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 === > 1940년 12월 18일 [[소련]]에 쳐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전쟁령을 승인하면서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히틀러는 몇 달 안에 소련을 무력으로 완전히 궤멸하고 소련이라는 정치 체제를 없애버리는 쪽에 목표를 두고 독일의 전쟁력을 온통 거기에 쏟아부었다. 군 지휘관들도 사석에서는 딴소리를 했을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제안에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군부의 지지도 얻은 셈이었다. >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다. 당시 독일의 장성들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처럼 소련의 군사력과 역량을 턱없이 얕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들이 정말로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세계의 패권국 [[영국]]을 [[미국]]이 무한한 자원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서였다. 이런 도박을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다. > >[[에리히 레더|레더]]는 예외였지만 [[헤르만 괴링|괴링]]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보이다가 금세 돌아섰다. 도박이 성공하려면 넉 달에서 다섯 달 안에 소련을 때려눕혀 유럽의 패권을 잡아야 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영토를 노리는 일본에게 발이 묶여 있으므로 소련만 무너뜨리면 독일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미국도 [[태평양]]에서 [[태평양 전쟁|일본을 상대해야 할 테니]] 유럽까지 넘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히틀러는 내다보았다. 독일은 전쟁에서 이겨서 [[유럽]]을 장악할 것이다. 미국과는 어차피 나중에 한번 붙겠지만, 그렇게 되면 한결 유리한 입장에서 미국을 상대할 수 있다. >---- > -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p. 426) >1940년 말에서 초, [[소련]]과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강대국이었지만, 좀더 넓은 차원에서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때까지 두 국가는 [[독소 폴란드 분할|유럽의 판을]] [[프랑스 침공|새롭게 짜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미 전 세계의 판을 짜오던 세력이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동맹에 저항하던 대영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 >단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영제국과 [[영국 해군|그들의 해군력]]이 만들어놓은 세계 체제는 나치든 소련이든 '''당장에 뒤엎을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길을 택하는 대신 다른 길, 즉 비록 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이 위용을 떨치고는 있지만 일단은 자신들 눈 앞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혁명 과업을 완수하며, 제국을 만들어 가는 길을 택했다.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이라는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바다|안정된 연결 통로]] [[해상봉쇄|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 똑같았다. '''즉 [[미국|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미국|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 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 국가]]를 지향했다. >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소련|자]][[나치 독일|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1940년 말과 1941년 초를 기점으로, 전쟁이라는 카드는 이 거대한 경제적 기획을 추진하려던 소련과 나치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미 지켜내야 할 [[5개년 계획|경제 혁명의 성과물]]이 있었던 반면, '''히틀러는 [[독소전쟁|자신의 경제 체제를 바꾸기 위한 전쟁]]이 필요했다.''' 스탈린이 자신의 "일국사회주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히틀러의 마음속에는 여러 국가에 걸친 국가사회주의, 즉 다른이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독일인들의 번영을 보장할 광대한 독일 제국이라는 그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집단화 그 자체는 국가 내부적 계급투쟁이자 앞으로 다가올 외부와의 전쟁에 대비하는 작업이었다. '''이와 달리 히틀러의 경제적 비전은 오직 [[정복|실질적인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만, 실로 [[독소전쟁|소련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일궈낸 후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집단화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그것이 바로 팽창적 식민지 건설의 대체물, 다시 말해 내부로의 식민화 작업에 해당됐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여전히 외부로의 팽창을 통해서만 식민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봤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우크라이나|소련 서부의 거대한 농업지대]]에 더해 [[캅카스]] 지역의 석유 매장 지역까지 [[청색 작전|그려지고 있었다.]] 그 스스로 이야기했듯이 히틀러는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 자립도가 높은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영국을 쓰러뜨려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반드시 쓰려뜨려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1941년 1월 히틀러는 소련의 "어마어마한 자원"이 독일을 "그 누구든 넘볼 수 없는 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군 지휘부에게 말했다. >---- > - 티머시 스나이더, [[피에 젖은 땅]] (5장 파멸의 경제학 p.282~284)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텨 [[서부전선]]을 형성했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 침공|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 때 [[됭케르크 철수작전|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 덕에 독일은 '''육군 전력 대다수를 소련 침공에 동원할 수 있었다.'''[* 처칠이 집필한 2차대전 책에서 독소전쟁이 터지자 뒤 스탈린이 북아프리카 전역이 멀쩡히 있음에도 끊임없이 제2전선을 요구한 내용이 나온다.]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었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영국은 오버로드 작전 이후에도 장비 보급 상당수를 미국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당장 영국 본토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대서양|바다]]에서의 [[유보트|U-보트]] 작전과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작전에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였다면 중기적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거나 협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대서양 전투|바다에서의 싸움]]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그 결과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군사)|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의 병력[* 실제로도 1942년 시점부터 이미 소련의 현역 병력은 천만명을 돌파했다.]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비는 1937년 기준으로 1:3이었고 1941년에는 독일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1:2.1 수준으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물론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전투손실 차이는 1:5로 기습을 감안하면 재앙적인 수준은 아니었으나 스탈린의 후퇴 금지로 3백만 명이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항복해 전체 병력 손실비는 1:20로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련군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했고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오히려 일방적 공격으로 독일군을 포위섬멸하고 십만 단위의 포로를 획득하며 회복 불가능한 병력 손실비에서 경합우세가 되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독일군이 전투 손실비에서는 경합~경합우세이더라도 포로까지 포함하면 회복할 수 없는 병력 손실비 기준으로는 확실히 열세해졌고 소련군은 결국 우세한 교환비로 베를린까지 점령하면서 독소전 양측의 총 병력 손실 비율을 1:2.2, 전투 손실비는 1:1.4 정도까지 줄여 버린다. [[독일 국방군|독일군]]과 [[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민간인+포로 등의 소련의 비전투 사망자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 '''스탈린은 독일과 서유럽이 서로 소모전을 벌여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독일을 침략하고 유럽을 거의 공짜로 먹을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쭉쭉 밀리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해 사실상 패배한 거나 다름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성공을 확신했다. 제정 러시아만큼 무능해보였던 소련을 침공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 소련을 없애면, 추후 있을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는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중 자원 문제는 중요한 것으로 특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다. 미국이 1941년~1945년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 배럴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부족한 석유를 [[플로이에슈티 공습|동부]] [[캅카스|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전격전|최소한의 희생으로 1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브렌하르트 폰 로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과 [[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8A%A4%EB%B6%80%EB%A5%B4%ED%81%AC_%EC%97%B0%EA%B5%AC|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얕잡아 봤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6854|#]]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재현됨과 동시에 한 술 더 떠서 본토까지 탈탈 털려 버렸다. 설령 영국이 협상에 나섰다 한들 소련과의 전쟁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히틀러가 염원하던 조건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20년 가까이 히틀러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전쟁이였고 전쟁의 중심 입안자는 누가 뭐래도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는 전쟁을 상상하는 단계가 아니라 결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는 단계에서도 상당히 개입하였고, 소련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육군 지도부를 비롯한 국방군 수뇌부는 히틀러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말린 적이 없었고 말리긴커녕, 이미 독일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큰 데다가 소련의 군사력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바람에 군 수뇌부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히틀러와 똑같이 낙관했다.[*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383~384 페이지] 그리고 [[게오르크 폰 퀴힐러|퀴힐러]], 회프너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군이 히틀러가 독소전쟁 개전하자는 주장을 묵인한 것은 순종하는 버릇이 몸과 머리에 밴 점과 이념에서도 나치 지도부와 겹치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장군들 또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제국을 세우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소련과 [[볼셰비키|볼셰비즘]]을 쳐부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념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독소전쟁은 히틀러가 억지로 국민에게 강요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건 나치가 아니건 독일의 모든 엘리트가 수긍했고 심지어 정도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환영한 전쟁이었다. 나중에 전선에서 하급 병사로 싸우는 수백만 명의 군인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독일 국민도 이것을 '볼셰비즘과 겨루는 성전'이라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나치 선전기관]]이 주입한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광적인 나치당원들은 더 나가 볼셰비키 무리가 서양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전쟁]]이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 볼셰비즘'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유럽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나치와 나치 지지자들에게 볼셰비즘을 제거하기 위한 절멸 계획 [[홀로코스트]]의 시작이었다.[*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484페이지]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우리]]가 [[침략|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소련|저 엉터리 건물]]은 [[자멸|스스로 무너진다.]]'''"[[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01/dec/15/weekend.jonathanglancey|#]]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하지만 결국 무리하게 공격해서 자멸하게 된 것은 나치 독일이였다. 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직접 [[할힌골 전투|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 제국|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이 금방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지의 일부는 처음에는 독일군을 [[대숙청|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뿐이었다.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나치즘|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려서 학살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이런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프랑스)|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 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신불수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은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소련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막대한 병력을 잃자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정보의 부족 때문에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랄산맥|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의 생산능력이 제대로 증명되고 극동에 남아있던 정예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이 연전연패했다. 독일은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 제국|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도 소련과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으며 조약의 체결 시점이 불과 독소전쟁 발발 2개월 전이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태도가 이러한 일본이 독일을 돕지 않고 대소 중립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 방공협정 동맹인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이었는데 독일이 일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총리대신과 그 내각이 일제히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2년 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 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을 따라 일본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상황을 알리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서도 언제 또 바뀌지 모르는 히틀러의 장단에 맞추어 만 2달 정도밖에 안 된 대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도울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초반에 전투 한번 했다 하면 수십만씩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삼국 동맹 조약|독일과 일본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의무조차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노림수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가 일본의 대소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일본은 독일이 패망한 후까지 대소 중립을 고수했다.[* 일본은 독소전쟁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의 편을 들지 않았으며 심지어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에 대독 승전을 축하하는 서신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참고로 소일 불가침조약을 잠재적 동맹과 같은 의미로 착각한 당시 일본은 서로 절멸전을 벌이는 독일과 소련 모두를 일본의 동맹으로 여기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소련의 4국 동맹을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 ] 물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선전포고를 안 했다고 가정해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 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 동네 싸움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립주의|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 방임주의에 한세기 넘도록 익숙했던 당시 미국인의 국민성 때문이었다. 즉 [[자폭|히틀러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줬고 나아가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일전쟁|중국을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공격을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있었다. 어쨌든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젠 [[양면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동쪽에선 소련, 서쪽에선 미국으로 훗날 냉전시대의 양강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소련 침공은 독일의 멸망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 경제의 문제점이었다. MEFO(메포) 어음으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의 부채 경제는 이미 1938년부터 190억 국가마르크에 이를 정도로 감당할 수 없었고 독일은 이를 흔히 말하는 따서 갚기, 즉 [[따갚되]]로 갚으려 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부터 [[금]]을 악착같이 긁어모았다. 흔히 약탈경제로 말해지는 이들의 경제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뮌헨 협정]], [[프랑스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에서 수많은 금을 갈취할 정도로 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오르는 국가의 부채를 한순간에 갚을 수 없었다. 특히 [[영국]]을 무너뜨리고 [[바다사자 작전]]을 통해서 영국 본토를 정복하고 배상금으로써 메포 어음을 갚으려는 이들의 계획은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좌절되었고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다가는 독일 경제가 무너질 위기였다. 즉 [[소련]] 침공은 이러한 독일의 부채경제를 끝내기 위한 거대한 [[약탈]] 전쟁의 일종이었으며 이는 동일하게 약탈 경제로 굴러갔던 [[일본 제국|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동일하게 진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