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 (문단 편집) == 국력 ==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 >영명 7년[*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 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따지고보자면 남조의 국력이 고구려 북위 어느쪽에 가깝냐면 전자에 훨씬 가깝기도 하고] >----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 >정시 연간[*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에 세종[*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 [[선무제]] ]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 마노 혹은 옥]는 섭라[*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 645년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에서 이에 맞서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모습이다. 중국의 기록은 물론 역사서에서 이와 같이 적군의 위용을 기록자 스스로도 공포스럽게 기술한 경우는 손에 꼽힌다. 대개 적군의 진영을 두고 어떤 진을 쳤다, 혹은 어디에 진을 쳤다는 식으로 기술하였고, 그 위용을 당대인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했다고 해도 대개 "~~하였으므로 XX가 두려워하였다"라는 식으로 기술하게 마련이다. 반면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마주한 당나라는 직접적인 감평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들이 느낀 감정을 기록에 그대로 투영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당나라인들에게 고구려군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공포성이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정사 기록에서 적군의 위용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포스럽게 표현한 경우는 사서를 통틀어도 한나라 시기의 흉노에게서만 나타난다.] >---- >《전당문》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는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한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디.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 만큼 위상이 높았고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생산력''' 건국 직후 고구려는 인구 3~6만호 남짓한 [[현도군]]의 변방, 압록강 상류의 험준한 산지에서 인구를 부양하며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초기에는 간도를 차지하고 송화강과 요하 일대에 있는 동북 평원과 평안도, 황해도 등의 비옥한 땅을 석권하면서 전성기에 접어들고 높은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고 멸망 당시에는 대전을 치르고도 70만호의 남기는 여력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 남조 대다수의 국가의 집계 인구가 50~90만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체급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고 또 그것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는지 알 수 있다. [* 북쪽에 자리잡은 고구려가 남쪽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떨어졌음은 자명하지만 하지만 워낙 영토가 넓은 탓에 실질적 가용 면적이 적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땅들 중에서도 요동과 서북한은 한반도 남부보다는 못해도 충분히 좋은 땅이었으며 전성기 한정으로는 한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까지도 보유했다. 동시대 중국의 하북 지역과 화춘 평야,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강남에 비했을 때 고구려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손가락 안에 꼽힌다.] * '''군사력''' 고구려 초기에는 20,000~30,000명의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후에는 이 정도의 병력이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 되었다. 또한 일거에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야전에 투입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체급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대외적으로 백제와 가야를 굴복시키고 신라를 복속했고 중국으로부터도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인정받았으며 나아가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 지배 성격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이 강성해지지 못하고, 상국으로 대접받으며 어떨 때는 고구려의 전쟁에 동원될 정도로의 역량이다.] 일부는 멸망 때까지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하고 [[발해]] 건국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후대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중/삼중 전선의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기에 고구려는 끝내 백제나 신라를 완전 병탄하여 자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 '''국제적 위상''' 초창기 중국의 대 고구려 외교 및 무력 투사는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선에서 정리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6세기 이후에는 황제를 위시한 중앙 관료들이 직접 나설 뿐 아니라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중원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정도의 상대가 되었다.[*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다가 그만두었고, [[당나라]]도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아예 나라가 멸망해버렸다.] 고구려 자신은 유목민족 세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중국의 북쪽 및 북동쪽 유목민족 전반에 대해 강한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의 국왕은 중국 황실에게 동이교위라는 관작을 받았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 국왕을 동이 지역의 최고 패권국 수장임을 공인한것이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탁발선비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했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신라), 말갈, 거란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이웃 국가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수전쟁|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당전쟁|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고, [[평양성 전투(668년)|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 결국 이는 신라와 전쟁을 벌인 [[나당전쟁]]에서 열세인 신라에게 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인상은 그 뒤로도 깊게 남아있어서 [[여몽전쟁]] 당시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쿠빌라이]]는 [[고려]]가 항복하자 [[태종(당)|당태종]]도 어찌하지 못한 나라의 항복을 받아냈다며 기뻐했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고 국호를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주변국들에게 사실상 고구려 시즌2로 여겼다. 이를 실리적인 이유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바로 거란족의 [[요나라]]였고, 나중엔 [[서희|외교 담판]]으로 인정하게 된다.], [[조선]] 초기에 [[조준(조선)|조준]]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시를 써놓자 명나라 사신이 굴욕을 느낀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니 명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20여 일 만에 수도를 뺏기고 [[의주군|의주]]까지 도망쳤을 리가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이었으며 동시에 여러 유목민족을 자기 뜻대로 거느린 국가였다. 고구려는 중국이 여러 난세를 거칠 때도 꿋꿋이 세력을 키웠고 5호 16국 같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는 후연과 직접 겨루는 등 중국 안쪽으로도 영향력을 끼쳤으며([[광개토 대왕]]) 중국이 남북조 시대로 개편되자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당히 밑으로 들어가면서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 했다.([[장수왕]]) 중국 통일 왕조가 들어선 후엔 유목민과 연합하여 직접 선제 공격을 하는 등([[영양왕]])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종합해보면 중국의 통일왕조와도 1:1 사생결단을 내는게 가능한 유일한 한민족 국가이며 동아시아 전체로 범위를 넓혀봐도 유사 이래 이정도 국력을 지닌 국가는 중국을 제외하면 열손가락 안에 꼽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