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발령 (문단 편집) === 2차 단발령 ===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본격적인 서양풍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양 풍속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은식]] 등 유학의 개신을 주장하는 청년 유림들이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0년]] 근대화의 일환으로 2차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민중들도 스스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을 뿐더러 청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리면서 별 탈 없이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이후에는 모든 관리들이나 군사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하고 서양식 복장으로 관복을 변경하였다. 즉, 정책의 뒷배경에 의도가 의심스러운 [[일본 제국|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첫 단발령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고 스스로의 필요성을 자각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진행한 단발령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셈이다. 물론 국가 단위의 큰 사회에서 진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성공적이었던 2차 단발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보수주의자 중에는 '''1930년대'''까지 단발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딱히 다시 단발령을 다시 시행하지 않았고 상투를 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뒀다.[* 단발령 때의 전국적인 반대 여론을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만세전의 인식을 보아 그냥 냅두는 게 나은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투를 한 조선인들이 찍힌 엽서가 조선 관광 상품으로 쓰이기도 해서 이윤이 쏠쏠하기도 했고.] 다만 학생들이나 순사 같은 경우엔 무조건 단발을 해야 했다. 일제는 [[보천교]]에게 이들이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로 삼았지만 상황을 보면 명백히 억지스러운 시비였다. 당시에는 상투보다는 단발이 더 인식이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만세전]]에서는 주인공 이인화가 상투 튼 노동자를 보고 상투 자르는 게 편하지 않냐고 묻자 노동자는 "상투라도 있으면 [[일본 제국|내지(内地)]] 사람들이 '무식한 놈인갑다' 하고 그냥 봐줍니다요ㅎㅎ"라고 웃어넘긴다. 일제강점기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는 짧은 스포츠머리보다는 요즘의 젊은 남성들마냥 머리카락 기장을 어느 정도 길게 하여 드라이하거나 크림을 발라 단정하게 하는 스타일이 대체로 유행했는데 이는 일본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8.15 광복]] 직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6.25 전쟁]] 당시에도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이 머리를 빡빡 깎았다면 [[대한민국 국군]] 남성들은 머리카락이 긴 편이라 백병전에서도 머리카락 길이 유무로 적을 분간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노년층 중에서는 기존의 상투 차림으로 생활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1960년대까지도 가문의 뼈대를 자랑하는 양반 유림들 중에는 상투와 갓차림을 고수하는 소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늙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1970년대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서구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상투 차림은 급속히 사라져갔고 현재에는 [[청학동마을]] 같은 곳의 극소수 훈장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