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냉전 종식 이전의 서방 측 연구 ====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소련군을 중심으로 독소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 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https://en.wikipedia.org/wiki/Friedrich_von_Mellenthin|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안 하고 공적만 늘어 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 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오로지 독일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또한 수 많은 독일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서방 NATO 군대에 편입되었으며, 이는 소련군이 진지하게 NATO군과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와 함께 움직이며 전선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감과 동시에 전례 없는 거대 규모로 편성된 공수부대로 서유럽의 전략적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전략을 구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략을 짜는 동안, NATO 군대는 1980년대 초까지 강력한 신화적 영향력을 쌓아놓은 독일군 출신 장성들의 또 다른 국방군이 되어 전쟁 연습을 해야했다. 단적으로 1981년 백악관 국가안보실이 주도로 주체한 워게임에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내로 진주한 소련군이 움직인 방식으로 가상적군의 움직임을 짜놓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NATO군은 냉전 때에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대를 막는 역할이 아니라 독일 출신 장성들의 정신승리용 장난감처럼 굴려졌다. 만슈타인이 2차 대전 당시 시도했으나 실패한 기동 방어 전술을 행했고 이를 통해서 소련군을 물리친단 계획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서유럽은 기동방어가 완벽히 들어먹힐 정도로 넓지 않았고 도리어 이를 사용했을 시에 소련군은 방어진을 돌파해 방어군들을 포위섬멸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이 함락당한 것이었고, 그래서 독일의 절반이 공산국가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계획한 서독군 기갑부대 지휘관 헤르만 발크(1893~1982)는 "만약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라는 동료 지휘관의 물음에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결국 독일군 출신 장성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경험이 쌓인 소련군 장성들의 능동적이고 과감한 전략전술과 압도적인 공업 역량에 의해 패배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히틀러를 비롯한 전략적 식견이 전무한 독일 나치당 고위 인사들의 군에 대한 영향력과 소련군 '이반'들의 피와 살로 이뤄진 공세로 인해 패배했다는 것이라고만 [[인종차별]]적인 편견으로만 생각했다. 이러한 인물들이 개입하는 상황에서 독소전쟁사 해석은 철저히 정신승리에 가까운 형식으로 이뤄져있었고, 가장 큰 적인 소련군이 어찌 움직이고 이들을 어찌 요격하여 최종적으로 승리할지는 결국 NATO군의 진지한 전략이 아닌 독일군 장성들의 대체역사 시나리오에 불과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군사)|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 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팸플릿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 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 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폴 카렐의 본명은 파울 칼 슈미트로 신분세탁한 나치독일 외무부 언론과장이자 [[슈츠슈타펠|알게마이네SS]]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이다. 그는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할 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날조하자는 제안을 한 게 밝혀지는 등,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나치 선동꾼이기 때문에 지금은 학술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인용하는 것 자체가 '나는 [[극우]] [[네오나치]]요' 라고 선언하는 행위나 다름없이 취급받고 있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 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의 [[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 전쟁에 패하면 자신과 자기의 가족, 나아가 자기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확실하게 [[능욕]]되고 학살된다고 하면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장 소련이란 나라 자체가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가장 거대한 대중 봉기와 항쟁을 통해 생긴 정권이고, 꼭 숙청이나 굴라그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이상에 믿음을 가지고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니거나 비록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지언정 러시아 민족주의와 애국심, 가족과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면서 싸운 병사도 많았다.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바르바로사 작전]]~[[청색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 부대는 300만이 투입되었고,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다.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곧 날카롭게 동진하기 시작한 독일군 부대들에게 각개 격파당했다.][*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나 [[르제프 전투]]같은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매번 벌어졌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 ~ 2배 정도의 전체 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 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창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