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륙타통작전 (문단 편집) == 작전의 배경과 일본군의 목표 == 1943년 12월 7일 일본제국 중국방면군은 '대륙철도 종관작전 지도대강'을 제정함으로 중국의 철도를 확보하여 수송망을 확보하고 [[국민혁명군|중국군]](국부군) 주력에 타격을 준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히로히토]]는 1944년 1월 24일 이 작전을 승인했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불리함은 가시화되고 있었다. 남방에선 미군의 공격이 거셌고 중국전선도 일본군의 전략적 안목이 결여된 무모하고 비생산적인 공세로 인해 진전이 없었다. 이에 일본은 미군의 공세가 강화되기 전에 중국 전선을 정리함으로 숨통을 트고 영미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낸다는 외교적인 목적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마련했다. ||1. 중국의 남북을 관통하여 중국과 [[동남아]]를 육로로 연결하여 수송로를 마련한다. 2. 미중 연합공군의 [[비행장]]을 점령하여 미군의 폭격을 막는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미군에게 [[제해권]]을 잃으면서 상실한 해로를 대신할 병참선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중국 전선을 정리하고 더 나아가 [[인도]]를 점령함으로 미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할 가능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이 작전을 위해 북중국방면군, [[우한]]의 11군, [[광저우]]의 23군을 비롯한 거대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1. [[허난]]성의 중국군 1전구를 섬멸하고 우한까지 진격해 평한(베이핑(베이징)-한커우) 철도를 개통한다. 이로써 [[화북]]과 우한의 육로를 연결하고 제2군에게 육상 보급을 실시한다. 2. 우한에서 아오한 철도와 샹구이 철도를 따라 [[헝양]], [[구이린]], [[류저우]], [[난닝]]을 장악, 중불국경(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까지 돌파한다. 이로써 본토를 폭격할 [[B-29]] 폭격기지와 [[구이린]], [[류저우]]의 비행장을 점령하고 남방으로 육상교통로를 확보하며 남방의 중국군 주력을 격멸한다.|| 작전에서 지칭하는 철로들은 [[베이징]]에서 우한에 이르는 경한철로와 우한에서 광저우에 이르는 월한철로를 가리킨다. 이 두 철도노선은 '''전통적인 정치중심지(베이징)와 경제중심지들(장강 중부의 우한과 전통의 대외교역지인 광저우)을 연결하는 노선'''이며, 당시 중국내 국민총생산의 절반을 점유하는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헌데 '''중국군보다 우월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일본군은 경한철로와 월한철로의 기점과 종점은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 점들을 연결하는 철도[[연변]] 지역은 전혀 장악하고 있지 못했다.''' 즉, 1944년 초까지만 해도 중국의 경제총생산액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진 지역을 중국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준비된 병력은 17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6개 독립여단 등 50만 대군과 800대의 [[전차]], 1만 6천대의 차량, 10만 마리의 군마, 항공기 200대에 달했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맹점이 있었는데 중국 전선을 정리함으로 숨통을 튼다는 기본적인 방침과는 동떨어진 대륙 관통이 작전 내용이었던 것이다. 만약 일본군이 정말로 중국 전선을 정리하고 싶었다면 [[장제스]]가 앉아있는 [[충칭]]과 충칭이 넘어간다면 수도가 될 [[청두]]를 공략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고 화중의 공군기지들을 없앤다 쳐도 [[쓰촨]], [[윈난]]의 공군기지들이 건재하니 들이는 수고에 비해 결정적이지 못할 터였다. 이 때문에 중국방면군 참모부터 이치고 작전을 반대했고 11군도 차라리 충칭과 청두를 공격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표했다. 1944년 1월, 총리대신 겸 육군대신인 [[도조 히데키]] 역시 이 작전이 비현실적이고 거창하다고 평가하며 중국 서남부의 비행장을 점령, 파괴하는 것으로 작전 목적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작전을 허가했으나 작전 입안자인 핫토리 다쿠시로 '''대좌'''는 이를 거부하고 막무가내로 기존 계획을 밀어붙였다. 결국 이 작전을 실행할 담당자인 중국방면군 원수 하타 슌로쿠 장군은 [[만주]], [[일본]], [[조선]] 전역에서 병력과 물자를 모으는 한편, 일본군 답지 않게 부상자 후송, 병참의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는 등 매우 치밀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