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터교회 (문단 편집) === 주요 교리와 그 흐름 === 초기 개혁(교회의 본질 회복)에 대한 교리의 기초는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멜란히톤에게 [[아우구스티노]]의 칭의론과 개혁의 방향을 가르치고,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코이네 그리스어]]를 가르쳐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강력한 예정설을 주장하며, [[아담]]을 통해 유전된 [[원죄]]로 자유의지가 완전히 타락하여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노예의지론으로 설명한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지은 저작 가운데 《소요리문답》, 《대요리문답》, 《노예의지론》을 남길 만하다고 꼽았다. 요리문답들에서는 기본적인 교리와 삶의 문제, 《노예의지론》은 이신칭의와 예정을 설명한다.] 따라서 [[야훼|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구원의 핵심이다. 또한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난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게 한다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며, 당시 상선벌악에 치중하여 주님의 마음에 들수록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스콜라 철학에 맞섰다. 이외에 [[성만찬]]과 [[세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중시하고, 이신칭의 교리를 주장했다. 다만 [[울리히 츠빙글리]]와의 일치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성만찬론을 공재론[* [[예수]]의 승천 이후 그의 인성과 신성이 모두 편재하기에 성찬의 빵은 그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의 피라는 이해.]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상징설을 주장하던 [[스위스]]의 외콜람파디우스, 츠빙글리 등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어]]권 개혁자들과 루터가 연합을 위해 만난 마르부르크 화의가 깨진 것은 이러한 성찬론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창적인 견해로 인해 루터는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들을 만나도록 주선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루터와도 합의하지 못하다가, 마르틴 루터가 중재한 비텐베르크 합의문에는 서명했으나 스위스의 취리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독일어권 교회들은 서명하지 않았다. 공재론은 예나대학교를 중심으로 등장한 강경 루터교회에게 이어졌다. 결국 루터교회 내부에서의 일치 문제가 다루어 질 때, '''일치신조'''의 필수 조항에 공재론을 넣었다. 공재론에 동의한 개혁자들은 오늘날 독일의 주류 루터교회가 됐다. 동의하지 않은 멜란히톤파 부류는 대부분 [[개혁교회]]와 일치를 이루었으며, 일치신조에 서명을 거부한 독립적인 지역루터교회로 존재하기도 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에 비해 온건한 어조로 《신학총론》[* 최초의 개혁적 조직신학서이다. 루터는 [[성경]]에 비견할 만큼 높게 평가했고 루터교회 교의의 기초가 되었다.]을 저술하며, 개혁자들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는 [[천주교]]에서 루터에게 동조한 다양한 성직자들에게서 불거진 전례 문제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면서도 [[장 칼뱅]]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칼뱅 자체가 융통성 있는 인물이었다. [[폴란드]] 개혁파에 감독제를 권유하고, 존 녹스의 과격한 저작을 출판 금지하기도 했고, 성공회의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와도 서신 왕래를 했다. 다만 공재론을 거부하여 강경 루터주의자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루터에게는 예의를 갖추며 맞대응을 조심했다. 또한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을 출판했다.] 칼뱅의 이중예정설에는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칼뱅의 이중예정설은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의 원액에 가깝다. 멜란히톤은 전적인 타락과 예정에 동의하되, 지옥으로의 예정은 언급하지 않거나 조심스럽게 본다. 단, 루터는 칼뱅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외에 교리에서는 일치 했다. 멜란히톤 스스로도 '''"스위스인들이 와서 말한다. 멜란히톤은 칼뱅처럼 생각하고 칼뱅은 멜란히톤처럼 생각한다."'''고 제자들에게 말했을 정도. 멜란히톤의 제자들과 동료들은 필리피스텐(Philippiste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성체성사]] 부분을 비루터교회 개혁자들의 상징설, 성령임재론[* 칼뱅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 독일어권 개혁자들이 주장하던 상징설과 루터의 공재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성령의 임재로 성찬에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고 이해한 성찬론이다.]과 조화될 수 있는 온건한 어조로 수정하자[* 이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수정본이다.], 비밀 칼뱅주의자라는 멸칭으로 강경 루터교회에게 배척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진은, 공재론을 강력히 밀던 강경파 루터주의자들의 본산인 예나대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현재 루터교회의 뿌리가 되는 개혁가들과 마찰을 빚었다. 멜란히톤이 죽은 후, 강경 루터교회가 비텐베르크 대학을 장악했다. 멜란히톤의 대표적인 제자인 우르시누스가 칼뱅주의자인 올레비아누스, 에라스투스 등과 함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만드는 등, 대부분의 멜란히톤에게 배운 제자들은 스위스의 츠빙글리파, 칼뱅파와 함께 개혁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극소수가 주류 루터교회에 잔류했다. 이후는 16세기말부터 17세기까지의 정통주의로 이어졌다. 이 시기 개혁교회, [[가톨릭]]과 논쟁이 극도로 이어졌다. 루터교회 정통주의는 성찬의 공재론, 구원으로의 예정만 인정하는 예정론[*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한 은혜로 구원 받으나, 지옥은 자유의지로 인한 본인의 죄라는 것. 구원 받는 자는 모두 조건 없이 선택 받은 죄인이지만, 지옥으로의 유기는 예정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예정론이다. 예정론은 멜란히톤, 성찬론은 루터의 견해가 이어진 셈이다. 신인협력설은 부정된다. 사실 개혁교회 내에서도 하인리히 불링거 등도 지옥으로의 유기는 부인하는 등, 이러한 예정론은 이중예정론과 함께 존재했다.]으로 요약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7세기에는 교리보다는 삶에서의 경건을 강조하는 경건주의가 등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등장하고 [[칸트]]에 의해 종합된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성경의 기적을 거부하고 이성적인 도덕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신학이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영향력이 커졌다. 이에 대응하면서 경건주의와는 다른, 감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했는데, 그 시작점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주도로 [[프로이센 왕국]]의 개혁교회[* [[호엔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요아힘 2세]]가 1539년, 루터의 주관 하에 루터교회로 개종하였고 1555년부터 종교개혁을 시행하여 완전한 루터교회로 돌아섰으나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 받았던 [[요한 지기스문트]]가 칼뱅교회로 개종하였다. 다만 당시 율리히-베르크-클레베 상속 분쟁에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개종한 것일 뿐, 신앙심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루터교회와 칼뱅교회가 공존하였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루터교회도, 칼뱅교회도 믿지 않은 이신론자에 가까웠다.]와 루터교회가 연합된 연합교회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였다. 슐라이마허는 집안 배경은 개혁교회, 성장 배경은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합리주의에 대응하면서도 영향을 받아 정통교리보다는 감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결국 이 자유주의는 19세기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등을 제외한 개혁교회, 루터교회, 연합교회의 다수 신학교들을 휩쓸었고, 양차세계 대전까지의 유력한 신학이 되고, 고등역사비평학과 함께 독일 주류 교단의 신학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양차세계대전까지 이어지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 등의 신정통주의자들이 고백교회 운동을 진행하고, 기존 정통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도 명맥을 이어오면서 현재 독일 루터교회의 신학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