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시장(영화) (문단 편집) == 옥에 티 == 조금만 찾아도 바로 나오는 현대사를 다룬 영화임에도 [[창작물의 반영 오류|현실 반영 오류]][* 과거 고증 오류라고 잘못 알려진.]가 상당히 많다. 특히 연도에 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흥남 철수]] 작전에서 [[미군]]이 선적하는 전차로 [[M48]] 레플리카가 나온다. 그것도 105mm M68 포를 장착한 M48A5 모델로.. 국내 [[월드 오브 탱크]] 등의 광고에서 등장했던 물건인데 로드휠 등을 보면 확실히 실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M4 셔먼]] 레플리카[*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포화속으로]]에서 등장.]가 없는 것도 아닌데 꽤 아쉬운 부분. 작중 등장하는 미군 장병들과 라루 선장의 [[상선사관]] 복장 고증도 대충 한 티가 난다. 또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철수 작전의 [[기함]]이 아니었기에 [[에드워드 알몬드|알몬드]] 장군과 현봉학 박사는 이 배에 탄 적이 없고, 라루 선장과 대면한 적도 없다. 그리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배 근처에 온 피란민들은 전부 태웠고, 작중에서처럼 중간에 사람들을 버리고 출항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전차상륙함|LST]]에서 트럭과 전차들을 도로 빼내고 피란민들을 태우는 장면도 있는데, 실제로는 실은 장비들은 도로 내리지 않고 여유 공간이 허락하는 하에서만 피란민들을 수용했다. * 미군이 남자아이에게 [[허쉬(기업)|허쉬]] [[초콜릿]]을 주는 장면이 나오지만, 전쟁 시기의 초콜릿은 [[https://s3.amazonaws.com/idme-wordpress-military/wp-content/uploads/2016/05/11114553/d-ration.gif|D레이션]]이었다.[* 사실 D레이션도 허쉬에서 만든 거긴 하다(...) 그리고 D레이션은 군용 비상식량이라 일부러 맛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애들 줄 물건은 아니다. 참고로 D레이션의 생산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종료되었고, 파생형인 트로피칼 바는 좀 더 먹을만 했으며 한국전쟁에서 주력으로 쓰인 것도 이쪽이다.] * 파독 광부 모집 최종 면접 때 달구의 응시 원서를 보면 체중이 55kg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파독 광부의 지원 자격은 체중 60kg 이상이었다. 또한 파독 광부들은 대부분 광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돈과 빽으로 간 것이다. 극중 주인공들처럼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가기는 당시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고학력자들도 있었고, 생전 육체노동을 한 번도 안 해본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다. 독일이 원하는 진짜 광부 출신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도 광부라고 하면 1970년대에는 '태백에서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을 잘 벌때라[* 최소 교사 월급의 5배 정도] 굳이 독일까지 가서 고생할 메리트가 없었다. [* 이는 경제 발전이 끝난 현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술같은 특수한 분야가 아닌이상 보통 유능한 인재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좋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굳이 외국나가서 일하지 않는다.] * [[1963년]] 파독 광부들이 탄 비행기가 [[에어프랑스]]의 [[보잉 747]]인데, 747의 초도 비행은 '''[[1969년]]'''(...). 최초 취항도 1970년 [[에어프랑스]]가 아닌 [[팬암]]이었다. 거기다가 747-100이나 200이었으면 모를까, 1989년에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747-400이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기체 도장은 '''2009년''' 도입된 에어프랑스 신도장이다(...). 결정적으로 파독 초기 '''당시에는 직항편이 없어서 [[독일]]에서 [[루프트한자]] 소속 전용기를 [[한국]]으로 보내줬다.''' 고증을 맞추려면 [[DC-8]]을 보내야 한다.[* [[보잉 707]]은 707-320B가 아닌 이상 독일에서 한국으로 직항 태우기엔 항속거리가 부족하다. 그러나 냉전 시절 [[소련]] 영공 통과가 안 되어 유럽 노선도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찌저찌 해서 한국-프랑스-독일 루트로 에어프랑스를 이용했다고 우기면 고증이 가능하겠지만, '''에어프랑스의 첫 한국 취항년도는 1983년'''이라 파독 광부들이 독일에 간 당시보다 20년 후에야 에어프랑스가 [[김포국제공항]]에 취항했으므로 고증이 맞지 않다. 거기에다 에어프랑스 도색도 70년대 도색이 아닌 현재의 도색이라 63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에어 프랑스-KLM 그룹]]이 기수에 박혀있고 꼬리날개에는 '''[[유럽연합|EU]]''' 상징기가 붙어있다. * 주인공과 파독 광부 일행이 독일에 간 것이 1963년이라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독일에 광부를 파견시키기로 '''협정'''을 맺은 날짜가 1963년 '''12월 16일'''이었으므로, 한국 측이 광부 선발을 2주 안에 마치고 보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독일에 사는 교민이 개인자격으로 현지 업체를 상대로 협상하여 조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을 초청해서 일하고는 있었다. 이것이 확장되어 1963년에 국가 대 국가로 협정맺게 된 것이다.] 극중 광부 선발 과정의 시점도 겨울같아 보이지 않으므로 적어도 1964년은 되어야 한다. 또한 시점은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정부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한 것도 1966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영자가 덕수와 비슷한 시기, 혹은 그 이전에 파견된 것처럼 묘사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오류다. 제대로 묘사하자면 1년은 늦어야 한다. 뒤의 월남전 관련 묘사도 그렇고, 아주 세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간 것이 1974년쯤인데, 미군은 1972년에 철수 시작, 1973년에 철수를 완료했고,[* 이때는 주월외국군 중 한국군이 제일 많았다.] 한국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73년 3월에 후발대가 철수했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까지 2,500명이 잔류했다는 주장은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추가 증파하고 싶다고 미국과 남베트남에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협상이 결렬되어 철수한 것이다.] 다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해병대가 나타나서 도와줄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남진이 복무했던 해병대 2여단 청룡부대의 마지막 부대는 1972년 초에 철수했고 맹호와 백마가 마지막으로 1973년 초에 철수했다. 영화처럼 미군 기지가 베트콩 테러로 폭파당하고 한국 해병대가 한국인 근로자들을 구해주려면 아무리 늦어도 1972년 초는 되어야 한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직전에 남아있던 교민 등을 철수시키기 위해 급파되었던 [[대한민국 해군]] [[전차상륙함|LST]] 2척의 승조원들이 공식적으로 파병된 마지막 인원들이다. 단, 이분들은 참전용사 홀대의 희생자들이었는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55&aid=0000253222&sid1=001|공식적인 파병이 종료된 이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파병 인원으로 인정을 못 받다가 최근에야 겨우 인정받았다.]] 이들 역시 그 특성상 사이공에 입항해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구출하는 정도만 했을 뿐, 영화 내용처럼 [[정글]]에서 전투를 하진 않았다. --또 자세히 보면 해병대원들 군장이 M1956이 아닌 LC-1이다-- * 영화에서 등장한 [[남진]]은 1971년에 이미 전역한 상태였고, 해병대는 월남에서 1972년 초기에 이미 다 철수한 상황이었다. 위 사실과 종합해보면 제작진이 베트남전 종전이 1975년이라는 사실만 보고 그때까지 미군과 한국군이 남아있었다고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남진이 주인공들과 다니면서 "한국 돌아가면 발표 예정인 노래"라며 흥얼거리던 [[님과 함께]] 또한 1972년에 발표한 노래이다. 그나마 베트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입었던, 덕헌터라 불린 무늬의 위장복의 재현도는 높은 편이다. 한국 해병대의 덕헌터 패턴 위장복은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이나 [[그때 그 사람들]]같은 드라마, 영화에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영화 소품용으로 다량 제작되어 구하기 쉬운 편이다. * 1983년 여의도 광장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사람 중에 [[태극기]]와 함께 [[인공기]]를 든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남한 내의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무래도 제작진이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개념을 헷갈린듯 하다. 애초에 북한 때문에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인데 인공기를 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프로그램 성격과 맞지 않는 것과 별개로, 시대상으로도 인공기는 어울리는 요소가 아니다. 우선 1983년 당시에는 반공 교육물이 아니라면 인공기가 등장하지도 않아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구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해당 시기는 여전히 [[반공]]을 강력한 국시로 삼았던 서슬퍼런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시절이다. 인공기는 요즘도 관계 기관의 허가 없이 게양 혹은 소지하면 처벌을 받지만, 5공 당시 영화 속 해당 인물처럼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인공기를 소지했다면 그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것이므로 [[간첩]]이나 [[종북주의자]]가 아닌 이상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장면이다. 오히려 당시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태극기를 휘두르며 [[6.25 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도 반공과 반북 감정이 굉장히 심했던 시기였는데, [[김일성|누구]] 때문에 가족이 헤어지고 이 생고생을 하면서 가족상봉을 위해 애간장을 태워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저렇게 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서에도 나오듯 영화상 등장하는 방송 스튜디오와 실제 방송 현장은 딴판이다(...). 물론 당시의 KBS 본관 공개 스튜디오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재현도는 뛰어난 편이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실제와 다르며,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산가족 찾기 방송 현장치고 '''너무 조용하다.''' 실제 해당 방송 현장은 당시의 성능 딸리는 음향 장비로도 백노이즈가 다 섞일만큼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도떼기시장(...)이었다. 원래 스튜디오 방송은 조용한 게 상식이지만 저때는 해당이 안 됐다. 방송 중에도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는 장면이 터지면 그쪽(지방국이나 공개홀)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돌아오고 출연자들은 실신하고 아나운서는 옆에서 같이 울다가 무대 뒤로 빠지고 하는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 영화상에서는 [[KBS부산]]의 진행 아나운서가 처음부터 덕수와 차분하게 1:1 인터뷰를 하는데, 이는 영화 주인공 보정이다. 실제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1 인터뷰는커녕 아나운서가 플래카드에 쓰인 기본 정보를 얼른 읊고 넘어가기 바빴다. 출연자 중 정보가 서로 맞아서 대조해 보려고 무대 앞으로 따로 모셨을 때에만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했다. 각 지역 총국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지역의 출연자들을 내보내려고 아우성이었고, 그걸 KBS 서울에서는 냉정하게 잘라버리기 일쑤. * 방청객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가 죄다 커다란 흰색 도화지인데 실제로는 베이지색 혹은 연두색 [[마분지]]에 매직으로 쓴 손 글씨다. 실제 플래카드는 [[광화문역]]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age(1983-01-01)]년이 지나 이제 매직으로 쓴 글씨는 상당히 바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종이가 작아서 스케치북 크기 수준밖에 안 된다. 1983년 당시 한국인과 현대 한국인의 신체 사이즈 차이, 물자 풍족도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 현재 사무실이나 학교에서 쓰는 용지는 새하얀 210 x 297mm A4용지가 기본인데, 당시에는 그보다 작은 국판(150 x 210mm 국정교과서 크기)크기 또는 A4보다 작은 46배판 누런 갱지가 표준이었다. 스케치북은 A3정도 크기였고, 그 이상 되는 크기는 미술 전공자나 사용하는 크기였다. 두꺼운 종이라면 누런 마분지가 가장 흔했고 한 면이 하얗게 코팅된 두터운 종이는 상대적으로 비싸고 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