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종(당) (문단 편집) === 황제 이전의 삶 === [[황태손]]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으로 살았다. [[안사의 난]]으로 아버지가 분조를 이끌고 영무에서 즉위할 때 동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하병마(天下兵馬)원수로 임명되었고, 757년 9월 [[시안(도시)|장안]] 및 [[낙양]]의 양경을 함락할 때 초왕(楚王)에 봉해졌다가, 758년 성왕(成王)을 거쳐 그해 5월 [[황태자]]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이예'''(李豫)로 고쳤다.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을 공략할 때 [[위구르 제국|회흘]]의 친왕 엽호(야브구)가 파견되자 그와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당숙종은 원군을 하루빨리 얻어내기 위해 [[시안(도시)|장안]]을 수복하면 [[황금]]과 [[비단]], [[자녀]]의 약탈을 허용한다고 했다. 이때 이예가 절을 하며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지금 처음으로 [[시안시|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뤄양시|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안경서)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데,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 이예는 이렇게 엽호를 달래어 맞절을 받고, 장안의 약탈을 막아 칭송을 받았다. 훗날 동도 낙양을 수복한 후에는 부호들에게서 비단 10,000필을 거둔 후, 그걸 위구르군에게 줘서 대약탈을 막았다. 하지만 [[사사명의 난]]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부황 숙종의 말년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의붓어머니였던 장황후는 환관 이보국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사이가 좋았고, 군재가 있었던 이복동생 건녕왕 [[이담(당)|이담]](建寧王 李倓)이 모함으로 죽자 태자 이예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얼마 뒤 장황후와 환관 단항준, 이복형제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장황후는 월왕 이계에게 "나를 도와주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월왕은 흔쾌히 수락했다.]가 이보국과 태자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했으나, 이들은 이보국에게 발각되어 유폐되었으며('''보응정변''') 숙종이 이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당현종]]과 아버지 숙종이 급서한 상황에서 그는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가 762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 즉위식 날짜로 추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