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옥(군인)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 [[장교]]가 되고 나서 인사 실무자의 착오로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육군 제100 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이 제100 보병대대는 이른바 "니세이(Nisei) 부대"로도 불렸는데, 이는 교포 2세대를 뜻하는 일본어 '니세이(にせい)'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대 명칭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대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의심 하에 [[일본계 미국인]]을 예방적으로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이 임박하자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침략군과 내통하여 정보를 제공하거나, 심지어 내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하와이 거주 [[일본계 미국인]]들 가운데는 [[주방위군]] 병사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심 때문에 이들은 모두 무장해제되어 격리되었고, 이어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이런 차별이 공식화되었다.[* 이는 미국 행정명령 역사상 최악의 1,2위를 다투는 조치이며, 멀쩡한 일본계 미국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백인 이웃의 냉대, 조롱, 린치를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조국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기존 [[주방위군]] 병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본토로 이동시켜 별도로 부대를 조직, 일본과 접촉할 일이 없는 유럽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산물이다. 그러나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해도 균일한 집단은 아니어서 부대 편성시에 갈등도 있었다. 당시 일본계 미국인은 크게 [[샌프란시스코]] 중심으로 미 본토에 살던 집단과 [[하와이]]에 살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생김새만 비슷하지 정서가 꽤나 달랐다. 미 본토 출신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반해, 하와이 출신들은 일본과는 무관한 '[[하와이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실례로 본토 출신 상병이 일본어로 군인답게 행동하라고 지시하자 하와이 후임들이 하와이 슬랭을 쓰며 대들고 린치하는 하극상이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김영옥이 지휘하기에는 한국계에 대한 편견이 없던 하와이 출신 니세이들이 좀 더 수월했다고 한다. 당시 대대장을 맡은 패런트 터너(Farrant L. Turner) 중령도 하와이 [[주방위군]] 출신이어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영옥이 원한다면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김영옥은 "여기엔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그냥 붙어있었다고 한다. 추후 김영옥 선생의 패기와 솔선수범에 감복한 일본계 병사들은 그를 큰형처럼 따랐으며, 돌아가시기 전 행사 영상을 보면 일본계 노병들이 그를 극진히 에스코트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쨌건 다수를 차지하던 하와이 출신 니세이들은 특히 바다 수영과 험한 화산지대의 야외 생활로 단련되어 매우 강인하고 터프했으며, 김영옥이건 하와이 출신이건 본토 출신이건 미국인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매우 강렬하여 이들은 대단한 정예부대로 성장한다.[* 일본계라는 차별과 멸시를 떨쳐내는게 컴플렉스이다 보니, 이런 니세이들은 모국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이들 니세이 부대원들에 대한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JAP'이었으며, 1960년대에 미국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제야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제100 보병대대는 1943년 7월에 대대 깃발과 모토("Remember Pearl Harbor")를 받았으며, 8월에 유럽 전선으로 출정하여 미 육군 제5군에 배속된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북진했고, 1944년 초부터 유명한 [[몬테카시노 전투]]에도 투입된다. 이들은 갖은 멸시와 차별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대단하여, 전선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용맹함으로 금새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1943년에만 병력의 60%가 사상자가 될 지경이었다. 김영옥도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 일대의 야간 전투를 치르면서 2개 분대만을 데리고 독일군 기관총 진지 여러 개를 제압해 [[은성훈장]]을 받았으나, 허벅지에 총상도 입어 약 1달간 후송되어야 했다. 이후 치료받고 돌아온 병력을 합쳐 약 650명으로 1944년 초 [[몬테카시노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여기서도 독일군이 완강하게 방어하는 몬테카시노에서 2주 반만에 90%의 사상자가 나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나오와서 제100 보병대대는 별칭으로 "퍼플 하트[* [[https://en.wikipedia.org/wiki/Purple_Heart|전상장]]. 일정 수준 이상의 적 공격에 의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한 미군 장병에게 수여하는 [[훈장(상훈)|훈장]]이다.] 대대"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러다 보니 부대원들도 자신들처럼 과감하게 몸을 내던지지 않는 장교들은 멸시하고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일부 백인 장교들이 후방에서 돌격 명령만 내리면 [[피진 잉글리시]]로 '네가 가면 나도 간다'고 말대꾸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옥은 항상 솔선수범하며 자신보다 부하들의 안위를 신경썼기 때문에, 니세이 병사들도 그를 '사무라이 김'이라고 부르면서 철저히 신뢰하고 복종했다. 1944년 5월이 되자 미군 제5군은 [[로마]] 해방 계획을 새우고 있었는데, 이때 독일군의 적정 파악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이때 야전군 사령부에서는 예하 부대들에게 독일군 포로들을 잡아오라고 닦달하였다. 이때 김영옥은 중위로 대대 정보참모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자원하여, 기어이 일병 한 명만 대동하고 독일군 2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본인 스스로 "밤에 오히려 경계가 심하니까 경계가 심하지 않은 아침에 가면 되잖아?"라고 했다. 실제로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간이 아침 직전의 새벽녘이다. 해뜨기 직전이라 긴장도 풀리고,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직전이라 매우 깜깜하다. 때문에 침투작전도 주로 이 시간대에 시도한다.][* 자서전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당시에 서로의 방어선에 있던 독일군, 미군 모두 야간에 집중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밤을 새서 그런지 곯아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이를 노리고 평소에 자기를 잘 따른 [[병사]]들 중 한명을 데리고 [[지뢰]]밭을 기어서 독일군 참호로 들어갔다. 김영옥에게 붙잡혀온 독일 육군은 김영옥과 같이 간 병사가 자기 입에 총을 집어넣을 때까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원하는 정보를 얻은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크게 기뻐하며, 직접 [[수훈십자장]]을 주기로 결정한다.[* 마음 같아서야 최고 훈격인 [[명예훈장]]까지 주고 싶었으나, 이는 본국에 상신하여 [[대통령]] 재가까지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 재량으로 줄 수 있는 [[수훈십자장]] 수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 훈장 수여식은 약 1달 뒤인 [[로마]] 해방 이후에 열렸는데, 이때 클라크 장군은 김영옥이 몇 달 전에도 [[은성훈장]]을 달아준 동양계 장교임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은성훈장]]에 이어 [[수훈십자장]]까지 받는 김영옥이 왜 아직도 중위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김영옥은 정기 진급심사에서 번번히 탈락했다고 대답했다. 클라크 장군은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 김영옥에게 꽂아주면서 대위 진급까지 즉석에서 시켜줬다. 이러한 클라크 장군과의 인연은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6.25 전쟁]]까지 이어진다. 김영옥이 후일 [[6.25 전쟁]]에 투입되기 전 [[도쿄]]에 잠시 머물 때 [[제국호텔]]에서 미군 고위 장교단의 리셉션이 열렸는데, 당시 UN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직전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은 김영옥을 금세 알아보고 한참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후의 유럽 전선에서 제100 보병대대는 본국에서 증원된 또 다른 니세이 부대인 [[제442연대전투단]] 소속으로 편입되어 보충을 받고 계속 격전을 치렀다. 이 연대전투단의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도 전의가 충만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연대 모토도 "Go for Broke!"[* 하와이 도박장 속어다. 뜻은 올인, 한마디로 박살날 각오로 덤빈다는 뜻이다.]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해방 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도하 작전을 일부러 2번 실패한 뒤에 3번째에는 진짜로 밀고 들어가 버려서 전사자 단 한 명도 없이 [[피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김영옥은 전선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독도술에 능하며 기상천외한 전술로 상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전황이 정체상태에 빠지자, 제442 연대전투단과 제100 보병대대는 [[프랑스]] 전선으로 전환 투입되는데, 여기서도 김영옥은 미군 초유의 '[[반자이 돌격]]'의 주인공이 된다. 비퐁텐(Biffontaine)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 들고 [[독일]] 육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다 총에 맞자, 이에 울컥한 소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 지르며 기관총 진지에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서 방어하던 [[독일 국방군|독일군]]들을 충공깽에 몰아넣었고,[* 그러나 회고록에는 이 돌격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병들이 찌른 것은 나무 울타리여서 찰과상 때문에 다친 보병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진짜 기관총 진지를 침묵시킨 것은 뒤에 서술한 김영옥 소위 자신이 까넣은 수류탄이라 한다.] 김영옥 또한 사실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진지에 까 넣어 부대원을 엄호하기도 했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돌격]]으로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지금도 비퐁텐에 있는 [[교회]] 벽에는 그와 제100 보병대대의 무훈를 기리는 [[http://image.jimcdn.com/app/cms/image/transf/dimension=480x480:mode=fitin:format=jpg/path/s0b51804ff11f122d/image/i10b40fccf06891de/version/1391503199/image.jpg|명패가 걸려있다]]([[https://www.google.com/maps/@48.2118187,6.8051968,3a,15y,306.51h,86.26t/data=!3m6!1e1!3m4!1sM7CC-2WQ5Cij0wi5jf03GQ!2e0!7i13312!8i6656|구글맵]]).] 이후 제100 보병대대가 비퐁텐에서 포위당해 전투를 치르다 김영옥은 총탄 3발을 맞았으며, 숲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라 무려 4일만에 응급치료소로 이송될 수 있었다. 그 동안 이미 출혈도 상당했고 염증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페니실린]] 덕택에 겨우 고비를 넘었다. 그리고 [[벌지 전투]]로 후방에 있던 부상병들이 다시 전방으로 소환될 때 제100 보병대대로 복귀하여 프랑스 남부 해안의 이탈리아 접경지대를 방어하였으나, 이 지역은 계속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본국으로의 장기 휴가를 신청하고 1945년 2월에 다시 부대를 떠나게 된다. 이 무렵에 김영옥이 휴가를 신청한 것은 당시 연대장이 교체되기 직전이었는데, 새 연대장이 김영옥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대대장이 김영옥에게 겸사겸사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했던 것이다. 김영옥은 이 충고를 받아들여 곧 예정된 소령 진급도 마다하고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나는데, 오히려 신임 연대장은 김영옥을 소령으로 진급시키고 제100 보병대대 대대장 지휘도 맡길 요량이었다고 전후 예편한 뒤에 직접 만나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110321/1/BBSMSTR_000000010481/view.do|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약 이대로 되었다면 미 육군 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야전 대대장 기록을 더 일찍 누릴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김영옥은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금의환향하여 가족 및 지역사회 한인들과 상봉하고 시간을 보낸 뒤, 원대복귀 준비를 하였으나 1945년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원대복귀가 취소된다. 이후 북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신병훈련소 작전참모로 발령되어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의 일본 상륙을 준비하던 제91 보병사단에 합류하라는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이어 8월에 일본마저 항복하자 전속이 취소되었으며, 계속 신병훈련소에 근무하다가 [[1946년]]에 [[전역]]을 신청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