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하자 (문단 편집) == 과거[*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불어과]]를 졸업하였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였다고 하는데, 대학에 진학할 [[1959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서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빚]]까지 져가며 [[등록금]]을 냈다고 한다. 부모가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키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권하자가 이렇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녀가 8남매 중 7번째였는데 바로 위인 6번째 형제(즉 언니 또는 오빠)가 죽은 후에 어렵게 얻게 된 자식이라 그렇다고 한다. 여동생은 "완전히 (언니가) [[공주]]로, [[어머니]]가 [[시녀]]로 살았어요."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권하자의 여동생은, 그때 자신은 직장에 다니면서 스스로 일해서 [[결혼]]을 했다고 토로하면서 부모에게 언니와 심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 억울하고 성격도 맞지 않기 때문에 '''언니와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피를 나눈 자매로서 이런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지금도 난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게 두려워요" 라고 말했다. 심지어 이 [[편애]] 때문에 어머니가 밉다고 했을 정도.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1010/58123221/1|기사1]]]했고, 이후 졸업까지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31/2011073100633.html|기사2]]] 이후 그는 주[[일본]]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3년을 근무했고[*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art_id=201112201904181|기사3]]][* 다른 언론사들에는 주일본 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그는 외무부에서 18년을 근무한 셈.], 이후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교부|대한민국 외무부]] [[유엔]] 담당 부서에서 15년을 근무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1010/58123221/1|기사4]]] 18년간 외교부서에서 근무한 것이다. 주일 한국영사관 3년 근무 이후, 외무부 유엔부로 발령된 것인지 아니면 주일영사관을 그만두고 다시 [[외교부|외무부]]에 입사해서 근무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한 TV 취재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이 주일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을 밝혔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주일영사관 근무경력은 언론사 보도 내용에는 빠진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외교부|외무부]]에서 근무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정식 공무원이었는지 혹은 계약직이나 일용직 등 기간제근로자였는지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 외무부 근무를 [[1976년]], 즉 그녀 나이 36세 정도에 시작했는데, 대학 학업 소요 기간인 4년 외에 12년의 시간가량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권하자는 [[결혼]]한 적이 없는데, 권하자의 어머니가 워낙 눈이 높아서 생전에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결혼을 막은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권하자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급'''이어야 하고 1주일에 1번 '''[[호텔]] [[사우나]]에서 [[목욕]]할 정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권하자의 어머니가 딸을 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 해가며 공주대접 한것이 오히려 딸 인생을 망치는데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해도 권하자가 백마탄 왕자님 운운을 하면서 끝내 거절하게 만들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와 지나치게 수준이 차이나는 배우자감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외교부|외무부]] 시절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외무부에서 근무하던 1970~1980년대에도 '''[[어묵]]을 사먹거나 사탕을 사도 꼭 [[백화점]]에서만 샀다'''고 할 정도로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2020년대 기준으로도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사는 것은 꽤 까다로운 사람 취급받을 일이지만, 70~80년대 백화점의 위상은 부유층을 위한 장소 수준이었다. 적어도 외무공무원 월급으로 매번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절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