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문단 편집) ==== 그리스도교(정교회) ==== [include(틀:총대주교좌)] [[파일:external/www.pravmir.com/Vechnaya_Rossiya-600x308.jpg]] 우선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선교사]]들이 전교해,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루스]][* 최초의 동슬라브인의 국가는 이 나라이며,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이를 키예프 공국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훗날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의 조상이 된다.]의 국교가 되었으며 1037부터 144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임명한 [[그리스인]] [[대주교]]가 통치했다. 키예프 루스가 정교회를 국교로 선택한 데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블라디미르는 형제들과 싸워 권력을 얻은 탓에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그래서 권력을 키우고 키예프 러시아를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는데 그 사상이 바로 종교였다. 국교를 정할 당시 블라디미르는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4개 중에서 선택하려고 했는데,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니 아웃, 유대교는 블라디미르가 "왜 유대인이 선택받았다는데 당신네는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닙니까?"라는 질문에 랍비가 아무 말 못해서 아웃. 그래서 두 그리스도교가 남아서 두 쪽 다 사절을 보냈는데, 가톨릭 측 사절이 갔던 독일은 거의 암흑시대로서 야만족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아웃되었다. 반면 정교회 측에서는 휘황찬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로 데려가서 그 화려함에 당장 정교회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유로는 접근성과 당시 권력의 차이 문제가 있었다. [[유대교]]로 개종했던(!) 하자르 칸국은 이 시절이면 쇠퇴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로마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훨씬 가까우며 당장 직접적인 무역 루트나 영향력 면에서 여러 모로 정교회를 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당대 러시아의 중심지였던 키예프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내려와 흑해에 이르면 동로마 제국의 크림 반도 거점이던 케르손에 도착할 수 있고, 다시 거기서 배를 타고 흑해를 건너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게 된다. 반면 당시 가톨릭의 중심지인 독일 지방이나 이탈리아 및 이슬람 중동권은 거리도 멀고 육상 교통로에 의존해야 했다. 수상 운송이 육상 운송보다 훨씬 효율적임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우수한 교역 파트너인지는 뻔하다. 게다가 러시아의 개종 당시 지지리도 가난하고 분열되어 있던 서유럽에 비해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통일 국가로서 사절들이 와서 구경한 뒤 "그리스 애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곳에 가 봤는데요, 엄청 멋있어서 이 세상 같지 않았어요! 그렇게 대단한 데니까 분명히 하느님이 사실 거예요!!"라고 보고할 정도로 엄청난 성당을 지을 정도로 부유하기까지 했다. 당시의 종교는 정치와 사회 전 영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었고, 특정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그 종교를 믿는 국가와 우호적 교류 관계를 맺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러시아에게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이었을지는 뻔할 뻔 자. 이후 1589년 모스크바 대주교 이오프(Патриарх московский Иов)가 모스크바와 모든 [[루스인]]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자치 교회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에 이어 제5위의 정교회가 되었다. 현재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키릴(정교회|키릴 총대주교]]이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에서 지배적인 종교였다. 특히 1055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분리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뒤에 동방 정교회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추정되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 뿐이었다. 이 말은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정교회 지역들이 모두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이 즈음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마저도 당시의 신흥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들 정교회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1922년까지 과거 누렸던 종교의 자유를 제한받았다. 반면 이 시기 러시아 정교회는 종교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러시아 문화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말기, 황실과 결탁한 정교회의 부패는 끝을 달리고 있었고, 이러한 모습은 1917년 10월 혁명과 적백내전으로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에게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공산주의는 사상적으로도 무신론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고. 특히 레닌은 교회가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거부하는 많은 수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이후 소련 전역에 위치해 있던 [[성당]]과 [[수도원]]은 다른 용도로 전환되거나 파손되었다. 또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명망 있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정교회의 권위를 깨부수기 위해서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정교회와 가톨릭 등 기독교 [[보편교회]]에선 [[기적|훌륭한 삶을 살다 죽은 일부 성인들의 유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썩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썩은 성인들의 시체를 보여 주어 대중의 신앙심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근데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들을 파냈는데도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전혀 썩지 않아]] 공산당원들이 하얗게 질리고 흥분한 군중들이 공산당원들을 비난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따져본다면 밑에서도 언급된 바처럼 비밀신자들이 많았으므로 몰래 시신 관리를 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꿔치기 되어서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중세에 '~의 뼈'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다른 이의 것이었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는 데에 종교적 열의를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인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러시아에 가톨릭을 무력으로 전파하려던 [[튜튼기사단]]을 작살낸 공으로 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회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아주 안 좋다.] 다시 정교회 신앙을 부활시켰다. 스탈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까지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데다가 신학생 출신이었다. 소련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신앙심이 유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정교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 역시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몰라도 어머니한테만큼은 지극한 효자였던 스탈린은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 앞에서 차마 신앙을 버렸다고 고백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아직 정교회를 믿고 있다고 신자 행세를 했다. 스탈린은 자본 진영 사람들이 원칙과 신념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인간 행동의 기저를 의심한 치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http://kk1234ang.egloos.com/3064287|스탈린의 현실주의적인 면모]]]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치하에서 어느 정도 정교회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다음에 집권하는 [[흐루쇼프]]의 탄압을 받았다. 그래도 소련 붕괴 시까지 민중들은 물론 공산당원조차도 정교회 신앙을 비밀리에 이어 갔다. 대표적인 예가 소련 붕괴 후 정교인임을 드러낸 [[블라디미르 푸틴]]. 이 사람은 소련 비밀경찰기관인 [[KGB]]의 간부 출신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거의 [[국교]]가 되어, [[보리스 옐친]]이나 푸틴은 과거 소련 시절 명목상 공산당원이었음에도 정교회 신자라고 커밍아웃했고, 이후 성찬예배에도 자주 참례했다. 심지어 소련 공산당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인 [[겐나디 주가노프]]도 교회에 다니며 정교회 성직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공산당]]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홀리는 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 강조를 통한 통합강조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폭 밀어주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악명높은 일본의 [[옴진리교]]가 한때 러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러시아인 신자들은 [[아사하라 쇼코]] 교주가 체포되자 무력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각 나라별 교회 문제 때문에 대판 다투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영토 내의 교회는 각 국가의 교회이나 그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러시아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 국가들의 독립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이를 바탕으로 교도권을 주장하면서 독립 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다. 2018년 10월에는 크림 반도 분쟁 등의 이유로 러시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https://news.v.daum.net/v/20181016151154669?fbclid=IwAR31b4J8GT4JRGYbzPq6NJTLIMYTjyhMTcyrLYeVJDiTczoKOM4K1xMB0dA|단절을 선포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정교회 세계에서 제일 현지화가 많이 진행된 교회이기에 다른 교회 지체와의 차이점이 상당히 많다. 애초에 초대 교회가 동서로 찢어진 사건 때문에 정교회 성직자들은 러시아 지역에 선교할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일치!'를 외쳤으나, 이번엔 이 동네가 당시 [[서유럽]]보다 더한 깡촌이라서.... 결국 원조(?)와 좀 많이 달라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17세기 중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재위 기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슬라브 토속 신앙과의 융합을 피하려고 전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맞춰 바꾸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니콘의 전례 개혁에 반발한 구전례파와 니콘을 지지한 신전례파가 나뉘어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구전례파도 둘로 나뉘었는데 따로 성직자단을 꾸린 분파와 아예 성직을 인정하지 않는 분파로 갈렸다.] 게다가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가 서유럽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정교회에 [[가톨릭]]적 색채가 가미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도 큰 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고, 또 이 지역 사람들의 신앙이 깊기도 한 데다가 딱히 핵심 교리에서 변질되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러시아 정교회가 정교회 그 자체로부터 분열해 버리는 사태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가 즉위할 무렵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차르는 신성종무원을 만들어 정교회를 관리했고, 신성종무원은 러시아 혁명으로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혁명 직후 러시아 정교회는 새 총대주교로 티혼을 뽑았지만 곧바로 볼셰비키가 집권하며 박해받았다.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에 티혼 러시아 총대주교가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설립을 명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국내파와 해외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후임 총대주교인 세르게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조치'를 이어가지만 실질적인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실제로 [[https://en.wikipedia.org/wiki/Living_Church|살아있는 교회]]란 별칭이 붙었다)' 정부의 관리 아래 들어갔고, 이러한 모습에 비판적이었던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우리나라의 남북한 이상으로 갈등과 대립을 겪어 왔다. 러시아에서 정교회가 자유를 얻은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의 주도로 소련 최고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이후부터였다. [[파일:external/nyblago.com/vosstanovlenie_edinstva_2.jpg]]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100년간의 갈등을 끝내고 2007년 5월 17일 일치를 선언한다. 무려 100년간의 갈등 끝에 이뤄진 일이다. 물론 이런 일이 있기까지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푸틴이 정교회 신자다 보니 직접 나서서 챙기고 다독거려서 상호 양보를 받아내고 일치에 이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 정교회 역시 본래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 정교회를 미국의 미트로폴리아 관구의 일본 정교회에 맡기려 했으나, 일본 정교회 역시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아 갈등하던 중 1955년 12월 25일에 서울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회의 결의에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 아니고 [[1월 7일]]인 이유도 정교회의 세가 워낙 강한 영향이다. 자세한 건 [[크리스마스]] 문서 참고.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아예 양력설과 크리스마스를 연계하여 신년 연휴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인 유일한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 다른 개최국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거나 아예 평일로 지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