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디지아 (문단 편집) == 현대의 인식 ==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더불어서 당시 반인종주의와 탈식민주의라는 시대 흐름을 거슬러 블랙 아프리카의 백인 식민지 정착민 특권과 지배권 방어를 위하여 수립된 국가라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짐바브웨]] 독립 직전에 총선에 승리하여 독립과 함께 이언 스미스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로버트 무가베]]가 나중에 타락하면서 나라를 크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로디지아 역시 15%도 아닌 5%의 백인을 위한 나라였고 나머지 흑인은 무시했다. 로버트 무가베가 독재를 펼치고 국가 파탄과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정부도 집권 내내 1당 독재를 유지했으며 도시에 [[경찰]] 감시망을 촘촘히 조직했고 대(對) 흑인 게릴라 작전에서 수많은 흑인들을 죽임은 물론 화학무기까지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가난하게 만들었다지만 로디지아 시절의 흑인 주민은 가난에 시달렸으며 사회복지에 있어서도 차별받았다.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독립 당시(1965년) 경제 지표가 좋았다지만 이는 영국 본토의 지원과 그 당시 전세계적 경기 호조로부터 기인한 면이 적지 않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유발되어 경제 발전과 민생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 타격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포르투갈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이 끊기거나 감소하면서 더욱 심해져 이언 스미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로디지아 시기는 내전으로 농업이든 공업이든 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1978년 3월, 두 사람(이언 스미스와 아벨 무조레와)이 합의에 도달했을 때 고립된 수 많은 농촌 공동체가 처한 곤경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건 및 가축 보건 서비스가 마비되었고, 흑인이 이용하는 초등학교의 4분의 1가량이 문을 닫았다. 도로변 매복 공격이 일상화되어 전국 주요 도로의 야간 통행이 위험해졌다. 백인의 집단 탈출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멸망 이후 "나는 [[흑인]] 정권 수립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정권의 수립에 반대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이언 스미스는 로디지아 총리 재임 시기에는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로디지아의 주인은 백인이며 백인이 계속해서 로디지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표명한 바 있으며 1966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세기 말까지 연기하는 첫 번째 양보안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1971년 영국이 다수 통치(흑인 통치) 시행을 2031년까지 연기하는 두 번째 양보안을 제시했음에도 이조차 무산시킨 바[* "그러나 이 제안(영국 정부가 제시한 두 번째 양보안)에 대한 [[여론조사]] 임무를 맡은 영국인 판무관은 다수 흑인 주민들이 이 제안을 결코 용인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합의안은 무산되었다. 반대 여론을 주도한 감리교 감독 아벨 무조레와 목사(훗날 잠시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총리로 재임한 인물.)는 흑인 주민들 사이에 '억눌린 공포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침묵, 강요된 인내와 감춰진 증오' 등의 깊은 원한이 서서히 커져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저항에 주의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보복 조치로 응수했다. 그는 흑인 주민들에게 합의를 무산시킨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더욱 가혹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 그와 로디지아 정권의 목적이 백인 독재나 백인 우위 독재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1976년]] 이언 스미스는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붕괴와 그에 따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강한 타협 권고 등 정권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도 "나는 절대로 다수 지배(흑인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라는 말을 남겼다. 저 [[발언]]이 있은 뒤에 그는 "우리는 로디지아가 [[흑인]]과 [[백인]]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흑인과 백인이 대립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스미스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는 변호론도 있지만 그의 이전 발언을 종합해 보면 진실된 발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망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이언 스미스는 우선 온건파 흑인 세력과 협상이라는 '내부' 해결책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 대상자 아벨 무조레와 목사조차도 "그러나 아벨 무조레와 주교는 스미스의 시도를 비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환영하는 듯이 꾸미게 하지 마라.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권력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내놓지 않으면 전 세계에 있는 우리 친구들(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로디지아를 버리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운명》, 마틴 메러디스, 이순희 역, 휴머니스트, 2014] 당시 한국 언론에 소개된 이언 스미스와 로디지아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그들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범주에서 설명하지 반공주의자였을 뿐이라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10300329204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1-03&officeId=00032&pageNo=4&printNo=6169&publishType=00020|#]], [[https://news.joins.com/article/1396377|#]], [[https://news.joins.com/article/1008191|#]][* 로디지아 독립 시기 언론 기사들로 로디지아 국가의 인종차별성을 언급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0628022900009?input=1195m|#]], [[http://kor.theasian.asia/archives/79025|#]],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1909194519704|#]][* 로디지아가 해당 기사의 주제는 아니고 지나가며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로디지아를 인종차별과 결부시켜 언급하고 있는 언론 기사들 외에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인구의 5%인 백인이 나머지 95%의 흑인을 지배하던 나라라 지금도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이상향처럼 여겨진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백인우월주의]]자가 인터넷에서 마지막 로디지아인이란 아이디로 활동한 바 있고 로디지아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사진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