의 지수를 나타낸 지도. 빨간색일수록 개인주의 지수가 더 강하다. || 흔히 서구인들은 모두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도 문화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발전 정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서구권에서도 남유럽, 동유럽, 중남미는 공동체주의 성향이 더 짙고 반면에 서구 중에서도 북미, 호주, 뉴질랜드, 서유럽, 북유럽은 개인주의 지수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북미와 북유럽은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극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며,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지 않거나 되려 강해지는 추세를 보이는 국가들은 집단주의 성향 역시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농업 사회일수록 공동체주의 지수가 강하다. 일본의 개인주의 지수가 동아시아에서 타국가보다 좀 더 높은 것은 가장 빠르게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농업사회라도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8C%80%EC%9D%98-%EB%A7%88%EC%9D%8C-%EB%B0%80%EC%9D%98-%EB%A7%88%EC%9D%8C|밀, 보리, 옥수수 농사가 주류인 나라는 벼농사가 주류인 나라보다 개인주의로 이행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위의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모두 다 맥류나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이다. 또한 종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주의 지수가 꼴찌로 나온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1990년대 후반까지도 독재정권이 집권했고]] 극단적으로 집단주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국가주의와 종교적 배타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극단적인 집단주의 사회가 정착한 것이다. 항상 그런것은 결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선진국, 무종교, IT, 고학력 사회, 도시로 갈수록 개인주의가 높은 편이고, 반대로 개발도상국, 종교, 농경, 저학력 사회, 시골로 갈수록 공동체주의가 더 높다. 대한민국의 경우 이미 선진국, IT, 고학력 사회의 단계에 진입했고, 무종교인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다른 선진국들에 비하면 경제발전도 늦었고 민주화가 이루어진지는 겨우 30여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사회에 군국주의, 농경사회, 봉건적 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서 집단주의 성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빠른 경제발전을 한 대한민국의 특성상 세대별로 차이가 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젊은세대에서 더 집단주의 의식이 높은 경우도 존재하고 잉글하트-벨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보다 경제발전이 뒤쳐진 베트남이 한국보다 더 개인주의 성향이 높다고도 나와 단순히 경제발전으로 인한 세대차로 일반화 하기도 곤란하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개인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을 비교하자면 유럽인들은 시민 사회 보호를 우선시하며 이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권리 행사와 정부의 개입을 선호한다.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좌파]]라는 건 아니고 단지 우선 순위가 다를 뿐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국가의 개입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개인의 가능성을 중시한다. 두 사회의 차이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다. 우선 유럽은 사회 안정을 위한 분배에 신경을 쓴다. 서민들의 삶의 수준은 더 좋지만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훼손하는 단점이 있다. [[영국병]]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미국은 사회가 역동적이고 팽창적이지만 사회 통합에서 문제점이 있고[*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정치·사회·문화·종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뭉쳐서 각각의 개인주의를 지칭하다보니 개인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지키는 선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고스란히 보여주는 국가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다수 한국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시스템[* 대표적으로 [[의료보험]], [[총기규제]] 같은 것. 총기규제는 특히나 서부시대의 원주민을 쫓아낼 때와 야수의 영향이 크긴 하다. 결국 이것도 개인주의와 연관되었던 문제지만.]에 관해서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하지만 미국에서는 개인정보보호의 이유로 [[주민등록증|신분증]] 만들 때 [[주민등록증#생체정보 활용 (지문 날인) 문제|지문을 등록]]하는 것도 국가가 개인의 가장 중요한 생체 정보인 지문을 무슨 권리로, 왜 수집하느냐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시기에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내가 마스크를 쓰든 말든 내 맘대로 하는거지 정부가 왜 쓰라마라 하느냐"라며 마스크 거부 운동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미국의 코로나 [[방역]]에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나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식의 주장이 많은 공감을 얻는데, 그런 주장이 기업가 정신이나 개척 정신,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미국을 성장시킨 이념과 뿌리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애매해진다. 거꾸로 말하면 '''정부든 뭐든 그 누구도의 간섭없이''' 안정적으로 나만의 사업을 꾸릴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미국이 전세계 패권을 쥐어잡고 있는 점에 크게 영향을 준다. 옆 나라인 캐나다와 멕시코만 봐도 [[NAFTA]] 등으로 타국인 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미국인들의 개인주의로 인해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미국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이 먼저 자국주의를 운운하며 먼저 공격해온다해도 삼권분립과 4년 대통령제 등의 장치로 미국 내에서 정리되기도 하고...] 밀 농사와 쌀 농사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를 낳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사이언스 지의 발표에 따르면 쌀 농사는 농경지에 물을 대주는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얻은 수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관개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공동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관개시설 주변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동체주의의 문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반면 밀은 맨땅에서 자라는 작물로 그런 관개 시설이 필요 없으므로 공동체주의의 형성이 더뎠고 개인주의적인 생활 양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금교영, “쌀농사는 집단주의, 밀농사는 개인주의 낳았다.”. 이코노믹 리뷰, 2014년 7월 4일 작성됨, 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415.] 물론 공동체주의는 서구권에서도 주류였으며, 단지 개인주의가 반세기 일찍 보급되었을 뿐이라는 관점도 있다. 사실 이 관점이 정설에 가깝다. 근대 이후 서유럽의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 이 곳에서 서구에 대한 서술은 영미권 외의 유럽의 기준에 쓰인 것에 가까우니 주의. 서양은 '''원래'''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라고 많이 '''오해'''를 한다. 사실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개인주의적 주장이 존재하였다. [[양주(전국시대)|양주]] 문서 참고.[* 참고로 성과 이름 표기 순서에도 서양은 개인을 중시해서 [[이름]]을 앞에 쓰고 동양은 집단을 중시해서 성을 앞에 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일 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서양 성씨는 자신의 소속을 나타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뿌리를 나타내는 [[성씨]]가 뒤로 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개인을 중요시했다면 [[톰슨]]이나 [[잭슨]] 같은 성씨가 생겨서 계속 이어져 올 리가 없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집단주의가 곧 공동체주의라고 오해되기 쉬워서 이 문제를 더욱 키운다. [[공동체주의]] 항목 참조. 그러나 20세기 [[68운동]] 전에는 서구에서도 공동체주의가 주류였고, 아무리 올려 잡아도 [[종교개혁]] 쯤은 되어야 일부 지역 한정으로 개인주의가 맹아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를 보더라도 노동은 ‘사적 영역’에 국한된 활동이었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자신이 해야 할 노동을 [[노예]]에게 시켜 대신 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 시민들은 생물학적 종속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대신 이들은 남는 시간에 아고라에서 폴리스 내의 정치적 현안을 논의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공적 영역’에서 ‘행위의 자유’를 펼치는 것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웅변술이 발전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시민 공동체에 '''공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개별 생명의 무상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사회적 동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로마인들의 미묘한 번역 때문이다. '정치적 동물'이 본래 의미에 부합한다.] 여겨지던 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였다. 더군다나 고대 그리스는 자연권 개념이 없었다. 즉 개인의 권리 역시도,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에 기반한 권리였다. 이는 공동체주의적 권리관에 가깝다. 고대 로마 공화국의 경우로 넘어가더라도, 시민들은 공공의 재산(res publica), 곧 공화국(republica)을 기반으로 개인의 권리를 이해했다. 로마인들의 영웅이란, 개인의 굴욕을 견디고 공동체에 오롯이 헌신하여, 마침내 그 공동체를 영광스럽게 한 [[아이네아스]]임을 생각해보자.[* [[아이네아스]]가 언제부터 로마의 건국자로 여겨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아무리 늦게 잡아도 공화정 말기에는 아이네아스가 로물루스와 함께 시조로 대접 받았다.] 또한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구른 [[헥토르]]에게 열광한 게 로마인들이었다.[* 물론 [[일리아스]]에서도 헥토르는 결코 쩌리가 아니라 주인공급 위치이지만, 로마인들은 여기서 더 더욱 평가를 높였다.] 물론 그리스인들 역시도 [[아킬레우스]]의 오만을 경계했지만, 로마인들은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행동 자체에 "영문을 모르겠어."라고 반응했다. 그나마 철학사적 관점에서 볼 경우 개인주의로 볼 건덕지가 있는 것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피쿠로스 학파]] 정도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경우 공공선을 강조했고, 공공선은 개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여겼다.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라는 <명상록>의 구절이 여기서 기인한다. 이는 전형적인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개념이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국가라는 기관도 결국 개인의 행복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후일 개인주의자들에게 힌트가 되었을 순 있지만, 이 것을 개인주의로 확대 해석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왜냐 하면 애초에 공동체주의에서도 공동체를 그렇게 이해했으니까.[* 읽어보면서 느끼겠지만, '고대 그리스에 개인주의적 씨앗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넘어, '개인주의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권리'라는 개념을 순수하게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하거나,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를 혼동하는 데서 일어난다.] 또한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에게도, 후일의 중세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들의 시민들에게도, 자유란 '공동체의 간섭'이 부재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이 개인에게 예속(隸屬)되는 것의 부재를 자유로 이해했으며, 이는 개인주의적 자유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들과 제노바 시민들, 베네치아의 시민들에게 '개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맞았지만, 공동체의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었다. 설령 침해라고 하더라도 매우 부차적인 침해로 여겼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오직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법의 간섭'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자유의 친구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였다.[* 다만 공화국 바깥에서는, 법의 간섭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법이란, 군주 개인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제노바와 같은 공화국을 벗어나, [[프랑스]]나 [[영국]], [[신성로마제국]] 등으로 넘어간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서구에 본격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의 시작인 [[마르틴 루터]]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1520년에 이미 루터는 보편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학설을 토대로 개혁을 그리스도교 귀족과 제국 도시 당국의 수중에 맡겼다. 즉 인민이 아니라 귀족에게 보내는 호소였고, 1526년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에서는 영주들이 개혁을 떠맡았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평화 회의에서는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제국 법률이 되었다. 가톨릭을 선택할지 루터교를 선택할지는 인민 개개인이 아닌 영주들의 자유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짠하고 개인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철학사적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이후 [[칼뱅]] 등 후속 개신교인들에 의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혹 [[네덜란드]]의 독립을 개인주의와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 신자에게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벨기에 혁명|남부지방 상당수가 다른 나라로 떨어져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에 관용적인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용 차원이였지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톨릭뿐 아니라 알미니우스파, 루터파 등의 다른 개신교파들도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개혁교회조차 국왕의 눈 밖에 나면 바로 탄압당하는 일이 많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 바 있지만, 성경 해석이나 신앙고백서 개정 논란으로 인해 1834년에는 '분리'(afscheiding)운동이 촉발되었는데 이 분리파 개혁교회들도 초기에는 불법적으로 집회를 열었다 하여 꽤나 핍박을 받았었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건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이 금지에서 풀린 건 1853년 부터이다. 그 이후로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 사회에서 '관용'이란 어디까지나 같은 종교 혹은 이념을 공유하는 공동체 간의 관용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기둥화'''라 불리웠다. 개혁주의 개신교, 가톨릭, 우파 세속주의, 사회주의가 네덜란드란 나라를 지지하는 기둥에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취향을 완전히 관용하게 된 것은 나머지 서유럽처럼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혁명]] 역시도 그 기반은 [[공화주의]]적 혁명이였고, 가톨릭 사제들에게 교황이 아닌 파리의 중앙정부에 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강요에 응하지 않은 사제들은 '공동체의 적'으로 판명하고 탄압했으며, 같은 원리로 방데의 인민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여 [[방데 학살|학살했다.]] 그나마 개인주의적 경향이 국민 개개인에게 일찍 보급된 건 [[칼뱅]]등의 [[청교도]]적인 사상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국]] 정도. 결국 개인주의가 단순히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을 넘어, '서구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보급된 건 [[68운동]] 이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개인주의적 낌새를 보이는 사상들이야 철학사에서 있어왔지만, 그것이 '서구인'이라는 집단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대변한다면, 같은 원리로 양주 등의 사례를 들어,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개인주의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이분법적으로 서양은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로 이해하기보다는, 인류 보편적으로 공동체주의가 두루두루 대세였다가 20세기 중반 서구에서 (특히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주의가 보급되었다고 보는 게 알맞을 것이다. [[https://brunch.co.kr/@onestepculture/341|'개인주의 vs 집단주의'는 지나친 이분법이라는 의견이 있다.]] 오늘날 영장류들 사이에도 [[오랑우탄]]을 빼면 집단으로 살아가지 않는 종이 있던가? 인간도 선사시대 시절부터 초원에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집단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단 한 번도 홀로 살아간 적이 없다. 다만 진화심리학자들 가운데에는 온대기후에 속해 전염병이 많이 일어나는 지방에는 [[오지랖|타인의 불필요한 행위를 감시하는 문화]]가 집단주의로 발달했다고도 한다. 종합하자면 개인주의 문화라는 것은 인류 사회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며, 과거 모든 문화권은 집단주의 혹은 공동체주의 문화에 가까웠다. 전근대에 문명을 이룬 인류의 삶을 크게 농경과 유목으로 나눈다면, 이 두 문화적 요소가 원활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집단(공동체)을 지향하는 것이 가장 수월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가 지나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공동체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기조가 강해졌고, 가장 먼저 근대화·산업화에 진입한 서유럽이 개인주의 문화가 광범위하고 뿌리깊게 자리잡은 것이다. 실제로 현대 대한민국도 산업화·민주화 이후 개인주의 기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존 사회와 개인 간의 갈등이 많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