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일전쟁 (문단 편집) === 대한제국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NZOUSZYPOGOBKMAUVUTP5YE5Y.jpg|width=100%]]}}} || ||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러일전쟁]]의 내면[* 대한제국의 운명이 뒤흔들린, 한국과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여기선 잘려 있는 삽화의 해설문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짧게 나온다.] || [[대한제국]]에는 그야말로 [[일제강점기|국권 상실]]의 전조가 되어버린 전쟁.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세력 균형마저 깨졌다. 당장 한국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식민 제국주의 시대 당시의 태국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식민지로 만든]] 프랑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다만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던 유럽이나 미국 등 열강들이 지리적으로 붙어있지 않는 먼 나라들이였던 태국과 달리 한국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이권과 세력 확장을 노리던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등 여러 강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태국과는 상황이 달랐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러일전쟁 종전 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안 가 1910년에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 제국은 사실상 러일전쟁의 유일한 전리품이었던 한반도를 있는대로 쥐어짜내 그간의 지출을 만회해야 했으며 그 결과 식민지배 10년도 안 되어 [[3.1운동|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패전국 러시아보다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은 대한제국인데, 만약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한반도는 세계 열강이 부딪히는 경계선으로 작동하여 동시기의 [[태국]]이나 [[에티오피아]]같이 중립국 위상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국제사회는 한반도를 완전한 일본의 영향권이라고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본격적인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종이 [[평양부]]를 제 2의 수도로 육성하려던 계획이 무너졌다.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과 [[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한국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이미 독립협회는 소멸되고 러시아 편을 들 뿐, 소수 친일파만이 일본을 믿고 지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치게 한국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지난 번 [[이토 히로부미|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한양|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을사조약|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 >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중에서 이토 등 일본의 선전으로 당시 한국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일본의 이런 기만술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매국노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여 [[을사조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배척하던 성향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주도권이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여기에 [[미일관계|미일 간]]의 [[카츠라-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앞으로 일본 편에 서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할거란 판단이 섰던 것인지 이때를 기점으로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앞장서고 [[경술국치|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이 됨으로써 평생 친일 매국노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