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도대전 (문단 편집) == 평가 == [[삼국지연의]]의 이전 전통적인 삼국지 매체에서는 [[적벽대전]]에 너무 비중을 싣는 나머지 그리 주목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인공인 유관장 삼형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인 듯하다. 연의에서는 그나마 조조를 띄워주는 전투라서 재조명되었으나, 원소가 지닌 엄청난 패배 복선과, 막강한 병력수에 비해 바보같이 약하게 묘사된 원소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는 전투이다. 특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등의 현대 매체에서는 이 전투를 한 컷 정도로 간략하게 넘기는 경우가 흔하며, 초반의 접전에서 [[안량]]/[[문추]]를 참살하는 [[관우]]의 활약이 끝나면 사라진다. 여기에 반발하여 일부 논단에서는 관도대전이야말로 삼국지의 대세를 판가름한 결전이며, 이 시점에서 조조의 제패가 확정되었고 이후의 전투는 전략적 가치에 있어서 관도대전에 비해 큰 의미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관도대전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 이후 자신에게 반항하는 반란세력을 철저히 소탕함으로서 하북의 세력권을 더시 튼튼하게 내실을 다져놓았기에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원소 세력이 무너지게 된 원인은 원소 사후의 후계자 내전이지, 관도대전이 아니다. 관도대전이 아니었어도 원소가 급사하여 후계자 다툼이 있었으면 원소는 멸망했을 것이고, 관도대전이 있었더라도 원소가 죽지 않았다면 결코 멸망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관도 대전 때문에 스트레스의 정점을 찍어서 원소의 죽음을 가져온 셈이고,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이겼으면 조조는 그냥 멸망이었지만.--[*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는 2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꼭 끼워맞출 수 있는 사항인지는 애매하다. 다만, 원소는 관도대전 때부터 이미 오랫동안 이어진 독재 체제의 1인자에게 집중되는 스트레스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다. 관도대전에서 이긴 후 조조는 무려 7만 내지 8만[* 조조 본인의 기록을 인용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7만이다.]에 이르는 원소군 포로를 전사시키거나 생매장 시켰는데, 이릉에서 비슷한 참패[* 최소 수만 명 ~ 최대 8만 명 손실, 이릉대전은 관도 대전과 달리 확실한 피해 상황이 기록마다 달라서 아주 정확하진 않다.]를 당한 유비의 경우 2군 별동군을 운용했던 황권이 퇴로를 끊기고 위에 투항하면서 최소 현령급 이상의 간부만 142인을 잃었다. 이것도 유비 본대의 간부진 손실은 제외한 수치인데, 촉은 이 손실로 차세대를 이끌어나갈 그 당시의 하급 군관층이 거의 붕괴되었다.[* 덕분에 제갈량은 수족으로 부릴 군의 간부들이 부족하여 마속을 지휘관으로 쓸 정도로 고생했다. 다만 이릉대전으로 전방을 지휘할 자가 없어져 원래 후방 담당인 제갈량이 전방에서 뛰었다는 말은 반만 맞는데, 이릉과는 관계없이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라는 군대를 이끌 기둥들이 통째로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릉에서의 대패도 없었겠지만.]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원소 세력의 결집력과 역량은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 명성이 알려진 인재의 손실만 따져도 문추, 안량, 순우경 등의 주요 상장군들이 다수 전사했으며, 장합과 고람, 허유 등이 조조군에 항복했고, 전풍과 저수 등이 숙청되었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죽거나 배신한 인재들에 비견될만한 수준의 인물은 원소 군에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심배, 곽도, 봉기, 신평 정도만이 비슷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관도대전을 기점으로 원소군은 고급 인재의 과반수를 상실한 격이라는 말이다. 이후에도 원상, 원담 세력이 조조를 상대로 꽤 승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명성을 새롭게 얻은 인물의 등장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측이 패전의 기록을 고의로 누락시키면서 이런 인재들에 대한 기록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고의로 누락" 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소리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조조가 승리하는 과정에서 포섭하거나 제거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원소군이 관도 대전에서 입은 인적 자원의 손실은 치명적이며 단기간에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하지만 관도대전 후 원소 측의 인재들의 손실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원소가 차지한 하북 4주의 인적 자원의 잠재력은 이후 촉과 오에 비하면 훨씬 더 유리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를 [[순유]] 등 조조 진영의 참모들도 지적하며 그래서 [[원상]]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패배한 원소가 [[숙청]]으로 내부 단속을 하는 동안, 조조는 승리했음에도 원소 진영과의 내통 편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친원소 세력의 숙청은 없을 것이라고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여야 했다. 대중적인 삼국지 매체에서 이것이 조조가 원소보다 그릇이 넓은 인물임을 추켜세워주는 묘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관도대전 이후에도 조조가 아닌 원소 측이 오히려 숙청을 할 정도로 인재에 여유가 더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관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는 순전히 조조가 원소의 침공군을 저지한 것이다. 즉, 관도대전의 의미는 [[적벽대전]]에서 [[유비]] / [[손권]]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멸망 위기에 몰렸던 조조의 세력이 운신할 여유를 확보했다'''라는 것이다. 관도대전 이후의 세력 구도는 원소가 사망하기 이전에는 본인의 세력권과 가신들은 큰 소모없이 유지되었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 사후 여양에서 원씨 형제를 격파하고 내침 김에 업까지 공격하려다가 원상에게 패한 후 퇴각한 적이 있다. 이 패배는 진수의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범엽의 후한서에는 나온다. 그렇다고 관도대전이 단순히 '''원소의 침입을 막아낸 전투'''는 아니다. 관도대전 이전부터 장수, 선우보, 염유 등이 천자를 끼고 있는 조조 편으로 귀부했고, 천하의 사족(士族)들은 아직 정부의 권위를 따르는 상태였다. 당장 유표 밑에 있던 형주의 호족들도 허도 정권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다. 또한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에도 4주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청주에서는 오히려 조조 편인 장패가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었고 백성들도 장광태수 [[하기]]의 선정으로 조조가 빨아들이는 상황이었다. 병주의 경우, 원소군이 차지하고 있던 곳은 남쪽의 상당 지역으로, 북쪽의 태원과 기주 상산 일대는 10만의 무리를 거느리던 장연의 흑산적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유주의 경우 애매하지만 만약 선우보와 염유의 세력을 쫓아내지 못했으면 원소군이 가지고 있는 지역은 탁군 인근에 불과하다. 다행히도 기주는 매우 인구가 많은 지역이며 중원에 비해 전란을 덜 겪었기에 원소의 세력이 당시 조조의 세력보다는 강성했다. 하지만 원소 세력의 우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중원이 많은 전란 때문에 황폐해지긴 했지만 조조는 협천자 이후 둔전 제도를 실시해 유랑민들을 정착시키며 회복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유표 세력권이었다가 조조에게 귀부한 장수와 누규, 원소와 협력 관계였지만 조조 편으로 갈아탄 선우보와 염유 같은 사례들이 얼마나 더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원소는 조조가 더 강해지기 전에 전쟁을 선택했지만 대패하고 만다. 7만 명이 전사한 것은 결코 작은 손실이 아니다. 조조는 관도에서 단순히 원소군을 막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대승을 거뒀고, 안 그래도 시간이 자신의 편인 상황에서 자신이 결코 원소한테 밀리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관도대전은 '''조조의 세력이 원소의 세력을 앞서게 되는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조는 원담과 원상을 둘 다 상대하며 7개월 가량의 공방전 끝에 여양성을 점령하며 황하 이북에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원상에게 패하여 돌아가길 했지만 여양성은 여전히 조조의 손에 있었다.[* 허도로 돌아가며 음안현을 점령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원상이 조조를 상대로 거둔 승전이야말로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였으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질이 거만하고 괴팍하며 스스로 높여서 선행을 하는 데는 모자랐다. 이런 까닭으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두 문단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모순된 독재자 스타일 지도자의 성격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