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규 (문단 편집) === 생전 === 박흥주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의 말에 따르면, 김재규는 인망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중앙정보부장에 부임하고 난 뒤 [[남산(서울)|남산]]의 고문실을 없애고 강압수사 금지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비대해진 기구를 축소하거나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을 개편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의 퇴직기금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10.26 사건]] 당시의 8억 원이면 정말 큰 돈이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044385|오마이뉴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 순사가 조선인 나무꾼을 구타하는 걸 보고 '이 순사 도둑놈이다'라고 했다가 유치장에 갇힌 적이 있다.[* 아버지가 찾아오자 풀어줬다고 한다. 출처는 안동일 저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첫인상은 겸손하고 정중하였으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하였다. 김재규의 또다른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면회한 뒤 "아주 훌륭한 인물"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를 나라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라 평가하며 안중근 의사와 역사적으로 같게 평가받을 인물이라고 말하였다.[[http://m.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055#_enliple|#]] 다시 말해, 네티즌들이 [[안중근]]에게 비교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 김재규의 최측근들 조차도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 그를 [[부마항쟁]]에서 만났던 이는, 최루가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를 그가 구하려고 애썼다고도 말한다.[[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50|#]] [[장준하]] 의문사 이후 그의 식솔들에게 조그만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손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일요신문 1996년 1월 21일자 2~3면 기사에서 윤보선 측근인 이한두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가 거사 21일 전에 이 사실을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욱하는 성격이 발동해서 바로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지위를 막론하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10.26사건 이전인 1979년 봄부터 '자유 민주주의', '위대의', '민주민권자유평등' 등의 휘호 6점을 남겼다고 한다. 1972년 3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유신헌법을 3번이나 읽어 본 뒤 불같이 화를 내며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것이 무슨 헌법이냐? 독재하자는 것이지!"'''라고 소리치면서 헌법책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https://youtu.be/mcgzsyDmppU|#]] 이 당시에 3군단장에 근무한 사람 증언에 의하면, 이거 만든 사람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단다. 1979년 12월 1일 변호인단과의 3차 면담에서 김재규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7년 감옥에 갇혀 있는 김대중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긴 뒤 모친에게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을 때 일어서서 차렷자세로 받았고, 다른 사람한테 박정희를 지칭할 때는 항상 존칭을 썼다고 한다.[* 심지어 [[10.26 사건]]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항상 "대통령 각하"라고 존칭을 쓰면서 말한다. 또 궁정동에 대한 이야기는 심지어 재판정에서 박선호의 증언을 제지하면서까지 막았다. 당시 [[박정희]]조차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생아 문제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에도 "남자의 허리 아래는 거론하지 말라"[* 이는 [[이토 히로부미]]도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토는 생전에 매우 문란한 인물이었다.]고 일축할 정도로 당시 시대에 남자의 성생활 문제를 언급하는 게 금기시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남은 여생을 박정희 무덤에 묘막을 짓고 시묘하며 보내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또 다른 증언으론 박정희를 죽이고 자신도 박정희 무덤에 가서 자살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이 말을 했던 시점은 10.26이 벌어지기 전이기에, 최종적으론 시묘살이를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간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115997&viewType=pc|#]] 실제로 김수환 추기경 역시 김재규가 자신의 입으로 친형제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회고했다.[[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190618&path=200404|#]] 그러나 김재규는 10.26 이전에 수차례나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고, 김재규의 수사를 총 지휘한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김재규의 언동에서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목격한 국무위원들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고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는 증언 등 위의 언급을 반박할 행적들이 많이 존재한다.[[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70404.99002001133|#]][* 다만 이 부분은 유신 이후 박정희의 행보를 보고 김재규가 존경심을 잃어 태도가 변했다고 해석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실제로 김재규가 박정희의 여성편력이나 최태민에 대한 태도 등을 보고 박정희에게 실망했고, 이것이 10.26의 원인이 되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박정희와 친형제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사실로 김재규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친해진 김계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증언은 많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말(회고록)이다.‘1965년 4월 대통령이 제1군사령부 시찰차 원주에 오셨다. 서울 상경 길에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재규, 저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고향집 집안 막냇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0910/57562066/1#|기사]] 김종필도 둘이 굉장히 친밀하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규는 나와 동갑이지만 육사는 박 대통령과 동기생(육사 2기·46년 입교)이다. 고향도 경북 구미로 박 대통령과 동향인데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한 경력이 있어 국민학교 선생님 출신인 박 대통령은 젊어서부터 그를 따뜻하게 살펴줬다. 박 대통령에게 김재규는 차지철과 비교(5·16 혁명 때 처음 만남)하면 인연과 세월의 깊이가 달랐다. 아랫사람을 앞에 두고 좀처럼 하대하지 않던 박 대통령도 “재규” “재규”하며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혁명 뒤 김재규는 6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에 이어 육군방첩대장, 보안사령관을 지내고 3군단장 중장으로 예편해 바로 유정회(73년) 국회의원이 됐는데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영전의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김재규처럼 30여 년을 알아온 인물을 옆에 두면 안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대통령이 그렇게 믿음을 준 자한테 목숨을 잃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0910/57562066/1|김종필 소이부답]] 실제로 그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냈고, 고도성장기의 요직 중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건설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 친밀함이 지나쳐 박정희는 김재규를 친동생인 양 지나치게 격이 없이 대하고 혼내기도 했다고 한다.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 『네, 朴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 朴 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 어떻게 보면 朴 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 『네, 맞아요』 > - 김재규도 朴 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 『네, 그럼요』 > - 朴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61222249&nidx=22250|김계원 인터뷰]] 김재규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할 때 중앙정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놓았다. 의전과장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해군]] [[보병]]대령[*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 해체 후 해병대 인원들은 해군 상륙전 계열 병과 인원들로 서류상 변경되었다.] [[박선호]]는 그가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잠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이며,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는 [[사단장]] 시절 그의 [[전속부관]]이었다. 김재규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최초로 명예면관[* 예편과 비슷]을 당한 장교이기도 하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6월, 군경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자기 부하를 강제로 연행하려는 [[미 육군]] 장교와 대립각을 세우며 칼로 위협하다 면관을 당한 적이 있다. 이후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와 [[대륜중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제자 중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다. 위에서 말한 박선호와 전 국회의장 [[이만섭]][* 이만섭이 중학교 3학년때 왔었다고 한다. 본인이 언급한 부분으로 김재규가 이만섭 본인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등이 그 예다. 그러나 면관 1년 4개월 만에 군에 복귀하였다. 정부수립 초기 군과 경찰은 서로 총질까지 하는 등,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전부 좋지 않은 건 아니고 광복군 출신과 일제 순사 출신과의 사이.] 김재규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유신독재 시절 "데모하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지시를 대학총장들에게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어떤 대학총장에게는 "학생을 잡아가라고 하는 사람이 스승이냐!!!"라면서 꾸짖기도 하였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358732|김재규의 지인인 김진우 전 판사가 주진우 기자와 한 인터뷰]]에 의하면[* 인터뷰의 출처는 2005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행한 <기억과 전망> 제12권의 인터뷰 기사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김진우가 본 인간 김재규']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박정희는 김영삼을 구속하라고 지시했으나 김재규가 설득하여 지시를 철회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9년 시베리아 철도사업의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김재규에게 차관보를 보내 업체선정에 대한 로비를 하였으나 김재규는 "난 정책만 결정하지, 이권에는 개입 안 한다"며 로비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외에도 김재규의 종친회 부회장이 삼양라면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재규에게 삼양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으나 바로 돌려준 적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누이동생을 통한 로비조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78년 말 유신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던 시절, 김진우 전 판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며 "데모한다고 중정에서 막 잡아넣으면 안 된다. 학생들을 석방하고 학교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러자 김재규는 맞장구를 치며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 같느냐? 나라를 걱정해서 데모도 못 하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국가가 위급하면 나라를 지키느냐?"고 말하면서 그런 자신의 뜻과 다르게 장관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김진우 전 판사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김재규는 부산에서 기관장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 절대로 국민들에게 총을 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민들도 군인들에게 잘 협조하도록 당부하여 무고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힘쓰기도 하였다. 회의가 끝날무렵 김재규는 "이런 상황에서는 '[[10.26 사건|제3의 길]]'밖에는 없다"는 말을 남긴다. 부산지방법원장은 김재규가 말하는 제3의 길이 무엇인가 의아해 했지만 [[10.26 사건]]이 터진 뒤에야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김진우 전 판사는 1970년 김재규가 충의공파 초대 종친회 회장을 맡던 시절 처음 알게 되었는데, 김재규의 첫 인상은 친절하고 당당한 사나이였다고 회고한다. 종친회 일로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듣기싫은 말을 여러차례 하여도 김재규는 조용히 들어주었고 나중에는 격려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1976년 김재규는 김진우에게 중앙정보부의 특별보좌관 직을 제의하며 자신은 중앙정보부를 해외정보 업무기능의 비중을 높인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김진우는 고사하였지만, 훗날 자신이 그 직을 맡았다면 김재규를 따라갔을 지 모른다며 아찔해했다고 한다. [[이철]]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한 후 김재규는 자신의 선산학교 후배인 고교 교사에게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들은 의로운 일을 한 사람들이며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박정희에게 분개하였다고 한다.[[http://m.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423#07hq|#]] 참고로 [[이철]]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판결을 받기까지 했던 사형수였다.''' 따라서, [[박정희]] 관련 인사에게는 인식을 좋게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는데, 김재규만큼은 좋은 평가를 했다. [[10.26 사건]] 4일전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부마민주항쟁]] 관련하여 박정희에게 직언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은 무거운 세금과 잘못된 시정[* 이 중 하나는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고 한다.], 낮은 임금과 제약받는 노동권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직언한 것이다.[[https://news.v.daum.net/v/20191001211817747|#]] 그러나 박정희에겐 [[우이독경]]. 소 귀에 경 읽기였고, 결국 [[10.26 사건|4일 뒤...]]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박정희]]의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였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http://www.ahnsamo.kr/news/69488|#]] 사형 직전까지 쓴 옥중 수양록을 보면, 본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더라도 동조한 부하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에서 자기보다는 부하들을 위해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법정에서도 본인은 죽더라도 부하들은 선처해달라며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여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김재규의 부인인 김영희씨가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7347|#]]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장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의 최후 진술) >문제는 밑에 친구들인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살리고 싶다. 법도 정상참작이 있을 법한데... [[관세음보살]]님 저 젊은 사람들 살려주소서(1월 21일) >박흥주 대령 살릴 길 없겠는가. 한량없이 마음에 아프고다. 박선호 군 선량한 얼굴, 경비원들 저 무심한 표정들 살리고 싶다.(1월 23일) >[[부처님]]께 서원한다. 박선호, 박흥주 외 경비원 일동, 김계원, [[정승화]] 장군 극형만은 면제되게 해 주십시오.(1월 24일)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 >김재규 옥중수양록 >제 부하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습니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나보다는 그들(부하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주십시오. >-------- >안동일 변호사와의 접견[[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8/2017052801948.html?Dep0=twitter&d=2017052801948|#]] 서명숙 현 제주 올레 이사장이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사기 혐의로 들어온 한 ‘장군의 부인’을 만난다. 이 장군의 부인은 수감 중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죽인 이가 다름 아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소식에 안면을 바꾸었다고 한다. '김재규 장군이 그랬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서명숙에게 김재규가 군 시절 얼마나 참된 군인이었는지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한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21781|#]] 이 사람이 세운 학교도 있다. 지금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중경고등학교]]가 그 학교로, 원래는 서빙고동 지금의 [[한강중학교]] 위치가 학교 위치였다. 중경고등학교는 설립 당시에는 군 간부 자녀 전용학교였던 걸로 유명했는데, 최초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100100209204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10-01&officeId=00020&pageNo=4&printNo=16000&publishType=00020|#]] 덕분에 [[박정희]] 정권 당시 후덜덜한 빽을 지닌 자녀들의 총집합소 비슷한 곳이 되었던 과거가 있다. 그 시절에 학교 [[스쿨버스]]가 청계고가차도[* 마이크로버스 이상은 통행금지였다.]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는 [[도시전설]]이 있고, 지금 [[육군사관학교]] 비슷한 스타일의 [[교복]]은 [[폭풍간지]]였다고. 그런데 10.26 사건 후 학교 부지가 몰수크리. 마침 중경고 근방에는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고등학교]]가 있었고, 한강중 근처에는 [[용강중학교(서울)|용강중학교]][* 당시에는 용산여자중학교.]이 있었기 때문에 두 학교 위치를 바꿔버린 것.[* 하필이면 [[한강중학교]]가 이전한 곳에도 근방에 [[남중]]인 오산중학교가 있다. 이것 때문에 현재 한강중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다.] 그 와중에 교훈이며 교표며 싸그리 갈렸다가 [[1999년]]에 와서야 교훈은 원래대로 환원됐다. [[https://youtu.be/E0vjPdX1qlg|<사나이 결심>]]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99759&cid=58276&categoryId=58283|#]] 이 노래를 [[조용필]]이 불렀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김재규와는 무관하다. 조용필이 이 노래를 발표한 것은 1989년 9집 앨범을 발표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원곡이 따로 있는데, 1949년에 [[남인수]]가 발표한 '해 같은 내 마음'이란 곡이다. 이후 조용필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 목록에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조선)|김문기]]의 이름을 넣도록 하기 위해 학계에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 사육신 문서 참고. 이는 사육신만 알고 삼중신을 몰라서 벌인 촌극이다. 1950년대 말 대령 시절에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에게 브리핑을 하다가 실수를 하여 송요찬 장군이 그를 크게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욱한 김재규 대령이 '''욕을 퍼부으면서 "옷 벗으면 그만 아니냐!!"고 문을 걷어차서 나가버리는'''(!)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선 화도 못 내고 김재규 대령을 [[영창]]으로 보내버리려 했는데, 이를 [[이종찬]]이 말려서 육군대학 부총장 자리를 제의함으로 처벌을 피했다 한다. 다만, 이때는 송요찬 장군 본인의 무리한 요구도 문제였다. 김재규 대령의 사단은 당시 사단장이 다른 업무로 부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전 통보없이 갑자기 불시에 방문해서 김재규 대령에게 부재중인 사단장의 업무보고까지 요구하며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는데, 선술했듯 평소엔 온화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폭발하는 성격이 나온 것이다.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후, 김영희와 재혼하여 외동딸 김수영을 두었다. 그리고 당시 3대 [[요릿집|요정]] 중의 하나였던 선운각[* 선운각의 에이스 기생이 바로 [[정인숙]]이었다.]의 마담 장정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재규는 당시 유부녀였던 장정이가 이혼한 후, 서빙고동의 약 200평대 부지에 고급주택을 지어주었고 15년간 [[동거]]했다고 한다. 장정이는 선운각 마담으로 일하던 당시, '몸빼', '억척이'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희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안동일 변호사는 '''"안가에서 질펀하게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느냐"'''라고 했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5024/4|링크]] 사실, 그 시절에는 조선시대 혹은 전통시대적인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있어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남성이 [[첩]]을 하나 두는 것 정도는 큰 흠이 되질 않았는데,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박정희]]는 심했다고 평가했다. [[왕]]이 [[후궁]]을 두는 것 자체는 비판 받을 일은 아니지만, 채홍사를 통해 많은 여성을 궁궐로 불러들인 [[연산군]]은 비판을 받은 것과 비슷한 이유인 것이다. 김재규가 이를 생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지 않고 변호사에게만 털어놓은 것은 이런 파장을 의식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