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륙타통작전 (문단 편집) === 2단계 상계작전 === 일본군의 두번째 목표는 9전구였다. [[쉐웨]] 장군이 지휘하는 9전구에는 40만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창더]] 전투에서 입은 타격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11개 사단, 4개 여단 등 36만 대군과 100대의 전차, 9,400대의 차량을 동원한 더욱 거대한 공세를 준비했다. 5월 27일 11군을 중심으로 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불리한 [[제공권]]에도 불구하고 [[창사]] 주위의 중국군을 먼저 격파하는 새로운 전술을 활용하여 중국군의 방어전략을 무력화했고 창사를 포위했다. 쉐웨는 창사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1만명의 병사만 놔두고 창사를 포기했다. 일본군 3개 사단은 창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6월 18일, 이틀만에 점령했다. 다음 목표는 [[헝양]]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6월 24일 2개 사단을 동원해 헝양을 공격했다. 헝양에는 팡셴줴 휘하의 10군 소속 4개 사단 2만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정예부대였다. 6월 26일 5만명의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했으나 정예부대였던 중국군 10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7월 11일의 2차 공세도 중국군이 승리했다. 일본군은 헝양에 미군이 주둔한 것이 아닌가 잠시 의심할 정도로 10군의 전투력은 우수했다.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은 즉각 3개 사단과 야전중포병여단을 헝양으로 급파하여 10만 명의 병력으로 더욱 거센 공세를 감행했다. 장제스도 이에 대응하여 2개 군을 보냈으나 쓸만한 예비대인 Y군은 버마에 묶여 있었고 장제스가 보낸 병사들은 무기와 훈련 상태가 형편없는 잡졸들이었다. 장제스의 지원군은 간단히 패배했고 8월 4일의 3차 공세에서 헝양은 함락되었으나 일본군의 공세를 이후 3개월이나 지연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2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살상했다. 중국군이 더욱 적은 숫자로 더 많은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는 이때가 유일했다. 중국군 2만 명과 일본군 10만명이 붙어서 일본군 피해가 더 큰 전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