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냉전]] 종식 이전의 소련 측 연구 ====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 이후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 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고 각자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 세계 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 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주코프]], [[바실렙스키]], [[세르게이 슈테멘코|슈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코네프]], [[키릴 메레츠코프|메레츠코프]], [[안드레이 예료멘코|예료멘코]], [[이반 바그라먄|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키릴 모스칼렌코|모스칼렌코]], [[바실리 추이코프|추이코프]], [[니콜라이 크릴로프|크릴로프]], [[파벨 바토프|바토프]], 갈리츠키, [[안드레이 그레치코|그레치코]], [[미하일 카투코프|카투코프]], 렐류셴코,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B2%A8_%EB%A1%9C%ED%8A%B8%EB%AF%B8%EC%8A%A4%ED%8A%B8%EB%A1%9C%ED%94%84|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모스크바 전투|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전투|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 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럽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다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 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 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 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s-3.3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르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소련군의 전차들이랑 맞싸우기 힘든 [[치하|중형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경전차들이었다.]]]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거나 왜곡 윤색하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