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만철 (문단 편집) == 개요 == [[청진시]] 출신의 [[탈북자]]다. [[최불암]]과 동갑내기라서 현재는 [age(1940-08-01)]세의 엄청난 고령이다. 그의 자녀들도 [age(1977-01-01)]~[age(1966-01-01)]세의 중년이다. 2007년 기준으로 막내아들을 제외하면 모두 자녀를 얻었으며, 2014년 기준으로 막내아들도 자녀를 얻어 많은 손주를 가지고 있다. 김만철의 고향(본적지로 추정)은 옛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이었고 8.15 해방 전, 먹고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고 한다. 큰누님은 당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남쪽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https://imnews.imbc.com/replay/1987/nwdesk/article/1800433_29505.html|#]]. 탈북 당시 이미 남한에 정착해 있던 큰누나를 포함해 3남 5녀 중 김만철은 여섯째였다. 그 가운데 김만철의 막내동생은 평양과 청진으로 떨어져 살았는데, 모르는 사이 막내동생이 소련으로 유학을 간다. 그런데 막내동생은 1975년에 [[소련]]에서 강제 소환되어 1개월도 못되어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막내동생의 '죄'는 현지 동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불평하며 드러내놓고 비판한 죄였다. 소련과 [[동유럽]]권 국가들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사회 분위기가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특히, 학문의 영역에선 광범위한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됐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은 [[주체사상]]이 사회에 확산하며 [[김정일]] 후계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나 동구권 유학 경력이 있는 이들에겐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 내에서 유학생들의 부적응 사례는 지속적으로 있었으며,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이다. 막내 동생의 죽음 이전 김만철 가족은 [[일제강점기]]때 아버지의 항일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에선 좋은 출신 성분으로 인정받았다. 김만철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평양의대 다음가는 청진의대의 교수였다. 막내동생이 소련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출신배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생의 총살 직후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아버지가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의사 직함도 빼앗겼다. 문제는 일반 의사의 경우 [[북한]]에서 높게 쳐주지 않으며, 의사 인력이 넘쳐나는데다 무상의료라는 특성상 봉급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권 국가 및 국가주도 무상의료를 하는 국가에서 이러한 경향이 있는데, 공무원이다보니 사실상 봉급쟁이이고, 타공무직에 비해 실적 쌓기도 힘들다보니 공부잘한 중급 공무원 대접이상 받기 힘들다고 한다. 특히 공산권의 경우에는 의료인력도 많았으니... 이때문에 소련에서는 의사와 병원청소부의 월급이 비슷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만철이 우대를 받았던 이유는 의사라서가 아니라 '''대학교 교수'''여서인데, 그런 높은 자리를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한순간에 파직됬으니 상당히 억울했을만하다. 결국 동생의 죽음과 연좌제의 부당함을 겪은 김만철은 이때부터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