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 (문단 편집) === 대한민국 === [[대한민국]]에서는 [[신라]], [[가야]] 등에서 [[금관]],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귀걸이]], [[금령총 금제 허리띠|허리띠]] 등 금으로 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KBS역사스페셜에서 경북대 문경현 교수의 말에 따르면 신라는 특이하게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중에서 금을 가장 으뜸으로 삼았다고 한다. 동시대의 중국은 [[옥]]을 으뜸으로 삼았는데, 신라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숭배했던 금을 최고의 물질로 삼았던 것은 주목할만한 특징이라고 한다. [[신라]]에서는 [[금입택]]이라는 기와에 금을 씌운 기와집이 유행했고, 개목걸이조차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다만 이 금으로 만든 유물은 금광이 아니라 사금을 통해 재료를 구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100605295&code=960201|#]] 과거에 경주를 '''금'''성이라 부른 이유도 사금이 많이 나서였고, 천년을 이어온 신라가 멸망한 것도 그 일대의 금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게 과거에 많이 파헤쳤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금은 출토되었다. 특히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에서는 금으로 만든 불상도 많이 제작되었고, 신라의 금입택만큼은 아니지만 왕궁이나 절의 기와에도 금을 군데군데 입히곤 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금을 이용한 [[귀걸이]] 등의 장신구는 조선 초기 선비들 사이에서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이 알게 되면 분명 조공으로 많은 양의 금을 요구할 것이 뻔하므로, 조정에서는 검소함을 강조하며 금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불교에 젖어있던 사회 분위기를 성리학적으로 다잡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세종]] 때 기존 조공인 현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 금과 [[은]] 대신 군마를 주는 것으로 조공은 쏠쏠한 거래가 되었다.[* 이런 식의 서술만 보면, 조선이 명한테 호구잡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조공]] 문서에서 보면 알겠지만 조공을 명분삼아서 무역을 했던 거라고 보면 된다. 만일 중국한테서 물건을 가져오고 그 대가로 금이나 은으로 지불했하면 그대로 국부 유출이 되지만, 말이나 면포로 주었다면 사실상 물물교환을 한 셈이 된다.] 원래 고대부터 남자들도 귀금속으로 만든 귀걸이를 착용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 금지된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금 채굴 붐이 일어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그 절정은 1930년대였는데 당시 아시아 최대의 금광이었던 평안북도 [[운산 금광]]을 필두로 전국에 무려 3,000여개의 금광이 채굴 중이었다고 한다. 금광석은 화강암에서 산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지질 조건상 금 매장량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일 전쟁 중이던 일본은 군수물자 결제 대금 조달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대량의 금을 가져가야 했다. 따라서 금산 장려 정책을 펼쳐, 조선인들에게서 광업권을 마구 사들이고, 금광 개발 장려금까지 뿌렸다. 금광 개발이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금 캐기에 열광했는데 이때 자수성가한 황금 부자의 대표적 인물이 [[최창학]], [[방응모]]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금본위제로 인해 전국곳곳 금광열풍이 불었는데, 황금광 시대라는 책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금광열기를 대강이나마 실감할 수 있다. 대략 점잖은 신문 편집인, 지식인 같은 사람들도 금에 미쳐 이곳 저곳 땅을 헤집고 다녔다니 그 열기가 굉장했는지 알 수 있다. [[김유정(소설가)|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 그러한 세태를 배경으로 한 작품. 1930년대 내내 이어진 황금광 시대는 태평양 전쟁과 함께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을 중단하고 자산 동결조치를 취하면서, 일본이 금산 장려 정책을 중단하자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금광 중에서는 [[노다지]]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운산 금광이 특히 유명하다. 이것도 미국이 수십 년간 파먹었다. 이 운산 금광의 가치는, '''단일 금광으로서 [[아시아]] 최대 규모'''였으며 잠시동안 일본을 '''금 생산 세계 4위'''로 만들 수준이었다. 1920년대 기준 한반도 전체 금 생산액의 절반을 차지했고 고용 인원만 1만 명을 넘는 거대한 광산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광업권 이전 문제, 금광 채굴 기술 문제로 인해 대부분의 금광의 운영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청양군]]의 구봉광산 등 몇몇 광업소가 존재했으나 1997년 금광 채굴이 전면 중단되었다. 현재는 2002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전남 [[해남군]]의 은산광산이 한해 약 250kg[* 남한 전체 금 생산량의 80%, 금 소비량의 3%를 차지하는 양이다.]의 금을 생산하고 있다. 1960년대~1980년대 한국에서는 금 생산은 줄어들고 외화부족으로 수입이 어려워 금이 비쌌기 때문에 금 밀수입이 성행했다. 홍콩에서 금을 싸게 사서 몰래 밀수해 국내에서 팔면 2-3배에 팔 수 있다고 했다. 아직도 한국의 금값이 국제시세보다 비싸 간간히 밀수사건이 발생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