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대중 (문단 편집) === 종교 ===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원래는 특별한 [[종교]]를 두지 않았고, 김대중의 부모 역시 그 시대 여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성리학]])를 신봉했기에 김대중도 그 영향을 따랐으나,[*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었다.] 정치 신인이던 1957년, 은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정치인이었던 [[장면]] 세례자 요한과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당시 장면의 세력이었던 민주당 신파 정치인들은 보스 장면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대중도 이 중 1명이었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종교)|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약현성당]]은 [[한국 가톨릭]] [[순교자]]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놀랐다고 한다.[*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현하다 [[참수형]]을 당했다.] 이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됐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가톨릭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대선에서 함게 경쟁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함께 참석했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미사에 나온 건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사망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가톨릭식으로 치루어졌다. 이외에도 가톨릭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를 치뤄주기도 했었다.[* 다만, 장례 미사에서 김대중의 시신은 국장을 위해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 없이 [[미사]]를 진행했다.] 참고로 김대중은 임종 직전 자신이 다니던 서교동성당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원음방송|서울원음방송]][* 이 당시에는 원음방송 본사가 익산에 있었다.]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http://www.hanulan.or.kr/news/articleView.html?idxno=74767|#1]]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953|#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또한 매년 열린 김대중의 도쿄 납치 사건 생환 기념 미사때도 두 부부는 늘 함께 참석해서 기도했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가톨릭,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모범적인 가족의 예.[* 다만 [[감리회]]가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 중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한 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주류 교단을 포함하면 [[대한성공회]]가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대중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상당히 많다. [[박지원]], [[정동영]] 등이 [[동교동계]] 합류 이후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에 입교한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가톨릭이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은 민주/진보 정치인들이 많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보수정당]]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은데, 이는 [[민주당(1955년)|민주당]] 구파의 수장이었던 [[조병옥]]과 그를 계승한 [[김영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한국 최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는 김영삼 손을 잡고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 매우 흔하다. 한편 보수정당에는 [[불교]] 신자도 흔한데, 이는 보수정당이 불교색이 강한 [[영남]]을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정당에도 [[이회창]], [[오세훈]], [[이준석]] 등 가톨릭 신자가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