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이베리아 (문단 편집) === 건국과 근대 ===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을 구전과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서부와 북부에서 왔다고 추정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접촉하면서 '후추 해안', '곡물 해안' 등의 이름이 붙여진 지역 인근이다. 1602년에 네덜란드가 라이베리아 일대에 마을을 세운 적이 있지만 1년 만에 관두었고 영국도 라이베리아 일대를 식민화하려다가 중단했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미국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남북전쟁]]을 불러 일으킨 흑인 노예 문제가 심각해지는 와중에 1821년 [[미국]]에서는 '''"흑인을 다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면 인종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같은 19세기 다운 생각을 하였다. 결국 오갈데 없는 흑인들이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EC%8B%9D%EB%AF%BC%ED%98%91%ED%9A%8C|미국식민협회]]의 주도 하에 아프리카로 [[역이민]]을 했고 [[미국령 라이베리아|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래서 미국에 잘 정착한 흑인들은 굳이 미국을 떠나서 개고생을 할 생각이 없었고, 진짜로 사회 하류층들이 작은 희망을 품고 라이베리아로 이민을 갔다. 그러나 초반부터 삐딱거렸는데 우선 라이베리아는 '''식민지에 환장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포기한 땅'''이다. 당장 쓸 수 있는 자원은 아무것도 없으며 말라리아와 적대적인 원주민들이 가득하였고, 무엇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동아프리카인을 서아프리카에 보내는 등[* 우리로 치면은 한국인을 인도에 보내는거하고 같다] 뭐하나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이후에 어떻게든 정착을 했지만, 정착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초기 해방노예들은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면서 정착하는 데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관계 없이 미국 내의 흑인 노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흑인의 라이베리아 이주안도 일시기를 제외하고는 어영부영 무위로 돌아갔으며, 남북 대립을 막는데는 어떠한 효과도 없었다. 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세워졌던 [[반투스탄]] [[미승인국]]들과 같은 아이디어였다. 미국령 라이베리아 식민지는 1847년 독립하여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인 라이베리아가 되었다. 독립 직후에는 [[트루휘그당]]과 [[공화당]]간의 양당체제로 187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1878년 이후부터 1980년까지 휘그당 일당체제가 되었다.[* 참고로 이는 [[소련 공산당]]과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 기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독재체제가 결국 라이베리아를 몰락시켜 [[아이티]]와 동급의 막장국가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Republic_of_Maryland|메릴랜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854년]]까지 식민지로 경영되다 별개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1857년]]에 라이베리아에 합병된다.[* 메릴랜드 공화국은 현재 라이베리아의 '주'로 편입되어 있다.] 라이베리아는 미국의 지원 하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많은 열강들이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라이베리아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독립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흔히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은 둘뿐인 나라'로 소개되기도 한다. 다만 제국주의적 식민지가 아닌 것이지, '식민지'의 기원적 의미로 치자면 아주 전형적인 식민지이다.[* 이런 고대 식민지의 대표적인 국가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던 [[고대 카르타고|카르타고]]가 있다.] 미국계 해방노예(Americo-Liberian)들은 현지 부족들과 관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고,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 온 자신들이 야만스런 토착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 미국식 노예제와 신분제도를 도입했었고, 토착민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차별도 가했다. 투표권도 이 당시에는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는[* 이때는 미국에서도 제한투표제를 시행하는 곳이 남아있었고, 부르봉 왕조~오를레앙 왕조 시기의 프랑스, 영국이나 초창기의 일본제국도 일정액의 납세액을 내야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제한투표제였다. 다만 라이베리아는 제한투표가 휘그당의 일당독재를 지속적으로 보장해주다보니, 보통선거가 늦게 도입되어서 늦게까지도 제한투표제가 시행되었던 것이었다.] 제한투표제를 체택했는데 초기 100년간은 기존의 원주민들이 살던 오두막을 가치가 있는 부동산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 선거권을 가지지 못해 실질적으로 [[과두정]]으로 운영되었고, 농장경영으로 얻은 세금도 주로 몬로비아를 비롯한 대도시들 위주로 투자하면서, 지방민들은 그 헤택을 누리지 못했다. 원주민들도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하면 시민권도 주는 식으로 출세의 기회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흑인부족들은 이런 해방노예들의 상전짓에 대해 백인국가 물 좀 먹었다고 옛날 일도 잊어먹는 엉클 톰, 즉, 검은 백인이라며 아니꼬와했다. 흑인 원주민들 중에서도 순진하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미국계 해방노예들을 속여서 다시 노예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기도 했고, 노예제가 페지된 1920년대에도 찰스 D. B 킹 대통령이 직접 지방민들을 속여 스페인령 기니(적도 기니) 당국과 짜고 계약노동자(사실상의 노예)로 팔아버리는 비리를 저질렀다가 탄핵당하는 추문도 있었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라이베리아 당국과 토착민들의 갈등이 심했고, 1904년에 토착민 전원에게 시민권을 주어서 제도적인 차별은 철폐되었지만 그럼에도 1940년대까지도 부동산에 기반한 제한투표제로 보통선거가 실시되지 않아 투표권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보통선거가 실시된 이후로도 휘그당 일당체제라 부정선거는 일상적이었다. 이들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은 1970년대까지도 휘그당의 당권을 차지하며, 농장이나 합작기업같이 경제적으로 이권이 되는 사업에 손을 댔고 그러면서도 토착 부족의 왕족들 등 상층부와 통혼하며 기득권으로 군림했다.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영어를 구사하면서 서양식 주택에서 살며 [[소울푸드]]를 비롯한 미국 요리, 양복, 그리고 개신교를 비롯한 미국 문화와 문물들을 라이베리아에 대대적으로 들여놓았다. 이들은 토착신앙과 이슬람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토착언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원주민들과[* 물론 이 원주민들도 나중에 와서 대다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는 했다.] 문화적으로 큰 차이점을 보였다. 사실 흑인들이 단일 집단도 아니었고,[* 당장에 백인도 유럽계 백인, 아랍계 백인 등으로 나뉘어 있고 유럽계 백인도 프랑스인, 독일인, 영국인 등등으로 갈라져 있다. 결국 라이베리아의 건국은 백인으로 치환하면 독일인, 이란인, 아랍인을 다 같은 백인이라는 이유로 한 나라에서 살라고 한 것이다. 이러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라이베리아는 대다수 흑인 해방 노예들에게 연고지도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땅이었다. 17~19세기 노예 무역으로 인한 노예 수 증가에 서구 국가들만큼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흑인들도 참여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19세기 노예 무역의 쇠퇴에도 아프리카 내부에서 장기간 존속되어 온 노예 제도는 바로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내부 발전을 위해 활용하기도 했다.[* 물타기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서구 노예 무역 쇠퇴 후 아프리카 노예 무역도 쇠퇴 추세를 보였고, 현지 흑인 국가들이 노예 무역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서구 국가들과 그 다음으로는 사하라 이북 이슬람권 국가들이 근세~근대 노예 무역의 주된 물주이자 수요 당사자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변명하자면 19세기 중엽은 아프리카의 농산물 플랜테이션 사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를 비롯한 노동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기긴 했다. 라이베리아만이 돌출된 행동을 한 건 아니라는 것. 애초에 본국이었던 미국도 아직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상황인데 사고의 전면적 변화를 기대하는 게 넌센스일 수도 있고. 게다가 이전에 네덜란드와 영국도 식민화를 중단하고 물러날 정도로 라이베리아가 그다지 풍요로운 곳도 아니라서 노예 무역이 그나마 경제적으로 괜찮은 사업이긴 했다. 물론 잘한 일은 절대 아니다. 최소한 본인들도 노예 생활을 했던 케이스기에 더 비판받을 부분이다. 이 미국계 흑인들과 현지인들의 충돌을 나타내는 기념일도 있었는데, 이른바 '마틸다 뉴포트 데이'이다. 미국계 여성인 마틸다 뉴포트(Matilda Newport)를 기념하는 날이다. 1822년 12월 1일, 라이베리아 독립 이전 미국계 흑인들과 현지인이 무력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 때 마틸다 뉴포트는 직접 대포를 쏴서 현지인들을 공격해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걸 기념하는 것...... 이후 이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은 이 일을 숭고한 투쟁으로 미화하고 매년 12월 1일을 이 마틸다 뉴포트 데이로 지정해서 기념일로 삼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비판이 생겨났고 또 해당 사건 자체의 진실성 여부도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쿠데타로 집권한 [[새뮤얼 케니언 도]] 정권 때 이 기념일을 공식 폐지하였다. 그래도 유럽 및 미국과의 커넥션을 통해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 중에서는 무역에 있어 교육 등의 면에서 유리한 점을 차지하고 있어 초창기에 이를 통해 현지 흑인들을 회유해서 영토확장을 단행하기도 했고, 국내외적으로 어느 정도 산업화에 성공하고, 이를 통해 대대적인 이민유치에 나섰다면[* 1880년대 이래로 미국 남부에서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백인들도 투표권을 회복하면서, 미국 남부 민주당 조직들이 흑인과 빈곤층들을 상대로 투표권을 사실상 박탈시키는 제한선거권 제도를 부활시키며 기껏 이룩해낸 인종평등정책이 퇴보해버리는 바람에 다수의 남부흑인들이 투표권조차 지니지 못했던 암울한 시절이 1960년대 초까지 이루어졌고, 브라질 흑인들도 1889년에서야 노예해방이 이루어졌고,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이후로도 저임금 노동자와 가정부로 일하는 등 대다수가 빈민층이었으며, 여타 아프리카 흑인들도 상황은 더 나빴으면 나빳지 나을것이 없었다.] 최소한 남아메리카 국가들 정도의 경제력은 갖출 수 있었을 것이나, 라이베리아가 심혈을 기울렸던 커피와 설탕농업이 쿠바 및 브라질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192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장기간 침체되었고, 이로 인해 내부불만이 가중되어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독립을 하긴 했으나 말이 좋아 독립국이지, [[미국]]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독립 이후 [[미군]]이 주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베리아인들도 미국의 영향력을 아주 당연하게 여겨서 2003년 테일러 정권 말기 내전 때는 몬로비아 시내에서 피살된 사람들의 시신을 미국 대사관 앞에 쌓아놓고 개입하라고 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라이베리아가 경제적으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것은 1920년대부터였고 이후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경제가 돌아가서 아프리카에서는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중진국 정도의 수준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유럽 아프리카 국가들을 무시하는 라이베리아에 대해, [[유럽]] 열강들과 [[우간다]]를 비롯한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은 안좋게 봤다. 그리고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터지자 곧장 [[반군]] 쪽에 무기를 지원하며 친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 정권 타도에 힘을 보탰다. 이 시기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심지어 장교도 아닌 '''[[상사(계급)|상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정도였다.[* 이 사람이 바로 라이베리아의 21대 대통령 [[새뮤얼 케니언 도]]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전쟁 발발 일주일만에 미국보다 먼저([[1917년]] 선전포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