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영복 (문단 편집) == 생애 == 1972년 12월, 사로청 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등장하였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사로청 위원장 자격으로 상설회의 의원이 되었으나 [[지재룡]]에게 사로청 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1982년 6월, 청진시 당위원회 비서로 등장, 1983년 9월에 사리원시 인민위원장 재임이 확인되었고 이후 당중앙위원회 3대혁명소조부 부부장으로 올라오면서 다시 청년문제에 관여했는데 이때 3대혁명소조부장이었던 [[장성택]]과 관계를 맺지 않았는가 싶다. 1991년 2월, 교육과학원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박승일(북한)|박승일]]의 뒤를 이어 남포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인민위원장 자리는 곧 방용덕에게 물려주었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재선되는 등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으나 2004년부터 동정보도가 끊기더니 2004년 [[장성택]]이 숙청될 당시에 장성택 라인이라는 이유로 같이 경질되었다는 보고가 [[https://www.dailynk.com/%EC%9E%A5%EC%84%B1%ED%83%9D-%EC%B8%A1%EA%B7%BC-%EB%82%A8%ED%8F%AC%EC%8B%9C%EB%8B%B9-%EC%B1%85%EC%9E%84%EB%B9%84%EC%84%9C-%EA%B2%BD%EC%A7%88/|나왔다.]] 후임 남포시 책임비서에는 최영선이 임명되어 활동하는 것으로 북한에서 보도가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