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침유도설 (문단 편집) ===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 [[6.25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조선인민군]]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으며, 이는 개전 며칠만에 서울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남침유도설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의도적으로 한국군에 지원을 해주지 않아 한국군의 전력이 약해졌고, 그 결과 북한이 공격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실 이건 논박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설령 미국이 남침 유도를 위해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군사력 부족이 타당한 전쟁 명분이 될수 없으므로 결국 북한이 침략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왜 미국은 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는가?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직후 대규모 군축에 들어가며 잉여 군사장비가 말 그대로 넘쳐 흐르던 시절이라 한국이 요청하는 군사원조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지원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남침 유도설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한국, 정확히는 [[이승만]]의 비정상적인 군비지원 요구에 신물이 나있었다. 실제로 국군은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4,700여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미국 자체가 한창 군축중이라 일본에 주둔중이던 미 제24사단 전체에 대전차고폭탄이 18발뿐이었을 정도였으니 한국군의 군비를 마냥 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에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북 강경론은 미국은 물론이고 UN 한국소위원회조차 우려를 표하며 한국군의 탄약 불출에 제동을 걸 지경이었다. 당시엔 중국이 무너진 상태였고,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핵 우위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 정부나 서로서로 고강도 도발 발언을 쏟아내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조마조마한 것도 당연. 이런 상황이니 미국은 '''한국이 북침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치고 있었고, 군부도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외치는 중이었다. 실제 '''1948~49년에 걸친 38선 무력충돌을 살펴봐도, 남한쪽의 선제공격이 상당 부분 있었다.''' 한국 정부가 북진통일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내부 정치적 목적 및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설과 실제 북진을 하려고 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제로 북진 의사가 있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행위가 미국에게 이승만이 북한을 선제공격해서 북진통일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에 실로 얼토당토 않은 군사원조를 요구했다. '''전차와 전투기[* 심지어 미국에서도 당시 최신예였던 제트 전투기 P-80 슈팅스타를 요구했다. 당장 남한에는 가미카제 훈련받던 조종사 후보들 몇명밖에 안남았고, 당시엔 P-51 머스탱이나 F4U 콜세어가 현역이던 참이었다.] 각 수백 대에 잠수함과 구축함급 이상의 해군 함정 상당수[* 중순양함급 함정도 수 척을 요구했었다.]'''를 요구했는데, 이런 원조 요구를 듣고 미국은 이승만이 북진하겠다라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런 장비들을 구입이나 매매가 아니라, 군사원조랍 시고 공짜로 퍼주라 한 것이다.[* 심지어 북한도 탱크 및 미그기를 도입하기 위해 스탈린을 조르고 졸랐지만 당연히 무상지원은 묵살당했고, 텅스텐 등 지하자원을 팔아다 도입한 것이다. 그나마 당시 소련은 전후 복구를 위한 자원 + 도태된 구형 무기처분 + 공산주의 큰형님 이미지를 유지시키기 위에 싼값에 대충 넘긴 것이고, 북한도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이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과 중공업에 집중투자한 공장이 남아 저정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지하자원이라곤 석탄 조금에 발전량도 모자라 북한에 전기를 빌려쓰던 가난한 남한 입장에서는 무상지원 말고는 답이 없었다.] 당연히 미국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손원일 함장이 쓸만한 전투함을 산다고 했을 때 정부에서 지원금도 주고 국민들이 겨우겨우 번 돈 모아 사온 배가 순양함은 커녕 구축함보다도 작은, 싸게싸게 뽑아서 대충 연안방어용으로 쓰던 [[백두산함]]임을 생각하자. 아무리 군축중인 미국이라도 이런 장비들을 무료로 내놓으라고 하니 미국입장에서는 얼척이 없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수백, 수천톤 하는 무기를 땅도 아닌 바다건너 나라에 주기위해 수십척의 수송선을 이용해야 할 것이고, 그 배에 들어갈 기름이며 수송선 운용인원에게 줄 월급을 계산한다고 하면 당연하지만 무상으로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평화유지군 등으로 군을 파견한 이후 철군할때 대부분의 무기를 현지에 그냥 버려두거나 암암리에 판매하거나 현지 군경에게 판매 혹은 지원 경우도 존재한다. 국내로 반입하면 수송비도 많이들고, 절차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전쟁 이후 랜드리스로 소련에 넘겨준 구축함들을 한국 해군에 무상으로 넘겨주는가 하면, [[레바논 내전]]당시 평화유지군이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가 무기밀매상 손에 들어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거기다 무기는 식량처럼 제공한다고 끝이 아니라 미국이 운용인원들을 교육시켜주고 운용에 필요한 물자까지 제공해줘야 하는 상황에서 상술한대로 현대전 군사훈련은 거의 되어있지 않은 국군의 수준을 보고도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니 미국입장에서 주겠는가. 추가적으로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에서야 모두가 한국전쟁의 전사를 익히 알고 있으니 당시 미국의 대응을 한목소리로 비난하지만,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아직 국군 창설도 채 3년이 되지 않아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을리도 없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군사원조 요구를 수용하기는 커녕, 한국정부 자체 예산으로 시도하는 무기 도입이나 일본군이 남기고 간 폐기물자 도입에도 태클을 걸었다. 덕분에 공군은 멀쩡한 전투기 놔두고 [[캐나다]]에서 연습기 사와야 했고, 해군은 퇴역해서 스크랩 처분 기다리던 연안초계함 사들고 와야 했다. 물론 방어전에 사용할 무기는 제공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57mm 대전차포이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서울]]은 3일만에 함락당했고, 전쟁 2달만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몇몇 국군 부대의 결사적인 저항과 주일미군을 선두로 유엔군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유엔군사령부|유엔군]] 참전에는 소련의 묵인도 컸다. 일단, [[국공내전]] 패배로 [[국부천대|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나자]] 소련은 중국 정통정부의 권한([[상임이사국]])을 [[중국|중화인민공화국]]에게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국가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소련은 유엔 회의에 보이콧을 선언했고 마침 그 사이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곧바로 파병을 결의한 것이다. 당대에는 이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냉전이후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애초에 스탈린의 의중 자체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는 것을 유도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엔과 미국이 한국전에 집중하는 동안 소련은 비교적 동유럽에 집중할 수 있고 스탈린 역시 유럽을 더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해준 것은 미군 개입 이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접 때문이었는데, 미국이 한반도에 발이 묶이길 기대했다면 앞뒤가 안맞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예상 외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자 스탈린이 정신승리를 시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다른 의견으로, 스탈린은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 그거대로 좋고, 미군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하면, 중국군이 순망치한으로 개입할테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소모시키면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게 되니까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으리라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스탈린 생전에는 계속 딴죽걸면서 휴전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탈린이 죽고나서 매우 빠르게 휴전협상이 진행되어서 전쟁이 끝났다.] 물론 소련이 UN 회의에서 반대를 표명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참전했겠지만, 그 사이의 지연이 전황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었을 전황은 절대 남한과 미국에게 유리했을 리 없다. 즉, 45~50년사이 한반도의 방위를 관리할 미군의 대비는 '남침유도'는 커녕, 제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정도로 보아야 합리적이고, 이는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 명백한 전략적 실수였다는 것만 부각한다. 실제로 이시기는 겉으로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을뿐 냉전은 진작에 시작되었고, 소련이 직접 또는 공산권 동맹을 통해 바다로 나갈수 있는 길목에 있는 나라들(그리스,베트남,한국 등등)은 전부 전쟁터가 되었으며, 그 중요한 길목중 하나인 한반도에서 국지전을 억제할 충분한 전력이 있었어야 북한에 반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실제는 미군이 참전하고도 [[인천 상륙작전]] 전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