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객관주의 (문단 편집) == 어록 == >자, 이제 여러분들이 나의 철학, 즉 객관주의가 여러분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자 한다면, 간단히 설명하겠다. 물론 한 번의 강연으로 내 철학 전체를 소개하겠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여러분들에게 이기주의의 이성적 도덕성이라는 말로써, 이타주의의 반대라는 말로써 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도덕성이 인간에게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할뿐이다. 우선 그 설명을 하기 전에 서두로서, 나는 대다수의 철학자들(특히 오늘날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도덕성이 이성의 영역 밖에 있다고, 이성적 도덕성이란 정의될 수 없다고, 또 인간에게는 도덕성에 대한 실제적 요구가 없다고 항상 주장해왔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도덕성이란 인간존재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신비적 호사 내지는 독단적인 사회적 변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 어느 누구도 왜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하는지를 증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적으로 봤을 때 도덕적이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도덕성의 본질과 근간을 [[움츠린 아틀라스]]에서보다 더 잘 요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그 책의 내용을 다른 말로 풀이하기보다는 내가 주장하는 도덕성의 본성, 기본, 증거에 부합되는 부분을 그대로 읽어주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 >"인간의 정신은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도구이다. 생명은 그에게 주어졌으되, 생존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육신은 받았으되 그 육신의 지탱까지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정신은 부여받았으되 그 내용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살아 있기 위해 인간은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기 전에 그는 그의 행위의 성격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 먹을 것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 없이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 일정한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 없이는 인간은 도랑을 팔 수도, 원자핵 파괴장치를 만들 수도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은 생각해야 한다." >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은 선택행위이다. 여러분들이 그처럼 무분별하게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열쇠는(사실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뻔히 아는 비밀이면서 단지 이름붙여 얘기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결단력 있는 의식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성은 자동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고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논리의 연결은 본능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여러분들의 위와 폐, 심장의 기능은 자동적이다. 그러나 여러분 정신의 작용은 그렇지 않다. 여러분 삶의 매시간, 매 사건마다 사고를 하건 사고를 회피하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본성, 즉 이성이 여러분들의 생존수단이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여러분이 인간인 한 '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질문은 '생각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 된다." > >"결단력 있는 의식의 존재에게는 자동적 행동진로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행위들을 이끌어줄 가치규범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행위를 통해 얻고 지켜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가치'이며, 인간은 '덕'이라는 행동을 통해 그 가치를 얻고 지켜가게 된다. 가치는 무엇에 대한 가치이며 무엇을 위한 가치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전제로 한다. '가치'는 어떤 대안에 직면했을 때 행위의 기준과 목적과 필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이 없는 경우, 가치 또한 있을 수 없다." > >"우주에는 단지 하나의 근본적 대안이 있을 뿐이다. 존재냐 비존재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단 하나의 실체군(實體群), 즉 살아 있는 유기체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무생물의 존재는 무조건적이지만, 생명체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특수한 행위방향에 의거해 있다. 물질의 경우, 형태는 변화하되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질은 파괴시킬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대안, 즉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오로지 생명체들뿐이다. 생명이란 자기보존적이며 자기발생적인 행위이다. 만일 생명체가 이러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그것은 죽게 된다. 그것의 화학적 구성요소는 그대로 남되 그 생명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직 생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만 가치라는 개념이 가능해진다. 오로지 살아 있는 실체에 대해서만 어떤 것이 선하고 악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살기 위해 식물은 스스로 영양을 조달해야 한다. 태양빛과 물, 그리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화학물질이 바로 식물이 그 본성상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식물의 생명이 바로 그 행위를 이끌고 있는 가치의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식물에게는 행동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그것이 마주하게 되는 여건에는 여러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기능 면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식물은 그 자체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행위할 뿐 스스로의 파멸을 위해 행동할 수는 없다." > >"동물은 그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갖추고 있다. 감각을 통해 동물은 자동적인 행동규범, 즉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가를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동물에게는 그러한 자신의 지식을 전파하거나, 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적당치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 그 동물은 죽게 된다. 그러나 그 동물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에 의거해 행동한다. 자동적인 안전감각을 갖고 있으되 선택할 수 있는 힘은 결여하고 있으므로, 동물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무시할 수 없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행위를 할 수 없다." >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어떤 자동적 규범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분명히 다른 점은 '결단적 선택'에 의해 그가 여러 대안들을 마주해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그 자신에게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어떤 가치에 그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지, 어떤 행위방침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자동적 지식이 없다. 자기보존의 '본능'이라는 것이 분명 인간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본능이란 틀림없는 자동적인 유형의 지식을 의미한다. 욕망은 본능이 아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여러분들에게 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심지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도 자동적이 아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지니고 있는 비밀스러운 악은 여러분에게 그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 바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곧 삶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삶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을 획득해야 하고, 사고의 과정(자연이 그에게 이를 행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을 통해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파괴자로 행동할 힘을 갖고 있고, 사실 그것이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인간이 행해온 바이다……." >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 불려왔지만 이성이란 선택의 문제이다. 인간의 본성이 인간에게 제의하는 대안이란 이성적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자살하는 동물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한 가치로서의 삶을 붙잡아야 한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그것을 지탱해야 한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삶이 요구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의 덕목들을 실천해야 한다." > >"선택에 의해 수용된 가치규범이 곧 도덕의 규범이다." > >"여러분들이 그 누구이건 여러분들은 지금 내 얘기를 듣고 있고, 나는 여러분 내부에 부패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그 인간의 잔재에게, 즉 여러분의 정신에게 얘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얘기한다. 여기, 인간에게 적합한 도덕성, 즉 이성의 도덕성이 있다고, 또 인간의 삶이 그 가치의 기준이라고." > >"이성적 존재의 삶에 적합한 모든 것은 선하며, 그것을 파괴시키는 것은 모두 악이다." > >"인간의 본성에 의해 요구되는 인간의 삶이란 분별없는 금수나 약탈하는 흉한, 혹은 살금살금 배회하는 신비주의자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강요나 사기에 의한 삶이 아니라 성취라는 수단에 의한 삶, 생각하는 존재의 삶이다.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어내는 생존이 아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단 한 가지의 대가, 즉 이성을 지불할 뿐이기 때문이다." > >"인간의 삶은 도덕성의 기준이지만 여러분의 삶은 도덕성의 목적이다. 만일 이 지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여러분의 목적이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보존하고, 충족시키고, 즐기기 위해 인간에게 적합한 기준에 의해 여러분의 행위와 가치를 선택해야만 한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바로 객관주의가 여러분에게 제공하는 바이다. >------ >믿음과 힘 : 현대세계의 파괴자들, 1960, 아인 랜드 >수세기 동안 인간이 지녀왔으되 오늘날 무너져버린 가치가 세 가지 있는데, 바로 신비주의, 집단주의, 이타주의이다. 문화적 힘으로서의 신비주의는 르네상스 때 죽어버렸고,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집단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어버렸다. 이타주의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번도 살아 있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서구문명의 핏속에 든 죽음의 독이며, 사람들은 믿지도 또 실천하지도 않을 정도로까지만 그것을 회생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붙들리고 말았고, 이제 그것은 그들이 대면하고 이겨야 할 살인마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내려야 할 근본적 선택이다. 문명을 회생시키려 할 때, 사람들이 거부해야 할 것이 바로 이타주의 도덕인 것이다. >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내가 쓸 다음 문장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바로 도덕적 위기의 시대이다. 그렇다, 여러분들은 당신들의 악에 대한 벌을 참아내고 있다. 당신들의 도덕적 규범은 그 정점, 즉 그 진로의 끝에 놓인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덕성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도덕성이 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선택(각자 삶의 목적과 진로를 결정짓는)과 행위를 이끌기 위한 가치규범이다. 그것은 인간이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게 하는 수단이다. > >그렇다면 이타주의의 도덕적 규범은 무엇인가? 이타주의의 근본원칙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위해 살 권리가 없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그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희생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적 의무이자 덕이요 가치라는 것이다. > >이타주의를 친절이나 선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들은 결과일 뿐 근본적인 것은 아니며, 사실 이타주의는 바로 그런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타주의의 단순화시킬 수 없는 근본, 즉 절대적인 기초는 자기희생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를 바침, 자기를 버림, 자기부정, 자기파괴 등이다. 이때 자기는 악의 표본인 데 반해 자기를 버림은 선의 표본이 된다. > >거지에게 동냥 한 푼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와 같은 피상적인 문제 뒤에 숨어버리지 마라. 그것은 문제의 핵이 아니다. 문제는 거지에게 동냥 한 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권리를 여러분들이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러분들을 향해 다가서기로 선택한 어떤 거지로부터 여러분의 삶을 한 푼씩에 계속 사들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여러분들의 인생과 여러분들 존재의 도덕적 목적에 대해 첫번째 저당권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희생적인 동물이라고 간주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긍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이타주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 >이제 여기에 이타주의의 도덕성이 존재하지 못하게 싹 쓸어버릴 수 있는, 그리고 이타주의가 견뎌낼 수 없는 하나의 단어, 단 한 마디의 말이 있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왜 인간은 희생적인 동물이 되어야 하는가? 왜 그러한 것이 좋은가? 여러분, 그에 대해서는 철학의 역사 전체에 걸쳐 어떤 현세적 이유도 지금껏 주어져본 적이 없다. > >도덕주의자들이 그런 현세적 이유를 없애버리도록 허용하는 것은 오로지 신비주의뿐이다. 이타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혹은 좀더 정확히 얘기해서 그것을 정당화할 필요에서 도망가기 위해 항상 대동시켜 온 것은 비현세적이고 초현실적이며 비이성적인 신비주의였다.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것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 대다수의 도덕주의자들(그들의 희생자들은 거의 빼고)이 깨닫고 있는 것은 이성과 이타주의가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 대 이타주의, 이것이 바로 서구문명의 근본적 모순이며, 조만간 폭발해야 하는 갈등이다. >------ >믿음과 힘 : 현대세계의 파괴자들, 1960년, 아인 랜드 >인간권리의 근원은 신성한 법도 입법부의 법도 아니며 동일률 law of identity이다. A는 A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권리는 인간의 적절한 생존을 위해서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생존의 조건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며,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으로 행동하는 것이 정당하며,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노동의 산출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지구상에서의 삶이 인간의 목적이라면 이성적 존재로 살아갈 권리를 인간은 가지고 있다. 본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비합리적이지 못하게 한다. >집단주의의 도덕적 근간인 이타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우리가 집단주의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우리가 이타주의의 인식론적인 근거인 비이성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이타주의에 맞서 싸울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느 것과 맞서 싸울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성의 최우위성, 그리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견해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 >맞서 싸우자, 1971년, 아인 랜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