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카라과 (문단 편집) == 역사 == 스페인의 식민지화 이전 지금의 니카라과 지역에는 니카라오족, 초로테가족, 미스키토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 발견된 이후 1524년 [[스페인]]의 정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 이때 격렬하게 저항한 니카라오(Nicarao)라는 원주민 종족의 이름을 따서 '니카라과'라는 이름이 생겼다. 니카라과 식민지는 여러 중남미의 나라들처럼 대농장주들이 원주민을 노예나 소작농으로 부려먹어 그 생산물을 수출하는 형태로 운영했다. 유럽인들의 이주로 [[천연두]]와 [[황열병]] 같은 [[감염병]]이 퍼지자 가뜩이나 강제노동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고, 노동력이 부족해진 백인 농장주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흑인노예들을 대거 수입]]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스페인이 니카라과와 제3국의 무역을 금지하자 농장주들은 이에 반발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1821년 니카라과는 타 중미 국가처럼 보수주의자들의 [[멕시코 제1제국|멕시코 제국]]의 한 부분으로 스페인에서 독립했다. 그러다 1823년 멕시코에서 떨어져나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과 함께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다 혼란 끝에 1838년 니카라과는 다시 중미 연방에서 독립한다. [[영국]]은 이 무렵 니카라과 동해안을 장악했으며[* 오늘날 니카라과 동해안에서 영어 크리올어를 적잖이 사용하고 개신교를 많이 신봉하는 이유다. 이 크리올어를 [[https://en.wikipedia.org/wiki/Miskito_Coast_Creole|모스키토 해안 크리올어]]라고 한다.], 북부 [[레온(니카라과)|레온]] 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니카라과)|그라나다]] 중심의 보수주의자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끼리 내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용된 [[미국]]인 백인 용병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 1856년 멋대로 대통령을 자칭한 적이 있었지만 군벌들에게 다구리를 맞아 쫓겨났고 보수주의자들이 집권했다.[* 워커가 니카라과에 입국한 후 쫒겨나기까지 벌어진 전쟁을 가리켜 [[필리버스터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니카라과에서 커피 산업과 바나나 산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신흥 소지주들은 감히 대지주들 땅을 뺏을 순 없었으니 원주민 땅을 뜯어갔다. 그러자 염료와 목축을 하던 대지주들도 커피와 바나나 재배를 시작했다. 1893년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성향의 장군 호세 산토스 셀라야(José Santos Zelaya)는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 일환으로 교회의 땅을 뺏어 커피 농장으로 만들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셀라야 장군은 자기 영향력을 서쪽의 과테말라로 확대하려다가 1909년 12월 오히려 자신이 실각했다. 그의 후임 아돌포 디아스(Adolfo Díaz)는[* 사실 디아스는 1911년 5월이 되어서야 대통령이 되었다. 셀라야와 디아스 사이에 집권한 전임자는 4명이나 있었지만 그들 모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다고 한다(...)] 국내 정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1912년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19년에 걸친 미국의 니카라과 간섭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니카라과 운하]] 계획에 관심이 있던 미국은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고,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장군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는 이에 저항해 여러차례 미 해병대를 공격했다. 1933년 미 해병대는 철수했지만 산디노는 이듬해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는 나중에 나올 [[산디니스타]]의 어원이 되었다.] 1936년 가르시아는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으며 193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6년 그가 암살당한 후에도 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와 그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연달아 니카라과의 권력을 잡았다. 소모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투자를 받고 인프라를 건설하는 등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그 과실을 전부 자기들이 독점하여 사회적 불만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 결성되었다. [[니카라과 혁명]]의 시작이었다. 소모사 족벌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기존의 기득권층은 위협을 느꼈고 소모사가 1972년 대지진 때 받은 지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자 소모사에 대한 불만은 더 높아졌다. 그리고 1978년 소모사가 자신에 반대하던 유력지 《라 프렌사》의 페드로 차모로를 살해하자 반 소모사 운동은 더욱 강해졌다. 1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혁명전쟁이 발발했고 1979년 7월 마침내 소모사 일당이 해외로 망명을 감으로써 혁명은 성공하여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때까지 니카라과는 5만 명이 죽고 전 국토가 황폐해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콘트라 반군의 발흥과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다시 3만 명이 더 죽는 처참한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산디니스타 혁명정권은 소모사의 친위대나 다름없던 헌병군을 해체하고 혁명에 참여한 타 정당들과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국가재건위원회를 구성해 토지 개혁과 국유화 등을 시도하였다. GDP의 41%에 달했던 소모사 일당의 소유 재산을 빼앗고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문맹퇴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1년도 안되는 기간에 문맹률을 50%에서 13%로 떨어트렸으며, 전국적인 의료보건제도를 도입하여 영유아 사망률을 크게 떨어트리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재건위원회내에서도 좌우간의 대립으로 반목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경제재건을 위해 쿠바와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나 이것은 오히려 미국이 개입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1982년 제재 조치를 취해 세계 최대 바나나 회사가 니카라과를 떠나 큰 타격을 주었다. 1983년에는 콘트라 반군이 니카라과 북동부 지역에 침입하여 산디니스타 정권의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면서 [[이란-콘트라 사건]]이라 불리우는 뻘짓을 감행했는데, 산디니스타를 엎기 위해 [[이란]]에 무기를 밀수출하고 그 대금을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콘트라 반군이 현지에서 현물세로 걷은 [[코카인]]까지 맡았다.[* 참고로 이 사건은 [[국제법]] 판례에서 Nicaragua Case로 유명한 사건으로, 니카라과의 요청에 의한 미국의 집단적 자위권 발동 주장을 부정했고, 미국의 반군에 대한 군사적, 준군사적 지원에 대해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 위반이라는 판시를 했다. 결국 1991년 니카라과에 친미정권이 수립되면서 제소가 취하됐다.] 미국의 개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83년과 84년 사이 콘트라 반군이 니카라과의 항구에 [[기뢰]] 부설하는 것도 도왔다. 산디니스타 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대신 [[소련]]과 [[쿠바]], [[불가리아]]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도 군사비 부담이 커져서 추가로 전선이 늘어나는걸 부담스러워해서 소극적으로 지원하는데 그쳤고, 쿠바와 불가리아도 지원을 했지만 두 나라 모두 당시 공산권에서 국력 규모가 큰 나라는 아니었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보탬은 못 되었다. 거기에다가 정권초에 베네수엘라나 멕시코도 니카라과에 대한 지원에 나섰지만 80년대 중반 이후에 이들 국가가 석유값이 하락하여 경제위기가 일어나자 지원이 축소되었다. 이런 판이니 니카라과의 경제는 막장이 되어 1989년 1인당 GDP는 1960년 수준까지 추락했고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환율이 1달러당 25,000,000 코르도바까지 올라갔다. 결국 소련의 지원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판에 냉전이 종식될 기미를 보이자 1988년 3월 산디니스타 정권과 콘트라 반군과 협상에 나섰다. 이후 1990년 2월 치뤄진 총선과 대선에서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잃고 비올레타 차모르가 당선되었다. 콘트라 반군은 그해 6월에 해산했다. 우파가 집권해[* 이 당시 비올레타 차모르의 야당연합에 공산당이나 사민주의 정당도 참여하는 빅 텐트 격인 선거연대가 이루어졌지만 절대적인 지분은 우익정당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산디니스타가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고 산디니스타 장교 몇 명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산디니스타와 보수여당간의 협약이 이루워져서 산디니스타도 제1야당으로써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했고 1980년대 당시 니카라과 대통령이었던 오르테가도 지속적으로 유력 대권주자로 나서며 대선에 출마했다. 다만 1980년대 후반 경제파탄으로 인한 기억과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기억 때문에 산디니스타는 계속 십수년간 야당 신세로 머물러있었다. 비올레타 차모르의 집권기간 동안 언론자유는 향상되었지만 이 시기 경제난의 완화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지만 당대 중남미가 그렇듯이 일단 물가상승률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산디니스타 정권 시절에 도입된 사회보장 정책이 축소되고 빈부격차는 악화되어가면서 산디니스타 혁명의 유산의 상당수는 뒤엎어졌다. 이로 인해 집권 중후반 내내 낮은 지지율에 시달려야 했고, 산디니스타와 협정을 맺으려 하자 미국 정부에서 대놓고 원조를 축소시키고 구 콘트라 계열 세력이 반발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나마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평화협정이 최종적으로 타결된 것이 성과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이러한 애매한 위치에 서있던데다가 경제정책의 실패 때문에 비올레타 차모르는 언론인으로써 탁월한 인물이라고 평가되기는 해도 대통령으로써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후 1996년 대선에서 다니엘 오르테가가 앞설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오르테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콘트라 출신 알레만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알레만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적으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고 도로 포장 등 공공투자가 진행되면서 경제는 차모르 정권 시절 때부터 나아졌지만 그 과실은 일부가 독차지했으며, 실업률은 여전히 13%에 달했다. 2001년 대선에서도 역시 오르테가가 집권하면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엔리케 볼라뇨스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며 집권 초반 이후로 개혁 드라이브를 타면서 과거사 청산을 명목으로 알레만 대통령을 구속했고,[* 나중에 알레만 대통령은 헙법재판소 판결에 의해서 풀려나게 되는데 오르테가와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썰이 파다하고, 실제 판결도 그리 공정하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서 집권당내에 불화가 일면서 집권당이 두쪽이 나는 일이 벌어졌다. 재임 후반기는 공공요금 인상과 내우외환의 연속이었고, 결국 면책특권이 박탈당하는 초유의 일을 겪었으며, 퇴임 후에 구속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임기 말년에 악명높은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도 많은 비난을 받는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의 분열에 힘입어 오르테가가 재집권하였고, 이후 친기업 정책[* 실제로 니카라과는 중미권에서는 파나마, 코스타리카와 더불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평을 받고 있다. 물론 치안이 상대적으로 좋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문제의 [[니카라과 운하]] 건설계획도 친기업적인 정책 중 하나다.]과 쿠바와 베네수엘라 등으로부터 의료와 석유지원을 받는 투트랙 전략으로 빈곤을 줄여나가면서 당초 경제파탄 우려를 기우로 만들면서 연 5%대 가량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했다. 결국 돌아온 오르테가는 2011년 대선에서 재선, 2016년에는 3선에 성공해서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는 중이다. 3기 집권기에도 주요 재정지원국인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에도 최소 연 4% 이상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등 거시경제정책은 그런대로 잘 수행한다는 평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니카라과 운하 건설 문제로 인해서 니카라과 운하 건설에 대한 여론이 반으로 갈라지다시피한데다가[* 니카라과 운하 건설을 하면 물류수송이 원활해지고 일거리도 많이 생기기 때문에 기업이나 일용직 노동자 입장에서는 이득이지만, 사업 특성상 상당수 주민들이 땅을 잃고 이주해야 하는데다가 토지 보상 계획도 체계적으로 수립되어있지 않으며 운하를 건설했을 때 숲을 베어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환경파괴 염려도 크다. 무엇보다도 운하를 잘못 관리했을 경우에는 수질오염 문제가 크게 발생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염려가 크다.] 농민들과 니카라과 운하 건설 예정지 주민에게 배신자, 중국과 기업을 위해 물을 팔아먹는 놈 소리를 들으면서 지지율이 상당히 떨어진 편이다. 그러나 대도시 지역에서는 여전히 지지율이 높아서 전체적인 지지율은 60%대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야권에서 '''오르테가에게 맞설 대안 후보가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기어이 70% 초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 사실 이는 2006년 대선을 앞두고 니카라과의 선거제도가 오르테가에게 유리하게 짜여지도록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니카라과의 선거제도는 결선투표제지만 35% 이상의 득표율로 2위 후보와 5% 이상 격차만 벌려도 당선될 수 있게 했다. 야당이 쪼개지면 그만이다.] 오르테가는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사실 여러 번에 걸쳐서 대통령 선거에 지속적으로 출마한만큼 성향이 지속적으로 온건해져([[브라질]]의 [[룰라]]와 비슷한 케이스다) 2000년대 중반 당시에 보수여당이 볼라뇨스 대통령 탄핵문제로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오르테가는 당시 유력 우파정당이었던 헌정주의 자유당과 협약을 맺고 사법제도를 개편하는 대신에 선거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개편했고 콘트라 인사도 영입했다. 거기다 집권 후에 빈민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정책이나 빈민촌 지역에 상하수도나 전기 등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을 펼치고 교육예산도 크게 늘리고 그렇다고 해서 대기업에 대해 뚜렷하게 압박하는 정책을 펼친 것도 아니기 때문에(오히려 주요 기업과 관계가 좋은 편이다) 야권의 지지기반 자체를 박살낸 것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부통령은 오르테가의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가 당선됨에 따라 세계 첫 부부 정·부통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2018년 4월에 연금개혁안을 시행하겠다고 했다가 반발이 거세졌고, 여기에 친정부 시위대의 멍청한 대응까지 겹쳐서 시위가 크게 번져서 현재까지도 반정부 시위대간와 친정부 시위대간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다가, 간헐적으로 경찰의 과격한 시위 진압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덧붙여서 정부측에서 무장경비대원들을 동원해서 시위 진압에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사실 의혹수준은 아닌게 실제로도 여당측에서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친정부시위대를 조직해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항하는 식으로 인력을 동원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고, 거기에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측과 경호업체들의 줄이 끈끈하기 때문에 경호업체 인력 중 일부를 끌어들인다는 썰이 이전부터 나돌고 있기는 했다. 진면목을 드러낸게 2018년도일뿐.] 사망자가 100명을 넘어서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연금개혁안이 취소되었기는 했지만 당연히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 [[다니엘 오르테가]]의 지지율도 크게 떨어졌으며, 오르테가 하야촉구 시위도 수만명 이상이[* 수만명이 적어보이는 것 같지만 니카라과 인구가 620만명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치이다. 한국으로 치면 수십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셈이다.] 참여하는 등 성황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희생자 규모가 수백명을 넘어섰고 사망자 수도 200명을 넘어서고 있는지라 국제적으로도 여러모로 압력을 받고 있고,[* 물론 근처에 이웃 온두라스나 과테말라처럼 대통령이 부패나 사회지도자 살해 등에 대해 대놓고 철판을 깔고 통치를 하는 상황이고(미국은 이에 대해서 별소리를 안했고 대선 불복시위가 벌어졌을 때도 침목을 지켰다) 그에 비하면 니카라과는 미국이 직접 개입했던 시절이나 오르테가의 당선여부를 놓고 압박을 가했던 시절이 개판인데다가 오르테가 2기 집권기가 그나마 니카라과 역사를 통틀어서 나았던 시절인건 사실이기 때문에 미국이 대놓고 개입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고위층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는 중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오르테가가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루 대통령처럼 불명예 퇴진할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권력욕이 대단한 오르테가의 성격상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지만 군대에서 퇴진을 권유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치안안정으로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던 경찰의 위상이 뒤통수나 치는 짭X들로 이미지가 크게 떨어지고 중립을 지키는 니카라과군의 이미지가 올라가는 효과도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농담같지만 '''진짜다.''' 시위의 발단이 된 연금개혁안 자체는 IMF의 조언을 받아들여 발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여서 지속적으로 사망자가 나오는걸 보았을 때 오르테가 정부가 경찰과 산디니스타 산하 단체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도 한데,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오르테가 정부 내에서도 각 조직들이 기득권 지키기를 하려고 하다보니까 통제가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르테가 본인은 산하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깽판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는데 본인의 명성에 타격이 가는건 둘째치더라도 본인이 이걸 시인하면 잃을 것이 많아지는데다가 숙청대상에 오를 산하단체들과 경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르테가 일가의 비리나 부정행위를 고발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얽혀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깽판을 부리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다.] 그래서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진행되려는 찰나에 무산되는 상황이 여러번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2018년 6월 15일에 니카라과 정부와 반정부시위대는 2개월 동안 진행된 시위를 끝내기 위해 대화를 하기로 결정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0153253|#]] 뭐 일단 협의에서 2021년으로 예정된 선거를 2019년도로 2년 정도 앞당기는 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협의안이 나온 이후로도 일부 지역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고 여기에 친정부 민병대와 경찰, 마약조직, 반정부 시위대 등이 얽혀서 부상자와 사망자가 정기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틈이 보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다 오르테가는 조기선거안을 거부하면서.[[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3&aid=0008694734|#]] 비난을 더 받고 있다. 2019년 2월 19일에 니카라과에서 반정부시위를 이끌던 야권 지도자 2명이 각각 200년(!!)이 넘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0644937|#]] 다만 2019년 들어서 다니엘 오르테가의 지지율이 다시금 50%를 넘고 산디니스타가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는 등 여유가 생기면서 야당과 대화에 나서면서 시위자들을 풀어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반정부시위에서 체포되어 수감된 모든 수감자들을 풀어준다고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3&aid=0009126962|#]] 니카라과 정부는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폐간시키고 있으며 결국 39년된 일간지가 폐간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108255|#]] 게다가 2018년 12월에 몰수한 민영방송국TV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UN 난민기구는 2018년 이후 니카라과에서 정권의 박해와 인권 탄압을 피해 103,600명이 외국으로 탈출했다고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463264|#]] 니카라과 정부에서 우주부를 창설한다고 밝히자 논란을 빚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214301|#]] 야권 대선주자들이 일주일새 3명이 체포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2446671|#]] 천주교 방송 6곳이 폐쇄당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3350202?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