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단스크 (문단 편집) ===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 (1919 ~ 1945)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는 [[우드로 윌슨]]이 표명한 평화원칙 14개 조항 중 13번째 조항에 의해, [[폴란드 제2공화국|'바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가진 채로 독립했다]]. 하지만 이미 대다수의 시민이 독일인이었던 이 도시는[* 당시 독일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자료마다 크게 다른데, 대략 85%~90% 정도가 독일인이었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다.] 폴란드에 다시 복속되지 않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단치히와 그 근교지역을 묶어 [[단치히 자유시]][* 나폴레옹 시대의 단치히 자유시와는 다르다.]라는 [[도시국가]]로 독립했다. 다만, 폴란드는 같은 조약에 의해 단치히와 관세동맹을 맺어 사실상 단치히의 [[세관]]을 통제했고 단치히 시내의 [[우체국]] 옆에 새로 우체국을 세워 [[우편]] 업무도 통제했다. 또한 단치히의 항구도 사용할 수 있었다. 폴란드 정부는 이런 행위들을 '[[바다]]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위해 불가피하다'며 정당화했다. 따라서 단치히와 폴란드 정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밀려 [[바르샤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단치히의 부두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여 폴란드로 들어가는 [[탄약]]의 하역을 거부해 폴란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열받은 폴란드 정부는 전쟁을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이겨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에 보급 창고와 작은 요새를 세우고 소규모 군대를 주둔시켜 단치히를 종속화했다. 자유시는 [[단치히 굴덴]]이라는 통화를 발행하고 직접 우표를 만들어 유통했다. 이처럼 자유시는 자신들의 자치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지만 폴란드 역시 단치히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길 원해서 자유시와 폴란드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러다 보니 폴란드 입장에서도 단치히의 항구를 계속 쓰는 것이 부담스러운 입장이었고, 결국 단치히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그디니아]]라는 최신 항구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이어진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폴란드-독일 관세전쟁]] 때는 바다를 통한 해외 수출에 집중한 폴란드가 그디니아와 [[실레시아|실롱스크]] 간의 [[철도]]를 연결하면서 [[그디니아]]는 발트해의 중요한 항구로 발전한 반면 단치히는 점차 소외된다. 경제적으로 크게 고통받던 단치히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크게 불만을 가졌고 결국 [[1933년]] 나치당 정부를 세우기에 이른다. [[나치 독일|독일 본토의 나치당]]과 더불어 단치히에서도 [[1937년]]부터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절반이 넘는 유대인들이 단치히를 떠났다. 단치히의 이런 상황을 이용해 나치 독일은 단치히와 함께 단치히로 향하는 [[폴란드 회랑]]을 넘길 것을 폴란드에 요구했고, 폴란드는 당연히 이를 거부한다. [[1939년]] [[9월 1일]], 우호친선을 명목으로 단치히 주위에 있던 독일의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에 포격을 가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베스테르플라테와 단치히 우체국의 폴란드군은 압도적인 나치 독일의 군세에 맞서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일주일이 넘게 저항하다 전멸]]했고, 단치히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 나치 점령 하에서 수백명의 폴란드인이 단치히에서 처형되었고 유대인은 거의 절멸당했다. 전쟁 중반을 넘어가면서, 독일의 주요 도시였던 단치히는 연합군과 [[소련군]]의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렸고, [[1945년]] 초 [[나치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자 나치 정부는 단치히의 독일인 시민들을 해상운송을 통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방향으로 대피시켰다.[* 단치히 뿐 아니라 [[동프로이센]] 전역에서 대피가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공습과 잠수함에 의한 공격으로 많은 배들이 침몰했고 수만에 달하는 독일인들이 발트해에 잠들었다. 이 중 [[빌헬름 구스틀로프|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참사]]가 유명하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3/Bundesarchiv_Bild_146-1996-030-12A%2C_Danzig%2C_Frau_vor_Schaufenster.jpg|단치히 최후의 발버둥]] 1945년 2월 한 행인이 상가 유리창에 나붙은 선전문을 읽고 있다. 왼쪽 : 병사들이여, 가까운 군기지로 응소하라! 오른쪽 : 단치히인들이여, 참아라! 패닉과 루머는 볼셰비키를 돕는다! 그간의 폭격, 그리고 [[소련군]]이 당도하기 직전 뒤집어 쓴 포격으로 인해 [[1945년]] [[3월 30일]] [[소련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땐 시가지의 90%가 완파되어 있었다. 영화 [[몰락]]의 원작인 《히틀러 최후의 14일》에 따르면, 소련군의 단치히 진격 당시 단치히의 티거 전차는 4대에 불과하여 사실상 유의미한 저항 자체가 불가했다. 히틀러는 단치히 방어를 위한 병력보강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