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화파 (문단 편집) == 평가 ==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쇄국보다는 개화가 당연히 정답에 가깝지만, 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중심인 개화파의 정치적 움직임은 결코 노련하지 못했고 롤 모델 설정도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가가 갈린다. 물론 오늘날에는 거의 수구꼴통으로 평가되는 [[위정척사파]]에 비하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는 많은 편.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이 개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세도정치]]로 인하여 안으로 썩고 있었고 밖으로는 외세 열강들에 의한 문호개방이라는 위험이 있었다.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에 문호개방 거부로 인하여 개화파들이 활약할 시기가 없었으나,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문호개방이 되자 드디어 개화정책이 추진된다. 그러나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개화파들을 입지가 줄어들었다. 이렇게 위정척사파와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민중들 때문에 개화파들이 제대로 개화정책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력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 특히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삼아서 정책을 추진해서 더욱 개화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또한 정치적 감각 역시 심각하게 부족하여 기회를 잡아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서 나라의 역량을 깍아먹고 분열을 야기했고 결국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는 결과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