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요심 전역 === 결국 공산당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국민당이 진격을 멈추고 딱 먹기 좋은 표적으로 전환되자 처음엔 정신없이 밀리던 인민해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보급에 애로사항이 꽃피던 국민혁명군에 대한 총반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1947년 하반기부터 전략적으로 공세로 전환한 공산당은 1948년 초에 이르어 만주의 99%와 허베이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또한 병력에서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6월경에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20만 명이나 증가해 280만 명으로 늘어났고 중화민국 국군은 430만 명에서 36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중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170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린뱌오는 1948년 봄부터 공세로 전환, 2월에 [[요양]]과 [[영구]]를 함락시켰고 3월 14일에 사평가, 3월 19일에 [[영길]]을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만주에서 군대를 대규모로 철수할 방법은 사라진 상황이었고 결국 장제스는 해당 구역을 요새화하여 싸운다는 방침을 내렸다. 하지만 빈곤한 보급과 내부 공산분자들의 공작으로 50만이 넘는 군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병력들은 미군이 훈련시키고 미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최신식 정예 부대와 중앙군 부대들이 섞인, 장제스의 핵심 전력들이었다. 장제스는 10월 8일 직접 [[선양시]]로 날아와서 전투를 독려하고 관내의 병력을 빼내어 증원을 시도했지만 중공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국민혁명군을 어김없이 격파했다. 국민당이 위처럼 공산당에 몰리는 과정에서 국민당 계열 중국인들이 [[조선족]]들을 많이 학살했는데 만주 조선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으로 일부 조선인들은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국]]에서 중국인들의 영토를 분배받는 등 일본군의 침공행위와 관련이 있던 탓에 중국인과 국민당의 증오가 상당했다. 이런 친일 부역에 대한 분노가 국공내전을 통해 표출됐다.[*윤휘탁,2012 윤휘탁, 논문(論文) : "복합민족국가(複合民族國家)"의 파탄; 만주국의 붕괴와 "만주국인(滿洲國人)"의 충돌,수난, 中國史硏究(Journal of Chinese historical researches Vol.78, 2012] 국민당이 조선인을 학살한 건 비판거리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에 부역한 게 사실이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문제 삼지는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선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무조건 [[피해자]]라고 가르쳤는데 만주국 시절 부역행위 때문에 중국인들이 증오해서 보복 학살했다고 하면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는 점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민당에 의한 가혹한 친일청산은 [[한간]]들이 대부분 공산당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대중동원을 통해서 그들을 제거했다. 공산당은 [[장정]] 이후 생존을 위해 몸집 불리기용으로 견지한 [[신민주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과도기 총노선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협력해왔으나 공산주의에 맞지 않는 민족주의적 기업인(민족 부르주아지), 협력 지주 등을 쳐냈고 이 과정에서 한간들도 버림받게 된 것이다. 즉 공산당은 한간들을 단순 도구로 써먹은 [[토사구팽]]에 불과했다. 또한 여기서도 살아남은 한간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반면 장개석은 [[국부천대|대만으로 가서는]] 국민당을 지원한 대만의 한간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로는 구셴중 일가를 들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구셴중의 장남 구천푸를 1946년 감옥 보냈으나 곧 풀려나고 구천푸는 홍콩으로 망명간다. 그리고 1949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 1948년 10월 9일 중공군 둥베이야전군이 린뱌오의 지휘 하에 25만 명의 병력으로 1948년 9월 7일 [[진저우]]를 공격해 점령했고 [[창춘]]도 완전히 포위되었다. 린뱌오는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 것을 지시, 창춘을 포위하여 굶겨 죽인다는 작전을 강구했고 10만 명의 국민혁명군과 50만 창춘 시민들은 쫄쫄 굶다 16만 명이 아사하는 참혹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창춘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어 선양으로 철수하란 지시를 내렸으나 창춘을 사수하던 국민혁명군 60군 사령관 증택생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산되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그럴 역량이 있었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1948년 10월 17일 증택생의 반란에 이어 둥베이 지역의 소공 작전의 총책임자인 정동국 중장마저도 10월 21일에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창춘은 완전히 공산당에 넘어갔고 인민해방군은 의기양양하게 창춘에 입성했다. 곧이어 선양까지 함락됨에 따라 11월 즈음에 국민당은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린뱌오는 관내로 진출, 녜룽전, 허룽과 합세하여 화베이 공격에 가담했는데 요심 전역이라 불리는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장제스는 만주는 물론 수십만의 정예 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잃었다. 이 와중에 [[장징궈]]가 야심차게 시도한 [[재정경제긴급처분령|화폐개혁]]마저 실패하면서 국민당은 더욱 나락으로 몰렸다. 하지만 중공군이 민심을 바탕으로 이겼다는 공산당 선전과 달리 공산당은 창춘에서 국민당을 이기기 위해 수십만의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을 야기했고 창춘을 탈출하는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사살했다. 린뱌오조차도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마오쩌둥]]에게 전략의 수정을 요청하였으며 마오쩌둥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9월 11일 마오쩌둥의 허가 없이 창춘의 민간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마오쩌둥은 이 명령을 취소시켰다. 또한 16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강제로 징용되었고 80만 명의 전투원 또한 징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강압적이었음은 당연했고 공산당은 협조하지 않는 민간인들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요심 전역의 참혹한 패배와 경제개혁의 대실패가 겹쳐서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11월 26일 중화민국의 첫 헌정 내각이었던 [[웡원하오]]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장제스의 리더십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