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욕시 (문단 편집) == 역사 == 오늘날의 뉴욕으로 알려진 곳에 처음으로 도달한 유럽 국가는 [[프랑스]]였다. 16세기 초, 중엽 당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와 경쟁 중이었는데, [[아즈텍]]과 [[잉카]]를 정복하고 다량의 금은을 수탈하고 있던 카를에게 경쟁심을 느낀 프랑수아가 1524년에는 조반니 다 베라차노를 후원하여 오늘날의 뉴욕을 탐험하게 한 것. 이때 조반니는 프랑수아가 즉위 이전 프랑스 서남부의 [[앙굴렘]] 백작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하여 자신이 '발견' 한 땅을 '누벨 앙굴렘'. 즉 '새 앙굴렘' 이라 불렀으나 정착지를 세우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고, 프랑수아와 그 뒤를 이은 [[앙리 2세]]는 '신대륙' 개척보다 합스부르크와의 싸움을 우선했으며 앙리 사후에 [[위그노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끝내 프랑스의 정착지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날 뉴욕에 세워진 현수교 가운데 하나는 조반니 다 베라차노를 기념하여 '베라차노 다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파일:1660 New Amsterdam.jpg]][* 1660년의 뉴암스테르담은 맨해튼 섬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이 정착지의 방어벽 자리로는 월스트리트의 도로가 지나간다.] 뉴욕에 정착지라 할 만한 본거지를 차린 것은, 1624년 맨해튼 남쪽 지역에 도착한 [[네덜란드]] 선박의 선원들이 그 지형이 암스테르담과 비슷하다 하여 처음 '''뉴암스테르담'''으로 칭했으며, 1626년에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 섬을 원주민들로부터 '''24[[달러]]'''에 사들이면서 문서 상에 '뉴[[암스테르담]][* 그래서인지 현재 맨해튼에는 "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길이 있다.]'으로 표기했다. 정확히는 네덜란드 돈으로 60길더 가치의 물품을 준 것으로 19세기의 미국 역사가들이 이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미국 돈 24달러로 바꿔 써서 유명해졌다. 만약 현재 가치로 당시의 네덜란드 60길더를 바꾸면 1600달러가 된다. 흔히들 이를 두고 "그때 1달러 어치만 사뒀더라면." 하는 농담 식으로, 역사 속의 빅 딜 중 하나로 많이 언급된다. 하지만 맨해튼 부동산을 사들인 장본인인 네덜란드인들은 2차 [[영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뉴암스테르담을 별 가치 없는 땅으로 취급하여 영국에게 넘기고''' 대신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현 말루쿠우타라 주)의 룬(Run) 섬을 얻어냈다. 한편 이 빅딜에 대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미국 동해안 원주민 부족들과의 거래 관계는 현대인들이 저런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 현대적인 부동산 거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맨해튼 섬의 원주민들은 거래 이후에도 계속 인근에 남아서 살았으며, 네덜란드 인들도 굳이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같이 살았다. 즉 60길더 어치의 물품은 네덜란드 인들이 맨해튼의 원주민들 사이에 살면서 무역할 권리를 산 것이고, 또한 이웃 라이벌 원주민들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이기도 했다는 것. 이런 식의 거래는 아메리카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에 진출한 곳에서 흔히 있던 유형의 거래였다. 현지의 유력자 중 무력이 필요한 이들과 접촉하여 군사적 동맹을 맺고 안전을 보장 받아 정착한 다음 요새와 도시를 짓고 동맹인 부족과는 거래를, 동맹과 적대하는 부족은 정복하는 식으로 확장하는 것. 그 외에도 원래 살던 부족과 적대하던 부족이 위장한 다음 거래했다는 썰도 있으나 이쪽은 별 근거는 없는 주장이다. [[월 스트리트]]의 전설적 투자자 존 템플턴은 이 유명한 예화를 거꾸로 이용해서 복리의 힘을 설파한 적이 있다. 만약 그 24달러를 가지고 지금까지 연 8%의 복리 수익을 얻었다면 오늘날엔 수치상 '''100조 달러'''(한화 약 '''11경''' 원)가 넘는 돈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미국 국부는 한국 돈으로 9경쯤 된다. 물론 연 8%의 이익을 4백 년간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하며(실제 역사상 불황을 보아도) 템플턴의 방식은 금융 자체가 축재 수단이 된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말은 다른 시각에서 (꾸준한) 재테크의 위력을 전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후 1664년, 제2차 영란 전쟁에서 영국이 이 지역을 네덜란드로부터 얻으면서 [[암스테르담]] 대신 영국 지명인 [[요크]]가 대신 붙어[* 요크가 붙은 이유는 당시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이자 훗날 [[제임스 2세]]가 되는 요크 공작 제임스의 작위명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명칭이 되었다. 정착촌은 거듭해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영국인의 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1664년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영국은 섬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꿨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원주민과 영국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벽(wall)의 잔해 위에 깐 포장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즉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되었다. 사실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향료 무역에서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인데, 향료 무역의 주요 거점인 룬 섬 지역[* [[대항해시대 온라인]] 유저에겐 익숙할 지역인데, 바로 '육메'([[육두구]]-[[메이스]])를 퍼오는 그 지역이다.]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667년에 브레다 조약으로 룬을 영국이 포기하는 대신 뉴암스테르담의 영유권을 차지하게 된 것. 그러다 1673년 제3차 영란 전쟁에서 다시 네덜란드가 점령했을 때 네덜란드 총독이 자국의 자유 수호자인 오라녜(Oranje, 영어로 Orange란 뜻)공 빌렘1세의 명칭을 붙여 '''뉴오렌지'''로 개칭했으나, 바로 다음 해인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수리남은 네덜란드에, 영국인들이 재차 명명한 '''뉴욕'''은 영국에 귀속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1746년 이웃 [[뉴저지]]에 [[프린스턴 대학교]]가 설립되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1754년에 [[13개 식민지]] 5번째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교]]가 세워진다. 1789년 [[미국]] 독립 이후에는 1790년까지 미국의 공식 [[수도(행정구역)|수도]]였다. 현재 뉴욕 시는 5개의 자치구를 가진 미국 내 유일한 도시인데 이는 19세기부터 일어난 주변 지역 편입에 의해 이루어졌다. 원래 [[브루클린]], [[퀸스]],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는 별개의 다른 도시였다. 이 편입은 1800년대 중반, 브롱스의 일부 지역의 편입에서부터 시작되어 1898년 [[브루클린]],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와 [[브롱스]]의 남은 지역을 모두 편입하면서 종료되었다. 한때 [[환경미화원]]들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임금 인상과 근로 시간 조정을 조건으로 파업을 했는데 단 하루 만에 미화원들의 조건을 들어줘야 할 정도로 쓰레기가 엄청나게 쌓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화원들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뉴욕시 위생국 경찰대]]라고 위생국 전담 경찰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